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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0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5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0화

010. 열망

 

 

“허억, 허억, 좀 멈추라니까…….”

 

드디어 안톤의 앞에 당도한 흑의 여인이 참아 왔던 숨을 토해 냈다.

 

“이토록 흐트러진 모습이라니, 오랜만에 좋은 구경을 했군요.”

 

껄껄 웃어 젖히는 노인의 모습은 얼핏 보면 참으로 무방비하게 보이기도 했다.

 

허나 안톤은 몸이 굳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는다.

 

검은 아예 바닥에 꽂아 세워 놓은 채였고 아예 등을 돌려 시선도 다른 곳을 향했지만, 안톤은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치 거대한 벽을 앞에 세워 둔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일전에 이런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오러 마스터 제오르 경을 앞에 두었을 때였다.

 

그렇다면 이 노인이.

 

“오러 마스터라고……?”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이었는데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도 청천벽력 같은 대답이.

 

“허. 고작 그 수준으로 어떻게 알았지? 암만 봐도 이상한 놈이로다…….”

 

믿기지가 않았다.

 

명인(名人)의 반열에 올라 칭송받는 오러 마스터란 이렇게 아무 데서나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기, 그 엇비슷한 존재가 하필 안톤의 앞에 나타나 앞길을 막아서다니.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지금 이 상황은 마치 하늘의 농락과도 같지 않은가.

 

“왜…… 나는, 나는……!”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는 거냐. 안톤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는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만 모두 다 내려놓고 싶다는 나약한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손가락이라도 치켜세울 힘이 남아 있다면, 그래서 최후의 발버둥이나마 칠 수가 있다면.

 

필사적으로 그래야만 했다.

 

그게 안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실성했군.”

 

우두커니 위에서 내리쬐는 냉정한 시선 속에서 안톤은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놓친 검을 주워 들어 노인을 향해 겨누었다.

 

기가 차다는 듯 노인은 웃었다.

 

“그것도 단단히 실성했어. 하지만 그 기백만큼은 마음에 드는군.”

 

안톤은 심호흡을 가다듬고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혹시 그냥 눈감고 지나쳐 줄 생각은 없습니까?”

 

“기세만 보면 마치 협박이라도 하는 것 같구나. 하여튼 웃긴 놈이야.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요, 공녀님?”

 

숨결을 가다듬은 흑의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안 돼요. 저 검에 피가 묻은 걸 봐요. 무고한 사람을 해치고 도망가는 게 틀림없어요.”

 

무고한 사람이라. 하긴 노예가 주인을 찌르고 도망친 것이니 별로 틀린 말은 아닌가.

 

그 한 마디로 이들과 자신 사이에는 말로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톤은 더 이상 구차해지지 않기로 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한다. 물러서지 않겠단 의지의 표명이다.

 

흑의 노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답니다. 그럼 잘해 보시지요, 공녀님.”

 

“누르 공!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까는 도와 달라고 하셔서 도와 드렸는데. 그럼 어째, 나머지 부탁마저 쓰시겠습니까?”

 

“으음…….”

 

당했다, 라는 것인지 흑의 여인이 참담한 표정을 짓는다.

 

그 얼굴을 보며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고 여겼는지 노인은 더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좋아요. 제가 이 남자 하나 제압하지 못할까 봐서요? 대신 이 남자가 도망가려고 하면 그때는 잡아 주셔야 할 거예요. 그 부탁은 아직 유효하니까.”

 

“알겠습니다, 공녀님.”

 

이 둘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 것일까.

 

노인이 저 여자에게 공녀님이라고 존칭을 하는 걸로 봐서는 상하 관계인 듯싶은데, 지금 이 모습을 보니 그런 단순한 관계는 아닌 것 같지 않은가.

 

‘나머지 부탁이라……. 무언가 대가를 지불하고 저 노인을 한정적으로 부리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오러 마스터를 대상으로 무조건의 부탁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안톤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귀중한 부탁 중 하나를 왜 하필 자신에게 사용을 하는 것인지도 말이다.

 

‘내가 신경 쓸 것은 그게 아니겠지.’

 

뭐, 아무렴 어떤가.

 

결국 일은 그렇게 흘러갔고 이제는 무려,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겠다는데.

 

‘순식간에 여자를 제압하고 그 목숨을 담보로 거래를 제안하는 수밖에 없나.’

 

비록 발버둥으로 끝날지라도 그것이 현재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리라.

 

그럼 가겠습니다, 따위의 말은 입 밖으로 하지 않는다. 기합 소리도 없었다.

 

여자든 아니든 중요치 않다. 이렇게 앞을 가로막고 나선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압해야 할 적일 뿐.

 

본래 자세에서 별반 준비 동작도 없이 안톤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읏……!”

 

여인의 심장을 향해 쏘아진 기습적인 찌르기.

 

여인은 어찌어찌 검을 쳐 내며 궤도를 틀었지만, 결국 어깨에 기다란 혈선을 내고야 말았다.

 

“이런 비겁……!”

 

여인의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흐트러진 자세를 정비할 새도 주지 않고 재차 안톤의 검격이 이어진 탓이다.

 

안톤의 검을 감싸는 푸르스름한 빛은 한없이 얇고 예리했다.

 

그 검날이 몸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 서늘함에 여인은 소름이 돋았다.

 

몇 번의 검격을 나눠 보았을 뿐이지만 안톤은 알 수가 있었다.

 

처음 일격에 실린 힘 때문에 상대를 과대평가하였다고.

 

유동적이지 못한 수동적인 대응과 적을 탐색하는 시야의 위치, 그리고 호흡까지.

 

‘수준에 비해 실전 경험이 없어.’

 

그 증거로 약간의 변칙만 섞었을 뿐인데도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지 않은가.

 

‘저 남자를 다시 부르기 전에 단숨에 제압한다.’

 

극단적인 상황에 치달으면 저 노인이 개입을 해 왔을 것이라는 판단에 그러지는 않았지만, 죽이려면 진즉에 죽일 수 있었다.

 

‘지금이다.’

 

안톤은 허리를 숙였다.

 

수비만 해서는 답이 없다는 오판을 내린 흑의 여인이 검을 크게 휘두르고 있었다.

 

안톤은 과감하게 그 아래 틈을 파고들었다.

 

“으읍……!”

 

여인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모래 바닥에 쑥 들어가 박힌다.

 

여인은 괴로운 듯 신음을 뱉었지만 안톤의 손에 가로막혀 희미하게 새어 나올 뿐이었다.

 

한순간에 틈을 파고든 안톤은 어느새 여인의 등 뒤에 서서 그녀를 제압하고 있었다.

 

그저 옆에서 관망하던 노인이 나섰다.

 

“껄껄. 이제는 인질극이라?”

 

결국 이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자신의 손아래라는 듯이, 이 상황에서도 노인은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했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다. 오러 마스터들은 상식 밖의 초인들뿐이었으니까.

 

‘이 정도 상황쯤이야 그에겐 재밌는 상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겠지.’

 

암만 최선을 다해 봤자, 노인의 마음에 따라 자신의 처우가 갈릴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안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읍읍!”

 

여인이 있는 힘껏 몸부림치며 무언가 외친다.

 

입이 틀어 막힌 탓에 음성은 짓뭉개졌으나,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명백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당장 날 구해 달라. 두 번 남은 부탁이라면 지금 쓰겠다.

 

그런 의미가 가득 담긴 여인의 눈빛을 저 노인이라고 읽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공녀님.”

 

노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진 여인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 시선만큼은 그로서도 조금 부담이 되었는지 노인이 옆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아마 그 때문에 공녀님의 입을 막은 것이렷다? 참 약삭빠른 놈이로다. 그럼 그 장단에 잠깐 어울려 보도록 할까.”

 

“그냥 날 이대로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이 여인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겠습니다. 아니, 당신이 있는 이상 그럴 수도 없겠지만…….”

 

“허허……. 그럼 그걸 안다면서 왜 그러고 있는 것이냐?”

 

“한 줄기보다 얇은 가능성일지라도, 그것이 눈에 보이면 필사적으로 매달려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미약하게 떨리는 안톤의 목소리엔 집념, 혹은 울분이 가득 섞여 있었다.

 

노인은 문득 그가 마치 상처 입은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냥 보내 주겠다고 하면 믿겠다는 말인가?”

 

“누군가에겐 돌멩이보다 무가치한 것이 약속일지 모르지만, 당신들에겐 아닐 것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묻겠습니다. 저에게 그만큼의 가치가 있습니까?”

 

쫓아온 것은 잠깐의 여흥이었을 뿐, 애초에 스쳐 지나 보냈어도 될 사람이다.

 

그러니 이대로 보내 준다고 해서 실제로 손해 보는 것도 없지 않느냐.

 

안톤은 그런 물음이 담긴 눈빛을 노인을 향해 쏘아 내고 있었다.

 

“내가 너를 붙잡아야 할 이유가 있냐고 묻는 거라면…… 없다. 아니, 없었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지금은 네놈에게 궁금한 것들이 잔뜩 생겨 버리고 말았으니까.”

 

껄껄. 웃는 노인의 모습에 안톤은 이를 까드득 갈았다.

 

“당신들에겐 잠깐의 유흥거리일지 몰라도, 내게는 일생이 달려 있단 말입니다!”

 

노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도의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지만, 결국 너도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맘대로 해치지 않았나? 나도 그럴 뿐이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군.”

 

노인이 한 걸음 내딛는다.

 

마치 거인의 걸음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일보.

 

안톤의 낯빛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 네놈에겐 저런 논리보단 직설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 나았을 텐가?”

 

고개를 갸웃한 노인이 갑자기 씩하고 웃는다.

 

“나는 강하고, 너는 약하다.”

 

결국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힘이란 말인가.

 

지금 이 순간.

 

안톤은 그 어느 때보다 힘이라는 무형의 존재를 열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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