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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49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6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49화

049. 탄로

 

 

사실 그동안의 안톤은 회귀의 이점을 거의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피치 못하게 그의 주 무대였던 북부가 아니라 생소한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게 된 탓에 갖고 있던 미래의 정보들을 활용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어서 그녀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십시오.

 

안톤의 전음을 받은 핫산은 그를 대신해서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그럼 자네의 상관은 언제쯤 오는가?”

 

“그건 나도 잘 모르오. 워낙에 여기저기 쏘다녀야 말이지.”

 

“추측이라도 좋으니 당신이 생각하는 시기를 말해 보게.”

 

“아 참!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가끔씩 들르기는 하는데 일주일이 넘게 코빼기도 안 비칠 때가 있단 말이오. 뭐, 나도 그녀를 못 본 지 사흘은 지난 것 같으니, 오늘내일은 여기에 올 것 같기도 하지만…….”

 

핫산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약 없는 며칠이나 소모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인가 고민하는 듯싶었다.

 

그 기색을 읽은 안톤은 재빨리 그에게 다시 전음을 보냈다.

 

-반드시 그녀를 만나 도움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이번 상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법입니다.

 

안톤의 확신이 담긴 말에 그제야 핫산도 얼굴색을 달리했다.

 

“혹시 종이와 펜 좀 빌릴 수 있나?”

 

“하하! 돈도 물건도 없는 상회지만, 그 정도는 있다오.”

 

핫산은 남자가 전해 준 종이에 글을 적어 내렸다.

 

매우 잽싼 행동이었으나, 그 글자들은 어느 서예가에 못지않은 명필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직 통성명도 하질 않았군. 내가 자네를 어떻게 불러야겠나?”

 

“아렛이면 충분하오.”

 

“그래, 아렛. 자네의 상관이 이곳에 도착하면 이 쪽지를 전해 줄 수 있겠나?”

 

“보수만 있다면.”

 

“이걸 주겠네. 어떤가, 충분한가?”

 

금화를 챙겨 받은 남자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무슨 내용을 적은 거요?”

 

“따로 봉인한 것도 없고, 내가 나가고 자네 혼자 읽어 보면 될 텐데 왜 굳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겐가?”

 

“이래 봬도 나 또한 상인이오. 대가를 받은 이상, 거래는 지켜야지. 그저 방금 질문은 이걸 비밀로 취급해야 하는 거 아닌가에 대한 물음일 뿐이었소.”

 

“하하.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뭣도 모르고 실언을 내뱉은 셈이군. 아, 그리고 질문에 답을 주자면, 자네가 읽어도 상관은 없네. 그저 정확히 그녀에게만 전해 주게.”

 

“물론이오.”

 

“그럼 또 보세.”

 

 

* * *

 

-그나저나 무슨 내용을 적은 겁니까?

 

딱히 핫산이 감추면서 글을 써 내린 것은 아니었으나, 문장 자체가 워낙에 짧은 데다가 그의 팔꿈치에 종이가 가려지는 바람에 안톤 역시 그가 뭐라 적었는지 알 수 없었다.

 

“별거 없네. 그저 내게 많은 돈이 있고, 이걸 당신과 함께 불리고 싶다는 내용이었지.”

 

이미 핫산은 그녀를 이번 상계에서 끝까지 함께할 파트너로 정한 것 같았다.

 

-혹시 그녀에 대해서 아십니까?

 

“아니, 그녀의 이름은 오늘 처음 들었네만?”

 

-근데 만나 보지도 않고 어찌…….

 

“내가 궁전을 나설 때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예감이 좋다고.”

 

-…….

 

“하하! 농담이네, 농담. 사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네.”

 

-이유…… 말입니까?

 

“이유라고 하긴 뭐하고…… 나름 합리적인 추론이라 하세. 아까 자네가 바닥에서 머리카락을 줍지 않았던가?”

 

-그걸 보셨습니까?

 

“그래. 근데 그 머리 색이 파란색이더군? 그걸 본 이후 자네의 반응을 보니 갑자기 누군가 들려줬던 파란 모자의 유래가 떠오르는 걸세.”

 

블루 머챈트의 상인들이 쓰고 다니는 모자 색의 유래는 바로 상단주의 머리 색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흔히 알려진 이야기이니, 그가 어느 날 우연히 들었다 하여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아주 미세한 단서 하나로 짧게 스쳐 간 기억을 떠올려 낸 것은 대단했다.

 

-그 추측이 옳다고 해도, 그녀가 가문에서 내쳐졌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들은 자네는 내게 그녀를 꼭 얻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무언가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자네에게 있을 거라 생각했네. 그리고 애초에 만난 이후에도 아니다 싶으면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핫산의 말을 쭉 듣고 있자니, 그가 결코 합리적인 추론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그저 안톤을 깊게 신뢰했던 것이다.

 

 

* * *

 

“아, 일찍 오셨네요? 아직 준비가 다 안 끝났는데…….”

 

궁전으로 돌아갔을 때 핫산의 주거 공간엔 펠샤인이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다 무엇이더냐?”

 

“그도 그럴 게 이제 적왕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잖아요? 오라버니께서 힘내시라고 준비했어요.”

 

아직 하녀들이 음식들을 나르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테이블에 올라온 음식들만 하더라도 충분히 호화로운 만찬이었다.

 

“그래도 어찌 이걸 혼자 다…….”

 

“제가 뭘 했나요? 여기 시녀들이랑 아네스가 다 했죠. 참, 혹시 식사를 하신 건 아니죠?”

 

다행히도 핫산과 안톤은 궁으로 돌아와서 간단하게 식사를 할 참이었기에 아직 공복 상태였다.

 

“그건 그렇지만…….”

 

핫산이 슬쩍 안톤의 눈치를 보았다.

 

펠샤인 공주가 낀 이상 아무리 만찬을 차려 두었어도 안톤은 굶어야 하는 것이다.

 

허나 그걸 모르는 펠샤인은 집요한 물음을 던져 왔다.

 

“안톤, 아니 칼 님도 같이 식사하실 거죠?”

 

말실수라도 한 듯이 말을 고쳤지만, 의도된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톤은 전음을 사용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럴 수 없소.

 

머릿속에서 말이 울려오자, 펠샤인이 흠칫 놀랐다.

 

“어머? 설마 이건 칼 님께서 하신 건가요? 신기해요. 혹시 마법을 배우신 건가요?”

 

안톤은 약간의 설명을 보탰다.

 

-마법은 아니오.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설명이었으나, 펠샤인은 그에 대해 더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근데 왜 이제야 말을 걸어 주시는 거예요? 저는 감쪽같이 몰랐잖아요.”

 

속상하다는 듯 팔짱을 끼는 그녀는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이 기술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소.

 

“아하! 다행이에요. 이렇게라도 목소리를 되찾으셔서! 아무튼 그럼 오늘도 혼자 방에 들어가 계실 건가요?”

 

-아니오. 옆에서 자리만 지킬 생각이오.

 

평소처럼 그녀를 피하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최대한 관찰할 생각이었다.

 

“알았어요. 그래도 혹시 생각이 변하면 바로 말해 주셔야 해요? 얼굴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저는 정말로 그런 건 상관하지 않는답니다? 어디 감히 사람을 얼굴로만 판단해서야 되겠어요?”

 

-말은 고맙지만 정말로 괜찮소. 그리고 만약 정말로 내가 식사를 하길 원한다면, 그냥 이 자리를 떠나 주면 되오.

 

“어머나, 재미있으셔라.”

 

나름 진심이 담긴 말이었는데, 펠샤인에게 농담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아마 그녀는 순순히 떠나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크흠.”

 

핫산이 고의성이 뚜렷한 기침 소리를 내며 눈치를 주었다.

 

전음입밀의 수법은 말과 다르게 개인에게만 보낼 수 있었기에 그로서는 조금 답답했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대화는 그만하고 어서 들도록 하지. 기껏 준비한 음식들이 다 식겠어.”

 

셋 모두 자리에 앉자 조금 웃기는 상황이 연출됐다.

 

기품 넘치는 왕족 둘과 철투구를 뒤집어쓴 채 텅 빈 접시만을 바라보는 괴한.

 

문득 주변에서 바삐 움직이는 하녀들의 웃음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아마 궁중 생활을 오래 한 그녀들로서도 처음 보는 이색적인 풍경이었으리라.

 

안톤은 핫산과 펠샤인이 식사를 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멀뚱멀뚱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 화상이 있다는 거 거짓말이죠?

 

귓속에서 펠샤인 특유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잠깐 흠칫한 안톤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핫산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허나 잠깐 눈이 마주쳤을 때, 펠샤인이 한쪽 눈을 찡긋하는 걸로 보아 환청은 아니었다.

 

‘위스핑 마법이군.’

 

전음과는 다르게 위스핑 마법은 목소리의 구별이 가능했다. 물론 기본적인 마법에 변형을 섞을 만큼 시전자의 실력이 뛰어나다면, 그 목소리의 변조도 가능했고 말이다.

 

-그래서 대답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갑자기 물어 오셔도,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외형을 바꿔주는 목걸이. 그걸 오라버니한테 준 게 바로 나였어요. 그러니 속이려 들지 마요.

 

‘아…….’

 

순간 안톤은 정신이 멍해졌다. 이미 핫산에게서 그 사실을 들었으면서도 왜 이런 맹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던 걸까?

 

크게 한숨이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데 알고 있다면 왜 다시 물어보는 거지? 설마 그냥 찔러보는 건가.’

 

안톤은 이렇게 철투구를 쓰고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낭패한 표정이 그대로 그녀에게 드러났을 테니 말이다.

 

투구 속에서 잠시 심호흡을 가다듬은 안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전음을 보냈다.

 

-목걸이? 그게 뭡니까?

 

-……끝까지 모른 체할 속셈이라면 됐어요.

 

그 이후로 식사가 끝날 때까지 펠샤인은 위스핑 마법으로 대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주어진 후식을 즐기던 때였다.

 

“오라버니. 그런데 조르디가는 어땠어요? 어머니의 고향이잖아요. 저도 언젠가 한 번쯤은 가 보고 싶어요.”

 

“응? 조르디가? 아마 그곳은 네가 생각하는 곳은 아닐 게다. 게다가 내가 그곳에 있을 때는 큰일이 벌어진 직후라, 난리도 아니었지.”

 

“아! 조르디의 가주가 죽은 그 사건이요?”

 

짝 소리를 내며 박수를 치는 펠샤인을 보며, 안톤과 핫산은 동시에 얼어붙고 말았다.

 

“어……. 아는 것이냐?”

 

“그럼요. 아무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소식이 끊겼다지만, 제 외가인걸요? 항상 신경 쓰고 있었죠. 그 암살자의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아네스가 말해 줬었는데…….”

 

펠샤인은 기억을 되짚으며 말꼬리를 길게 흐렸다.

 

“…….”

 

핫산의 시선은 펠샤인의 입가로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꼴깍하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마저 들릴 지경이었다.

 

“음……. 기억이 나질 않네요!”

 

몸이 긴장해서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핫산의 어깨가 늘어져 내려 등받이에 걸쳐졌다.

 

잔에 남아 있던 과실주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들이켠 펠샤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식사도 끝났겠다, 이제 가 봐야겠어요.”

 

“아니, 벌써? 좀 더 있다 가지 않고 왜?”

 

“약속이 있거든요. 안녕히 계세요. 오라버니. 그리고…….”

 

펠샤인은 안톤을 향해 눈짓을 보내며 끝인사를 했다.

 

사실 보낸 것은 눈짓만이 아니었다.

 

-안톤.

 

우연히 들은 이름 외에도, 여타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는 낌새가 가득한 어조.

 

사실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내심 그녀가 조르디가에 대한 얘기를 뜬금없이 꺼낸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지금 궁금한 것은 딱 하나였다.

 

-도대체 뭐가 목적인 겁니까?

 

-후후후……. 글쎄요?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왠지 그걸 당신이 알려 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드네요. 잘 있어요.

 

부드럽게 문이 닫히며, 방에는 펠샤인이 좀 전까지 존재했다는 특유의 향기만이 그윽했다.

 

“후우……. 걸릴 뻔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잘 넘어갔군.”

 

진이 다 빠진 사람처럼 의자에 축 늘어지는 핫산을 보며 안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저나 펠에게 터놓고 말해 주는 것은 어떤가? 아직도 찜찜해서 싫은가? 하지만 자꾸 그 아이를 속이려 하니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러네.”

 

물론 투구에 가려져 제대로 닿지도 않겠지만 안톤은 핫산을 잠시 째려보았다.

 

자다 깨서 내뱉은 그의 한 마디 말실수 덕에 숨기던 정체가 들통 났는데도 혼자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왜, 왜 쳐다보는가? 뭔가 느낌이 쌔한데…….”

 

“됐습니다. 아무튼 펠샤인 공주의 스승에 대해서나 좀 알려 줘 보십시오.”

 

핫산은 실어에 빠져 있던 펠샤인이 다시 밝게 변한 것은 마법을 배우고 난 이후라고 했었다.

 

그래서일까.

 

아무래도 왠지 그 스승이라는 자를 캐다 보면 무언가 나올 것 같았다.

 

펠샤인과 오늘 있었던 일은 좀 이따 말해 주기로 했다.

 

그 나름대로의 사소한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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