내가 믿는 것은 검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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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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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다닷.
안톤의 몸이 사정없이 모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벌써 수십 번도 더 반복된 상황이었다.
“다시.”
온-누르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안톤은 이미 너덜해진 몸을 겨우겨우 일으켜 세웠다.
만신창이.
그의 현 상황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단어가 있을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그와는 다르게, 안톤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비록 그 깊이가 얇지만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크고 작은 상처가 온몸을 도배했고, 흥건한 피와 땀 위로는 모래 알맹이들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안톤의 팔과 다리가 바람 맞은 가지처럼 후들거렸다.
“으아아!”
영혼을 담보 잡아 최후의 기력을 뽑아내듯, 안톤은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돌진했다.
이 노인이 자신에게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이유로 자신을 이렇게 혹사시키는 것인지,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지조차도 안톤은 알지 못한다.
“크흡……!”
이번에 역시 몇 번 되지도 않는 검격을 나누다 복부에 보인 빈틈으로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검이 아닌 주먹.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한 쨍한 통증이 일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한차례 흔들렸지만, 안톤은 이를 악물고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암만 온 힘을 실었다 한들 이미 엄청나게 지친 상태였고, 온-누르는 가볍게 그 검을 피해 내며 안톤을 발로 밀어 찼다.
‘차라리 검으로 찔러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이 모든 고통도 끝이 날 텐데.
정신력은 강한 육신에서 나온다고, 바닥을 구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런 나약한 마음가짐이었다.
‘나는 왜 이걸 끝내지 못하고 있지?’
각인 명령을 사용한 것은 맨 처음뿐이었고, 이제 그냥 다 포기하면 편할 텐데 말이다.
속으로 던진 물음이었는데도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네 검은 참 하찮구나. 기대한 내가 바보였지.”
툭툭 던지는 듯한 그 말들을 듣고 있자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아, 그런가…….’
지나온 일생 그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저 눈이, 몸짓이, 말투가, 자신은 그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치 거슬려서 이토록 무의미한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안톤은 그 말이 들려오기도 전에 처절한 몸짓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던 린디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자꾸 일어나는 거야……! 그냥 눈 감고 쓰러져 있으면 되는 거잖아…….’
그녀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몇 번이고 일어나는 저 남자와, 이를 몇 번이고 잔혹하게 떨쳐 내는 누르 공.
왠지 그걸 지켜보고 있자니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의 비위가 상한 것은 결코 잔인해서가 아니다.
아무리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고 한들, 린디아스 또한 한 사람의 무인이었고, 이런 것들에 대해선 어느 정도의 내성이 있다.
단지, 이 상황은 그 무언가를 뛰어넘는 역겨움이 있었을 뿐이다.
그녀가 살아온 경험으로는 그 무언가의 정체를 규정할 수가 없었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린디아스는 그저 어서 이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르 공……. 여기서 밤을 지새울 생각은 아니시겠죠?”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끝장을 볼 생각인 듯했다.
“시간이 이렇게나 됐군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일정이 걱정되시는 거라면, 먼저 가셔도 괜찮습니다.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아니에요. 기다릴게요.”
해가 지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온-누르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다시금 일어나 독기 어린 눈빛을 한 안톤이 있었다.
“노예로 살아와서 그런지 비실비실하구나. 그럼 이건 어떠냐? 지금 내가 인정할 만한 무언가를 보여 준다면, 네게 아주 좋은 기회를 주마. 대신, 그러지 못한다면 너는 평생 내 노예로 사는 거다. 어떠느냐?”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안톤은 노인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여러 생각이 동시에 떠올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먼저 좋은 기회라는 게 뭘까 궁금했다.
다시 한평생을 노예로 살아가는 건 두려웠다.
다 필요 없고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기도 했다.
‘눈꺼풀이 원래 이렇게 무거웠나…….’
문득문득 눈의 초점이 흐려진다. 눈앞의 장면들이 뭔가 부자연스럽다. 정신이 드문드문 끊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안톤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겠다 하지 않았던가.’
겨우 정신을 붙잡은 안톤은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 걸음을 앞으로 뻗었다.
“그렇게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뭘 보여 줄 수 있지?”
이 검을 휘두르기엔 아직 그와는 거리가 멀다.
또다시 한 발자국.
“그 보잘것없는 검으로 내게 뭘 보여 줄 수 있겠냔 말이다.”
그 냉소적인 말투에서 온 감정이 진탕된다.
안톤은 눈을 감았다.
‘나는…… 아니, 내 검은 보잘것없지 않아……!’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디딤과 동시에, 안톤이 길게 팔을 뻗는다. 그리고 이에 실린 검 또한 그만의 궤적을 남기며 휘둘러진다.
멀쩡할 때에 비하면 속도도 느리고 가벼웠지만, 어째선지 시선을 뗄 수가 없는 일검.
온-누르가 이를 막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다.
팅!
검과 검이 부딪쳤다고 하기엔 다소 김이 빠지는 소리였다.
그저 가져다 댄 것처럼 별로 반동도 없었다.
“……네 이름이 뭐냐?”
안톤은 그의 말이 솔직히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왠지 자신의 이름을 묻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안톤…….”
“좋아, 안톤. 내 이름은 온-누르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들었다. 온-누르.
앞이 흐릿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왠지 그가 웃고 있는 것 같다.
“잘 부탁한다.”
그 말을 마저 듣지 못하고 안톤의 몸이 지면을 향해 기울었다.
풀썩.
“말년에 참 재미난 걸 찾았구먼.”
온-누르는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안톤의 검과 부딪친 검날 부분의 이가 나가 있었다.
껄껄껄.
그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모래 바람 사이로 흩어졌다.
* * *
타닥타닥.
모닥불 장작이 타는 소리를 들으며, 안톤은 눈을 떴다.
은하수가 펼쳐진 짙은 남색의 하늘. 때는 어느새 한밤이었다.
“일어났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뭘 하고 있는 게냐?”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무언가가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순간 포박을 시켜 둔 것인가 싶었지만, 금방 그런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피부로 전해지는 포근하면서도 푹신한 감각.
이것이 모포라는 걸 알아채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안톤은 안쪽을 뒤적여 단추를 풀고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공기가 피부로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대체 이게 무슨…….”
“말했지 않느냐? 좋은 기회를 준다고.”
온-누르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의식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모멸의 말을 들었던 안톤으로서는 그런 모습이 어색했다.
‘좋은 기회라는 게 겨우 이런 거였나…….’
노예치고는 과분한 대접, 노예치고는 인간적인 대우.
‘그래, 노예치고는 말이지.’
안톤은 옆에 있던 여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바닥에 앉아 모닥불을 보고 있는 듯했지만, 자꾸만 이쪽을 흘깃흘깃하는 게 보였다.
이를 본 온-누르가 피식했다.
“그리고 여기 일단 인사하거라. 앞으로 소우든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여정을 해야 하니 말이다. 넬-린디아스 조르디 공녀님이시다.”
‘조르디……?’
어떻게 검을 든 사람으로서 그 이름을 모를까. 안톤 역시 익히 아는 가문이었다.
게다가 공녀라 칭하는 걸 보니 아마도 그 직계 후손인 듯하다.
오러 마스터를 옆에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거물인 것은 확인되었으니, 거짓말이냐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할 필요도 없었고.
“안톤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흥!
린디아스는 콧방귀만 찰 뿐, 대꾸도 않았다.
생각해 보니 안톤은 이 여인이 자신을 좋게 생각할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조르디가의 공녀면 자존심도 세겠지.’
어쩌면 이 새롭게 변한 주변 환경이 꽤나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은 노예였고, 그녀는 술주는 아니지만 손윗사람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결국 운명을 바꾸지 못한 거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됩니까?”
짐작 가는 건 있었다.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을 청소부든, 한 번 쓰고 버릴 화살받이든 간에 쓸 곳이야 많고, 어떻게든 쓰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다.’
일전에 벨토스의 목을 꿰뚫었을 때처럼 안톤이 자신의 손에 잔뜩 마나를 실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찔러 냈다.
목표는 본인의 목이었다.
“성질머리 급한 거 하고는…….”
어느새 안톤의 팔목은 온-누르의 손에 의해 붙잡혀 있었다.
안톤의 건장한 몸에 비해 얇디얇은 노인의 몸일지언대, 잡힌 손에 재차 힘을 주어도 미동조차 생기지 않는다.
“내가 좋은 기회를 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적어도 그건 들어 보고 결정해라. 그때는 막지 않으마.”
안톤으로서는 좋은 기회라는 말보다는, 뒷말이 더욱 신경 쓰였다.
‘막지 않는다고?’
지금껏 살아온 그대로, 이번 역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이 흘러간다.
이 노인의 팔을 풀어낼 힘이 안톤에게는 없었다.
안톤은 그저 그가 남은 말을 이어 하기를 기다렸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거참, 눈빛하고는. 안톤. 내가 본 바로는 네 검은 별다른 배움 없이 실전 속에서 혼자 갈고닦은 듯했다. 맞나?”
“그렇습니다.”
벨토스 검투사 양성소에서 처음 검을 배우긴 하였지만, 그건 정말 기초일 뿐이었고 제대로 된 검학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거기서 배운 거라곤 잡은 검을 힘 있게 휘두르고 찔러 내는 방법과 독기뿐이었다.
그뿐이었지만, 재능이 있던 안톤은 자율적인 수련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켜 나갔다.
매 경기마다 생과 사가 나뉘는 콜로세움에서 실전을 익혔고, 백작 부인의 밑에서 밤 시중을 들던 때 공상을 통해 검에 대한 이론을 정립시켰다.
이후에 소영주의 호위기사가 되며 배운 마나 연공법, 그게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사사한 무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이마저도 갖은 무시 속에서 그 기초만을 익히고 혼자서 갖은 시행착오를 통해 숙달시켜 나갔다.
지난 안톤의 삶은 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것이 부정당하는 것은, 그의 지난 생을 부정하는 것과 동일했다.
제오르 경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 안톤이 그토록 기뻐하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이런 과거를 그에게 상세히 고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나이가 어린 듯한데 어디서 그런 실전들을 겪었을까 참 궁금하다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고.”
꿀꺽.
누군가의 목울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톤. 나한테 본격적으로 검을 배워 보지 않겠나?”
“무슨 의미인 겁니까? 아, 제가 아직은 약해서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까?”
코르보 백작가의 소영주가 그랬던 것처럼, 이 노인 또한 그런 것이리라.
“에잉. 참 꼬인 놈이로고. 그러니까…… 내 제자가 되어 보지 않겠냐 이 말이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는 이 순간, 안톤은 상대방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가 수도 없이 생각했다.
이해는 하였으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안톤은 깊게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그게 좋다면 그러겠습니다. 어차피 제가 뭘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체념하는 안톤의 어투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온-누르가 답답하단 표정을 얼굴에 곧이 내비쳤다.
“아니, 네가 결정할 수 있다. 거절한다면 이 순간 다시 자살한데도 막지 않을 것이고, 아니면 그저 그냥 네 말대로 노예로 쓸 수도 있다.”
그는 잠시 말의 텀을 두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내 제자가 된다면, 약속하마. 10년 안에 그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참 이상하게도 듣는 것만으로도 확고함이 묻어나는 그의 중후한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믿음직스럽게 들렸다.
“풀어 주겠다는 겁니까?”
“그래. 결정은 너의 몫이다, 안톤.”
결국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