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8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8화
008. 역습
“알겠습니다……. 그럼 저리로 함께 가시지요.”
“그럴 것 없습니다. 여봐라! 저놈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연병장 위에 서 있던 검투사는 조금 귀찮은 내색을 하면서 널브러진 안톤의 몸을 짐짝처럼 들고 와서는 앞에 내던졌다.
털썩!
바닥에 던져진 안톤은 그 충격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음……. 혹시 이놈을 일으켜 세워 줄 수 있겠소?”
검투사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안톤을 일으켜 세웠다. 벨토스는 의식을 시작하기 위해서 안톤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
안톤의 이마에 그의 손이 막 닿으려는 때였다.
사막왕국의 무더위가 무색하게, 순간 등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벨토스는 조금 놀란 기색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건……?’
살면서 몇 번인가 느껴 보았던 기묘한 감각.
어떠한 중대한 실수를 하려고 할 때면 가끔 이런 기분이 들고는 했다.
대체로 큰 거래를 앞두었을 때였다. 그럴 때 다시 한 번 계약서와 물건을 점검해 보면 사실 알고 보니 큰 위기여서 간을 쓰다듬었던 적이 많았다.
벨토스는 이 현상을 상인의 직감이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지금 왜?’
암만 생각해 보아도 건덕지가 없었다.
설마 이 노예를 파는 것이 이렇게 강한 직감이 피어날 정도로 손해라는 뜻일까?
그렇게 고민하던 중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잡고 있으면 됩니까?”
말만 존칭이었지 잔뜩 불만 어린 말투.
벨토스는 그런 검투사의 모습에 조금 기가 죽었지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아이도 내일 다른 훈련생들과 함께 거래하면 안 되겠습니까?”
“음……. 그래도 되겠지만, 그대는 방금 분명히 나한테서 돈을 받지 않았습니까?”
상인이라면 약속을 지켜라.
그러한 의미가 담긴 눈초리가 벨토스를 향해 쏘아졌다.
벨토스는 금세 결단을 내렸다.
이 노예가 훗날 큰 이득을 안겨 줄지 몰라도, 지금 당장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2~3골드에 사 온 노예가 아닌가.
“알겠습니다. 저…… 좀 잘 잡아 주시겠습니까?”
“이미 잡고 있잖습니까?”
여기서 어떻게 더?
검투사는 불손한 표정으로 말을 대신했다.
“도망가지 못하게 말입니다. 혹시라도 모르니…….”
“거참. 이미 기절한 놈을 상대로 걱정도 많습니다. 노예를 사다 파는 사람 맞습니까?”
“컬트, 제대로 도와 드려라.”
“쩝.”
검투사는 안톤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과할 정도로 세게 힘을 주었다.
“됐습니까?”
“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함께 온 양성소의 교관에게 혹시 모를 사태를 잘 대비해 달라는 눈짓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벨토스는 조심스레 안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각인 명령. ‘술주 전이’를 하겠다.”
읊조림보다 짧았던 의식의 주문이 끝나자. 분명 맨살이었던 안톤의 이마에 육망성이 그려졌다. 그리고 어느덧 휘황찬란한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곳에 맞닿은 벨토스의 손끝이 그 빛으로 물들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불빛이야…….”
그 빛에 홀리기라도 한 듯, 콜로세움의 상인은 멍한 눈짓으로 중얼거렸다.
안톤의 상반신에 새겨진 마법진도 빛을 내기 시작했다.
빛의 색은 점점 진해졌다.
그리고 안톤의 몸에서 빛들이 벨토스의 손끝을 향해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워…….”
마법적인 현상들이 조금 꺼림칙하게 느껴지는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검투사는 안톤의 몸을 놓지 않았다. 안톤의 몸에서 빛이 꺼지고, 벨토스의 손이 환하게 빛났다.
뜨거우면서도 동시에 차가운 이율배반적인 감각.
“마치 신이라도 된 기분이지요. 그거 굉장히 기분 좋지 않습니까? 나는 선택하는 ‘위엣 사람’이라는 우월감이라고나 할까.”
지켜보던 콜로세움의 상인이 흥분하면서 말했다.
이제 벨토스가 상인에게 이 빛을 넘겨주고, 그 상인이 다시 안톤의 이마에 빛을 집어넣으면 전이 의식은 끝이 난다.
“어서 이리 주시오.”
이런 이상한 느낌이 도대체 어디가 좋다는 건지. 상인이 보채지 않더라도 벨토스 또한 한시라도 빨리 의식을 끝내고 싶었다. 그렇게 발을 떼려는 차였다.
“으아아아!”
벨토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모여 있던 인물들은 다들 영문 모를 기색이었다.
“저, 저기……!”
벨토스의 손끝에는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눈빛을 자아내고 있는 안톤이 있었다.
* * *
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안톤은 불안했다.
요동치고 있는 이 심장 소리가 혹 그들에게 닿지는 않을까.
그걸 듣고 행여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그것은 기우였다.
어느 누구도 안톤이 기절한 척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셀 수도 없이 이날을 떠올리며 걱정하고 준비하던 안톤으로선 약간 허무한 심정마저 들 정도였다.
‘어쩜 이렇게까지 잘 풀릴 수가.’
심지어 따로 구속구를 채운 것도 아니다.
컬트라는 이름의 검투사가 몸을 붙잡고 있기는 했지만, 그를 비롯한 주변의 어떤 인물들 중에서도 딱히 안톤을 막을 수 있을 만한 자들은 없었다.
마치 하늘이 자신을 돕는 것만 같지 않은가.
‘진정하자……. 괜히 들떠서 일을 망쳐선 안 돼.’
다신 찾아오지 않을 천고의 기회다.
안톤은 다시 한 번 기감을 이용해 주변을 살폈다.
딱히 새롭게 신경 쓸 점은 없었다.
어느새 의식이 종반부에 치닫는다.
안톤은 순간 자신의 몸에, 아니 영혼에 박혀 있던 그 무언가가 뽑혀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박탈감이라고 할까, 아니면 해방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 기괴한 감각 속에서 안톤은 체내의 마나를 순환시켰다.
청량한 기운이 혈맥을 따라서 안톤의 몸을 한 바퀴 돌며, 오밀조밀 유연하게만 보이던 안톤의 근육이 바짝 이완됐다.
“음?”
뒤에서 안톤을 구속하던 검투사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듯했지만, 이미 늦었다.
안톤은 비로소 굳게 닫혀 있던 눈을 치켜떴다.
이 빌어먹을 마법각인의 술주. 벨토스 가롱벨은 코앞에 서 있었다.
“으아아아.”
처음부터 이 모든 계획의 요지는 속전속결이다.
뒤로 넘어진 벨토스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안톤은 아기 다루듯 검투사의 팔을 풀어내고 그대로 옆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체내에서 순환되고 있던 마나를 손으로 집중시켰다.
서슬 퍼런 빛을 내는 안톤의 손날은 이제 훌륭한 흉기였다.
“저, 저기……!”
안톤은 그 누가 반항하기도 전에, 벨토스를 향하여 손을 찔렀다.
타격점은 목.
빠른 속도로 나아간 안톤의 손은 그대로 벨토스의 목울대를 관통했다.
모두 안톤이 눈을 뜨고서부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억! 꺼이, 꺽꺽…….”
침을 삼키듯, 그의 목젖 부분의 근육이 경련했다.
무언가 한 마디를 내뱉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피만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안톤이 찔러 넣었던 손을 빼내자 피분수가 일어났다.
원래부터 새빨갛던 안톤의 머리칼이 벨토스의 피에 흠뻑 젖었다.
지탱하던 힘이 사라진 벨토스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풀썩.
그것을 기점으로 소란이 시작됐다.
“으아아아아! 다들 저놈을 막아아아!”
그 말이 있기도 전에 주변에 있던 검투사들은 제각기 무기를 꺼내 들어 안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죽어라!”
안톤은 제일 먼저 후면에서 기습해 온 검투사의 검을 옆으로 피해 내며 검을 쥔 손을 수도로 가격했다.
“흡!”
안톤은 검투사가 놓친 검을 공중에서 낚아채 검등으로 검투사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그리고 나머지 검투사들도 마찬가지로 검등으로 제압했다.
문 쪽에서 들린 인기척에 안톤은 고개를 돌렸다.
판단이 빠른 콜로세움의 상인은 어느새 비명을 지르며 도주하고 있었다.
‘죽일까?’
뱃살을 출렁이며 도망가는 상인을 따라가서 잡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지만, 안톤은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벨토스랑은 다르게 콜로세움 측을 건들면 추격이 더 집요해지겠지.’
여타 검투사들 또한 검날이 아닌 검등으로 제압만 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들 역시 콜로세움의 재산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아니지.’
짧은 생각을 마친 안톤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는 양성소의 교관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오, 오지 마!”
그를 향해 안톤이 한 걸음 내디뎠다. 바닥에 피로 물든 족적이 새겨졌다.
늘어나는 족적만큼, 주변의 검투사들은 지레 겁을 먹고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당신들이 말했었지. 한 점의 자비마저 마음속에서 떨쳐 버리라고.”
두려움이란 감정에 잡아먹힌 교관의 검 끝은 그 주인의 심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검 끝에 힘이 없군.”
안톤이 그간 양성소 생활을 하며 교관에게 몇 번이고 들었던 소리였다.
그렇게 흔들리는 검으로는 무엇도 벨 수 없다고, 녀석들은 그렇게 말했었다.
“자, 잠깐만! 그만! 이런 젠장!”
어느새 등에 벽이 맞닿아 더 물러설 곳이 사라진 교관이 눈을 질끈 감고 검을 휘둘러 왔다.
안톤은 이를 가볍게 검으로 쳐 냈다.
“눈까지 감다니.”
조금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실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또 이렇게도 말했어.”
안톤은 전장을 겪었다.
삶과 죽음이 쉴 새 없이 교차하는, 그 어느 곳보다 죽음이 가깝게 느껴지는 곳.
그곳에서조차 사람들은 대개 죽음 앞에서 초연하지 못했다.
그것은 교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발 살려 줘!”
“죽음을 두려워 말라고.”
안톤의 검이 휘둘러졌다.
그들이 그렇게 강조하였듯이, 휘둘러지는 그의 검엔 자비란 없었다.
“당신들은 항상 말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