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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46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4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46화

046. 승하

 

 

“그야 단순하게 말할 기회가 그동안 없었던 것 아니겠나? 그 아이가 그런 걸 자랑하고 다니는 성격도 아니고.”

 

펠샤인이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다는 안톤의 걱정 어린 말에도 핫산은 태평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럼 왕자님께 마법을 쓴 건 뭐라고 설명할 겁니까?”

 

“뭐 해를 입힌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코 나쁜 뜻은 아니었겠지. 그나저나 자네는 정말로 그게 마법이라고 확신하는 건가? 터놓고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네만…….”

 

“…….”

 

안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핫산을 납득시킬 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에 답답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핫산이 안톤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팔로 턱을 짚은 채 잠시 고민하던 핫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게 정말이라고 한다면, 펠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그런 짓을 해 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말이야. 나나 자네에게 해를 가할 속셈이었다면 괜스레 이처럼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걸세.”

 

“그건 그렇습니다만…….”

 

방금 핫산이 말한 부분은 안톤도 의아하던 점이었다.

 

“그나저나 그래서 내가 잠이 든 동안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겐가?”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와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대화라……. 그래서 어떤 대화를 나눴나?”

 

“나누지 않았습니다. 우선 왕자님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요.”

 

“그렇군.”

 

입술을 꽉 깨문 핫산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머릿속이 생각할 것들로 가득 차서 바쁜 모양이었다.

 

“일단 자네의 염려는 잘 알겠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또 알아보겠으니 기다려 주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상당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으나, 안톤은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펠샤인 데 에르단.

 

안톤의 생에 이렇게까지 꺼림칙하면서도 위험한 느낌을 주는 여인은 없었다.

 

이제 증오하는 마음조차 희석된 코르보 백작 부인도 이런 느낌까진 주지 않았다.

 

‘일단 그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어.’

 

안톤은 이때다 싶어 펠샤인 공주에 대한 정보들을 핫산에게 물어보았다.

 

그 또한 안톤의 걱정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 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내가 펠을 믿는 것은 내가 그녀를 내 멋대로 다룰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네. 그저 그 아이가 반드시 내 힘이 되어 줄 거란 믿음이 있을 뿐이네.”

 

안톤이 집요하게 그 믿음의 근간을 물어 오자, 그는 그 또한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후우. 자네와 대화를 나누면 신기하게도 항상 얘기가 길어지는군. 아무튼 짧게 말하자면, 펠과 내 형님은 원수지간이네. 뭐, 형님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안톤이 더 상세히 설명해 달라는 눈빛을 쏘아 내자, 그는 천천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겐 펠 말고도 동생이 하나 더 있었네.”

 

핫산은 그의 남동생이자, 펠샤인 공주의 쌍둥이 형제이기도 했던 ‘비운의 3왕자’ 알베르트 스온 에르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왕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귀엽고 순수했던 아이였네. 누구도 그 아이에게 그러한 참극이 벌어질 거라곤 예상치 못했지. 그 아이가 열 살이 되던 생일날이었네. 기쁘고 즐거워야 할 그날, 그 아이는 자신의 방에서 무참히 살해된 모습으로 시녀에게 발견되었네. 궁중 숙수가 범인으로 지목됐고 처형되었지만, 진정한 범인은 그가 아니었네. 안톤, 자네는 그 진정한 범인이 누구일 것 같나?”

 

“말하는 것을 보니 페올 카르티온 에르단. 1왕자의 짓이었겠군요.”

 

“맞네. 난 그 참극을 벌인 자가 그라고 확신하고 있네. 나 같은 머저리와는 달리, 알베르트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진짜배기 천재였으니까. 형님은 나와 펠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항상 알베르트를 거슬리는 경쟁자로 여겼네.”

 

“…….”

 

“하지만 그런 줄로만 알았지. 경쟁,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물론 그때는 내가 어렸기에 그런 어설픈 생각을 했던 걸 테지만……. 솔직히 형님은 나나 펠에게 언제나 좋은 형님으로서의 모습만 보여 왔기에 그런 악독한 수를 쓸 거라곤 예상도 못 했네.”

 

안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막을 수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핫산은 회한 어린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아무튼 그 이후로 펠은 변했네. 말수가 없어지고,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감정에 기복조차 생기지도 않는 듯했지. 그러던 어느 날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다시 밝아져 갔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내 앞에서 복수를 얘기하는 그녀를 보며 그게 내 착각이었단 걸 깨달았네. 그녀의 상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던 걸세.”

 

펠이 자신의 진심을 내비쳤던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고 말한 핫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적어도 펠은 내가 페올 형님을 적대하는 한 내 힘이 되어 줄 거네. 어떤 조건을 감수하더라도 말일세!”

 

과연 정말로 그럴까?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겉으론 연약한 여인이 속에 복수심을 새겨 넣었을 때, 얼마만큼 지독해질 수 있는지 잘 나타내는 속담이다.

 

허나 적어도 안톤의 눈으로 보았을 때, 펠샤인 공주는 그럴 여인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그저…… 텅 비어 있던 것 같았지.’

 

마치 속이 빈 인형처럼 말이다.

 

 

* * *

 

어느새 그들 일행이 쟝-그리던에 도착한 지도 두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선 레버르트 남작을 만나 무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필담으로 오간 대화 끝에,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둘은 거리낄 것 없이 자신의 무술을 교류했다.

 

원래 무술의 정수를 교환한다는 것은 틀에 박힌 무인이라면 생각만으로도 경을 칠 일이다.

 

허나 레버르트 남작은 선천적으로 여러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성정의 사람이었고, 안톤 또한 그랬다.

 

안톤의 경우는 그처럼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무술이 자기 것이라는 느낌이 없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전생에서도 마나 연공법을 익히긴 하였지만 그것은 남의 물건이었다.

 

각인마법에 의해 강제적으로 비밀을 지킬 수밖에 없던 것이 아니었다면 적절한 대가만 준다면 그 누구에게라도 딱히 아까운 맘 없이 넘겨줄 수 있었다.

 

온-누르에게 배운 검술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안톤에게도 처음으로 사문이란 것이 생겼고, 그 인연에 대한 애착은 있다.

 

하지만 이 정신검은 온-누르의 암혼공과는 다르게 그 근원이 다르지 않은가?

 

온-누르도 그 검리에 대해 어느 은둔 고수에게 들은 것이고, 그가 해낸 것은 그에 맞는 수련법을 개발한 것뿐이다.

 

그리고 사실 이런 속내도 있었다.

 

‘어차피 알려 주어도 이자에겐 무용지물이야.’

 

사실 그것은 레버르트 남작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거다.

 

그의 무공은 여러 세대를 거쳐 혼혈이 된 레버르트 남작만이 쓸 수 있는 무술이었으니까. 다만 그 기술들의 운용 원리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안톤에겐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건 레버르트 남작도 교류가 끝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내지은 걸로 보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튼 전음입밀이라는 수법은 아주 유용했지.’

 

흔쾌히 무술을 교류하는 모습이 맘에 들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답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잃어버린 목소리를 대신하라며 한 가지 기술을 더 알려 주었다.

 

이는 위스핑 마법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기술이지만, 마력을 사용하지 않기에 안톤 또한 쉬이 익힐 수 있었다.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아마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한참 뒤일 것이라 생각했는지 바로 사용하는 안톤을 보며 레버르트 남작은 크게 놀랐다.

 

아마 그 운용 원리가 정신검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인 것 같다고 설명하니 납득하는 눈치였다.

 

아무튼 두 달이란 시간 동안 안톤이 한 것은 무공 수련만이 아니었다.

 

밤에 수련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매일같이 핫산과 함께 여러 권세 귀족들의 연회에 참가해야 했다.

 

사실 연회에 참가해서는 별거 없었다.

 

그저 핫산이 분주히 수다 떠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가 뭔가 사건을 일으키면 안톤은 그제야 일어나서 사건을 정리하는 식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연회에 참가할 때마다 여러 화제들을 만들어 댄 탓에 그들은 해린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의외로 그 과정에서 1왕자 페올의 방해 공작은 없었다.

 

그는 그저 잠잠히 기다리며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덕에 핫산은 별문제 없이 여러 귀족들과 친분을 나누며 서서히 영향력이란 것을 쌓아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잘 풀려 가는 듯도 보였지만, 사실 핫산의 속은 시꺼멓게 타고 있었다.

 

시간에 쫓기는 쪽은 페올이 아닌 핫산이고, 결국 오늘 밤 그 시간이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매일 새벽같이 밖에 나가 밤에나 돌아오던 클린턴이 간만에 모두를 불러내 말했다.

 

“벌써 두 달이나 지났지만, 블라디미르에 대한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핫산 왕자님의 말을 신뢰하지만, 이제는 작은 성과라도 내야 할 때입니다.”

 

황제가 핫산에게 제시한 요구는 두 가지였다.

 

펠샤인을 첩으로 바치는 것과 블라디미르란 집단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할 것.

 

그리고 그 두 가지는 별개의 일이었다.

 

혼사에 대한 이야기와 약속된 지원은 모두 다 핫산이 허황된 이야기로 황제를 속이려 하지 않았단 걸 증명한 이후에나 행해질 절차였으니 말이다.

 

“검은 늑대단은? 그들은 자네가 보아도 수상한 자들 아닌가?”

 

“그자들이 해린 내부가 아닌, 외부의 인력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겨우 그것일 뿐 아무것도 확인된 것이 없지 않습니까? 황제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거대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클린턴은 황제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대신하여 보낸 눈과 귀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핫산이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나?”

 

“…….”

 

“부탁하겠네. 그 정도는 내가 알아도 상관없지 않은가?”

 

“황제께선 세 달이 지나도 별 소득이 없으면 그냥 돌아오라 명하셨습니다.”

 

“세 달이라면 이제 겨우 30일 남짓이 남았다는 뜻이군……. 알려 줘서 고맙네.”

 

클린턴은 더 알려 주지 못하는 점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안톤은 그를 보며 다시금 감탄했다.

 

비록 그가 제국의 기사란 신분으로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긴 하지만,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뭔가 수를 쓸 만한 시간은 남아 있어서 다행이군.”

 

“생각해 두신 것이 있는 겁니까?”

 

“원래는 황제의 본격적인 조력을 받아 낸 이후에나 실행할 생각이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겠지. 나도 형님이 이렇게까지 몸을 사릴 줄은 몰랐네. 아마 내 옆에 자네가 있기에 조심했던 거겠지만…….”

 

“그래서 어쩌실 생각입니까?”

 

핫산은 굳은 결심을 다지며 말했다.

 

“내일 아침, 대법관을 찾아가겠네.”

 

대법관이라면 해린 왕궁에서 가장 중립적인 기관으로, 주로 해린 왕실의 계승 문제를 주관했다.

 

“그리고 법관장에게 나 핫산 헤이젤 에르단이 적왕선에 참가함을 알리겠네.”

 

본격적으로 왕위 쟁탈전에 끼겠다는 엄중한 선언에 다들 말을 아끼던 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냐?”

 

“저예요, 왕자님!”

 

핫산의 대전의 관리를 도맡아하는 시녀장의 목소리였다.

 

“내가 따로 지시하기 전에는 밖에서 대기만 하라던 말을 잊은 게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됐다. 내가 직접 말씀드리겠다.”

 

낯선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벌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핫산은 그의 복장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왕궁의 경비를 맡는 궁무사들이 이렇게 말도 없이 들이닥치다니, 이게 무슨 무례요!”

 

등장한 이방인이 송구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핫산의 얼굴에 어린 노기도 조금 가라앉았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다만 사태가 너무 중하여 서둘러 이를 알리기 위해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무릎을 꿇은 남자는 비장한 얼굴을 한 채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국왕 전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그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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