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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4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5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43화

043. 연회

 

 

수 초 간 넋을 잃고 있던 안톤이 빠르게 제정신을 차렸다.

 

지난 몇 초간 어떤 생각을 하고 느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에게 홀려 있었다.

 

동시에 화가 났다.

 

항상 육체의 주도권을 지니고 있어야 할 무인이 몸이 얼어붙다니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만약 그녀가 나쁜 의도를 갖고 방문을 한 것이었다면, 그녀가 웃으며 칼을 심장에 찔러 넣을 때까지 자신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목숨을 내어 줬을 것이었다.

 

“…….”

 

안톤이 무의식중에 펠샤인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졌다.

 

본능이 그녀에 대해 위험인물이라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만약 핫산의 여동생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검을 휘둘렀을지도 몰랐다.

 

그런 기운을 감지라도 한 것일까.

 

핫산이 서둘러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펠. 장난은 그만하거라. 너는 그런 마법이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우니.”

 

“호호! 알겠어요, 오라버니.”

 

두 남매의 대화를 통해 앞선 추측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안톤은 핫산에게 시선을 보내며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그는 난처한 기색이었다.

 

“이제 자네도 알았겠지만 펠은 마법사라네. 그렇다고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말게나. 방금 펠이 사용한 건 사악한 마법이 아니었으니. 펠이 쓴 마법은 단순히 향기를 내뿜는 효능밖에 없다네.”

 

“…….”

 

그러고 보니 펠샤인이 웃을 때 장내에 봄 향기가 그윽하게 풍겼던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고작 향기에 취해 그렇게 정신을 잃었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있던 핫산은 자신처럼 넋을 잃거나 하지 않았으니까.

 

펠샤인이 사용한 것은 단순히 향기를 뿜는 마법이었지만, 그 본연의 외모와 합쳐져 사람의 혼을 진창 흔들어 놓은 것이다.

 

‘위험한 여자야…….’

 

분명 펠샤인은 전생과 현생을 합쳐서도 안톤이 만난 여인 중 가장 아름다웠다.

 

애초에 감정이 무디고 굳건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안톤을 겨우 외모만으로 이렇게까지 흔들어 놓았으니까.

 

“죄송해요. 혹시 많이 화가 나셨나요?”

 

풀 죽은 듯 말하는 펠샤인을 보니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어서 그녀에게 다가가 가는 연갈색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과 대비되게 안톤은 또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정신 차려라. 이 여자는 독이다.’

 

안톤의 검술은 의지, 즉 사람의 굳건한 정신력을 중심으로 한 무학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검 또한 약해진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검사로 살기로 결심했고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는 이상 펠샤인은 최대한 피해야 할 인물이었다.

 

“…….”

 

안톤은 사슴 같은 눈망울로 올려다보며 다가오는 펠샤인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 진하게 담긴 손짓이었다.

 

“후……. 아무래도 네가 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 같구나.”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화를 내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내가 아무에게나 그런 장난은 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너는 충분히 향기 없이도 아름다운 꽃이다. 칼, 혹시 이 자리가 불편하다면 방에 들어가 있어도 좋네. 나는 오랜만에 만난 동생과 해후를 나누려는 참이니까.”

 

“…….”

 

“걱정일랑 그만두게나. 믿음직스럽진 않게 들릴 거란 걸 알지만, 내 동생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일세.”

 

“…….”

 

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핫산의 신변을 지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으나,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다간 모든 걸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많이…… 쌓인 건가……?”

 

방으로 들어온 안톤은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도 사람일지언데 성욕이 없을 순 없다.

 

게다가 그는 지금 혈기왕성한 십 대 후반의 청년이 아닌가.

 

‘이거 이러다가 창관이라도 들러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군.’

 

만약 욕구를 해소해야만 펠샤인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거라면, 그럴 용의가 그에겐 있었다.

 

물론 정말로 그럴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안톤이 창관을 유독 더럽다 여기거나, 남다른 정조 관념을 지녔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신분을 감추어야 하는 입장에서 상체를 빼곡히 채운 문신과 북대륙 인이 확실한 얼굴을 남들에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창관에 가서까지 그것들을 숨기면서 욕구를 해소하는 일이야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안톤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얼굴을 가린다는 거. 처음엔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제약이 많군.’

 

안톤은 방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바깥을 향해 온 신경을 쏟았다.

 

만약 펠샤인과 핫산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실에서 갑작스럽게 어떤 일이 닥친다면 곧장 반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그런 염려가 무색하게 그곳에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야 펠샤인과의 대화는 무난하게 끝이 났고, 그녀를 배웅하는 것까지 끝낸 핫산이 안톤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많이 화가 났는가?”

 

조심스레 물어 오는 핫산을 보며 안톤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안톤이 화가 난 것은 평정심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지, 펠샤인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펠이 다소 철이 없긴 해도 나쁜 아이는 아니니 화를 가라앉혀 주게. 나와 함께하려면 어쩔 수 없이 펠과도 마주칠 일이 많을 걸세.”

 

“꼭 마주쳐야 합니까?”

 

“그러네. 그녀는 내게 몇 없는 조력자 중에서도 가장 큰 조력자이기도 하니까. 사실 그 펜던트도 마법사인 내 동생이 아니었으면 그저 버려졌을 물건이네.”

 

“그렇게 마법 실력이 뛰어난 겁니까?”

 

“그건 그렇지 않네. 마법은 그저 취미로 배운 정도지. 하지만 내가 펠에게서 기대하는 역할은 마법사로서의 조력이 아니네. 어때, 자네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알겠나?”

 

“외모 말씀이시군요.”

 

“그러네. 내 동생이지만, 그 외모는 대마법사만큼의 가치를 지녔다고 자부하네. 외모 역시 능력이니까. 그 능력이 황제를 움직이게 할 힘을 지녔으니, 그 외모를 검으로 비유하자면 펠은 대륙제일의 검사라고도 할 수 있겠지.”

 

안톤이 예전에 가졌던 의문 중 한 가지가 지금 풀렸다.

 

‘황제를 움직이게 한다라……. 무언가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자신의 여동생이었다니…….’

 

안톤은 그간 핫산이란 남자를 얕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철저하게 이해타산적이며 냉철한 남자였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게 그녀와 친하게 지내란 말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자신의 검리에 대한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런다 한들 펠샤인과는 계속해서 부딪쳐야 할 것 같았으니, 그것을 피력한들 딱히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알겠네. 그리고 자네가 그러지 않길 원하는 듯하니, 펠에게도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겠네.”

 

안톤은 최대한 펠샤인 왕녀와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재회의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빨리 찾아왔다.

 

 

* * *

 

세트란 드오 츠윈카 공작은 때아니게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겨우 하루 사이 연회의 규모를 몇 배나 키워야 했던 탓이다.

 

아끼는 하나뿐인 독녀의 생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성대한 연회를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많은 귀족들이 참석할 것이었지만, 원래 자신의 친우이자 삼대호장 중 하나인 레버르트 남작과 친분이 있는 귀족들만 따로 불러 내실에서 조용히 생일을 축하할 생각이었다.

 

일이 이렇게 커진 것은 2왕자 핫산이 참석 의지를 밝힌 이후였다.

 

그땐 잘되었다 싶었다.

 

그의 호위 무사인 안톤은 화제의 중심이었고, 그도 언젠가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해린의 최고 무인 중 하나인 레버르트 남작이 그와 만나면 꽤나 즐거운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해린제일미라 불리는 펠샤인 왕녀, 그리고 1왕자 페올과 레몽드 백작이 연달아 연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전해 오며 상황이 변질됐다.

 

해린의 직계 혈족들 셋과, 자신의 친우까지 포함해 삼대호장이 둘이나 참석하는 자리가 된 것이다.

 

그 탓에 정치적 소식에 민감한 중소 귀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우스갯소리로 수도는 물론이고 하루 거리의 인접한 도시에 있는 귀족이란 귀족들은 그날 모두 모일 거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모처럼의 생일 연회가 정치의 장이 되어 버려서 애꿎은 츠윈카 공작 영애만 불쌍하게 되었으나, 연회에 참가하는 여러 사람들은 그저 역대급 인사 규모의 연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설레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태의 모든 고민과 걱정은 츠윈카 공작의 몫이었다.

 

연회의 규모를 키우는 데 상응하는 재력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으나 인력과 시간이 부족했고, 설혹 준비가 미흡했다간 많은 귀족들 앞에서 망신살이 뻗칠 참이었으니 걱정을 안 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아…….”

 

텅 빈 집무실에서 츠윈카 공작의 한숨이 넓게 퍼져 나갔다.

 

 

* * *

 

해린의 귀족들의 저택엔 제각기 연회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교장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교장의 크기와 장식들은 그 귀족의 영향력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츠윈카 공작은 해린국에서도 명망 높은 실력자였고, 당연히 그에 따라 사교장은 규모가 대단했고 평범한 귀족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공을 들여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금.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방문자들을 모두 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작은 어쩔 수 없이 아끼던 야외 정원을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의 역량이 부족함을 증명하는 일이었으나, 그 어떤 귀족도 츠윈카 공작을 손가락질하며 폄하하지 않았다.

 

외려 단 하루라는 시일에 이만큼의 준비를 해낸 그를 칭송했다.

 

손님들을 맞으며 그런 말들을 하나씩 듣고 있자니 아리송한 기분이 드는 츠윈카 공작이었다.

 

“하……. 이게 잘된 건가 모르겠군.”

 

“하하! 너무 걱정 말게. 어떻게든 되겠지. 그나저나 자네의 저택에 이렇게 사람이 꽉 찬 모습은 처음 보는군.”

 

“놀리지 말게. 근데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주인공들은 아직까지도 코빼기도 비치질 않는군.”

 

“원래 주인공은 늦게 도착하는 법이 아닌가?”

 

“뭐? 이 연회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내 딸이야!”

 

계속된 칭찬에 기분이 좋았다가도 오랜 친우인 레버르트 남작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부아가 확 치밀어 오른 츠윈카 공작이었다.

 

“하하. 그건 그렇지……. 그런데 네리스는 어디 있는가? 아까부터 찾아봤는데 도통 보이지가 않는군.”

 

“주인공이니까! 맨 마지막에 등장하라고 미리 일러두었네.”

 

“그건 썩 좋은 생각 같지 않네만…….”

 

온갖 거물들이 나타난 이후에 연회에 등장할 자신의 질녀가 진심으로 안쓰럽게 느껴지는 레버르트 남작이었다.

 

“아! 이번 연회의 주인공, 아니…… 그들이 드디어 왔구려.”

 

장내의 모든 인물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해린의 왕족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저택에 도착한 것은 핫산이었다.

 

간만에 격식에 맞게 한껏 치장한 그는 양옆에 클린턴과 안톤을 끼고 자리에 등장했다.

 

클린턴은 지니고 있던 자국의 기사 제복을 입고 있었고, 안톤은 늘 그렇듯 전신 갑주를 입고 있었다. 궁전이라면 모를까 이런 연회장에선 여러모로 눈에 띄는 차림새였다.

 

가죽 장갑을 벗어 반지로 신분을 확인받는 안톤을 향해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저 반지가 그 맹약의 반지로군!”

 

“오오, 저게 그 레몽드 백작과 동수를 이루었다는 철가면 칼인가?”

 

“저자의 얼굴이 그렇게 끔찍하다며? 한 번 보고 싶은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군.”

 

약식적인 신분 확인이 끝나자 대문의 연회꾼이 쩌렁쩌렁한 목청을 자랑하며 외쳤다.

 

“핫산 헤이젤 에르단 왕자 전하님이 입장하십니다!”

 

핫산은 흠잡을 데 없는 자세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중간중간에 여러 귀족들이 인사를 올릴 때마다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머금고 화답해 주는 그의 모습은 왕자라는 고고한 신분에 비해 소소하고 유쾌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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