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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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5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41화
041. 용병
“…….”
안톤은 여전히 벙어리 신세를 연기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언제나 그랬듯이 핫산이 그를 대신하여 그의 소개를 해 주었다.
용병이라는 출신과, 그가 어릴 적 화재로 끔찍한 외모를 얻게 되고 목소리를 잃었다는 것.
간략한 설명을 마친 핫산은 자랑스레 좀 전에 레몽드 백작과 있었던 일화까지 말했다.
“칼이라……. 그래, 나도 그대의 얼굴을 보려면 돈을 내야 하는가?”
페올은 직접 얼굴을 확인한 레몽드 백작에게서 핫산의 말이 사실이란 걸 전해 들었지만,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분명 핫산이 무언가 꿍꿍이를 숨겨 두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형님. 일국의 왕태자인 형님과 많은 귀족들 앞에서 그런 무례를 범할 순 없지 않습니까? 제가 일전에 일러두었습니다. 자, 어서 벗으시오.”
“…….”
안톤은 내키지 않는 듯한 모습을 연기하며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녹아내린 듯한 피부와 얼굴 절반을 넘게 자리한 오돌토돌 올라온 화상 자국.
“하!”
군인들은 그나마 반응이 나았으나, 귀족들 같은 경우 마치 오물이라도 본 듯 기겁한 표정을 내지었다.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다.
안톤도 처음 거울을 봤을 때 저도 몰래 인상을 찌푸렸었다.
자신의 모습은 인간보다는 마치 이족들 같은, 괴물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니까.
다만 페올은 무심한 표정으로 안톤의 얼굴을 세심히 살폈다.
안톤은 그의 생경한 반응을 보며 잠시 긴장했다.
‘뭔가 느낀 건가?’
안톤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페올의 입이 열렸다.
“투구를 다시 써도 좋네.”
안톤이 재빨리 투구를 써서 얼굴을 감췄고, 이때다 싶어서 핫산이 재빨리 말을 꺼냈다.
“다들 두 눈으로 보았겠지만 칼의 얼굴은…… 음, 면전에서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생리적인 혐오감이 드는 얼굴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서 한 가지 제안을 하건대, 이 반지를 그에게 주어 얼굴 대신 신분 확인을 할 수 있게끔 하고자 합니다.”
핫산은 반지를 꺼내 군중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보여 주었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이 반지는 저주가 걸린 물품으로 한 번 착용하면 벗을 수가 없습니다. 위조도 불가능하며,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물건이지요. 앞으로 저와 함께 다니려면 왕성을 드나드는 일이 많을 텐데, 이게 있다면 매번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귀족들 중 누군가 반지의 유래에 대해 아는 듯 소리쳤다.
“맹약의 반지다! 과연 저게 핫산 왕자님께 전해진 건가!”
“음. 저게 있다면 저 얼굴을 다시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오른손을 들어 귀족들의 웅성거림을 진정시킨 페올이 핫산을 향해 말했다.
“근데 내가 듣기로 그는 천한 용병인데, 꼭 그런 물건을 써서까지 그를 써야 하느냐? 너도 알다시피 해린에는 인재들이 많다. 여차하면 내 무사들을 빌려줄 수도 있다.”
물론 그 기사들은 호위뿐만 아니라 감시자의 역할도 함께할 터이고, 명령만 내려지면 가차 없이 핫산의 목을 벨 테지만 말이다.
핫산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딴죽을 걸지 않았다.
“칼의 실력은 지금껏 보아 온 어떤 무사들보다 뛰어납니다. 여기 제국의 기사인 클린턴 경도 그의 실력을 인정한 바 있으니, 실력 면에서는 흠잡을 구석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의의 문제다. 아무래도 용병 출신의 사내보단 자국의 무사들이 믿음직스럽지 않으냐?”
“그렇지만, 전 칼에게 생명의 빚이 있습니다. 그를 옆에 두어 그 빚을 갚을 셈입니다. 제게 보은의 기회를 앗아 가지 말아 주시지요, 형님.”
“……알겠다. 다만, 조건이 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칼이란 용병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너의 안위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너도 내 걱정을 이해해 주거라.”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기일을 잡아 주시지요.”
그렇게 문제가 일단락되나 싶었으나, 페올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굳이 기일을 따로 잡을 필요가 있겠느냐? 당장 대련할 수 있는 무사들은 이 자리에도 많다.”
“하지만 방금 여정을 마친 직후입니다. 여로를 풀 시간을 주시지요.”
“승패를 겨누자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대련일 뿐이다. 그리고 만약 오늘이나 내일 암살자가 온다면 어쩔 셈이냐? 우리 왕가를 노리는 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너의 안전이 최우선이니라.”
본심이야 어떻든 간에, 대외적인 논리를 무기 삼은 페올에게 핫산은 변변찮은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소리장도(笑裏藏刀)라고 하던가?
안톤은 페올을 보며 그 사자성어의 진의를 깊게 깨달았다. 페올의 웃음 속에, 말 한 마디 한 마디 속에는 칼이 감추어져 있었다.
페올은 강력한 무술이나 무공을 지니지 못했지만, 그 왕자란 신분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럼 그렇게 된 걸로 하고……. 누가 좋을까?”
“제가 하겠습니다.”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치기 무섭게, 한 사내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왔다.
1왕자의 충신, 레몽드 백작이었다.
“왕국의 삼대호장인 레몽드 백작이 나서다니!”
“오오, 간만에 그의 검술을 볼 수 있는 건가?”
귀족 군중들은 뜻밖의 구경에 잔뜩 흥이 오른 듯싶었다.
“레몽드 백작. 상대는 고작 용병인데, 자네 정말로 괜찮은 건가? 자네가 아니더라도 그를 시험할 만한 젊고 실력 있는 무사들은 많네.”
“괜찮습니다. 일국의 왕자를 호위할 실력을 지녔는지에 대해서, 저보다 확실히 검증할 적임자는 없습니다.”
“그럼 그러도록 하게나.”
귀족들이 뒤로 물러나고, 무사들이 둘러싸 원을 만드는 것으로 순식간에 대련장이 마련됐다.
레몽드 백작이 안톤에게 인사말을 던졌다.
“여기서 또 보는군.”
마주 대답해 줄 수 없는 안톤은 작게 끄덕였다.
굉장히 버릇없고 예의 없는 행동이었으나, 안톤의 사정을 모두가 알기에 누구도 그에 대해선 시비를 걸지 않았다.
안톤은 적정 거리에 떨어져 있는 레몽드를 쓱 훑어보았다.
그는 전신 갑주가 아니라, 상복부만 보호하는 브레스트 아머를 입고 있었다.
‘묘하게 익숙하군.’
물론 상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얘기였다.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
조르디가에 입성했을 때, 안톤은 린디아스의 무호 문제 때문에 한차례 비무를 벌였던 적이 있다.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잠시 뇌리에 떠오른 린디아스에 대한 걱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자신을 도운 일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란 생각에 죄책감이 일었다.
안톤은 마음속에서 잡념을 털어 냈다.
‘우선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 그게 그들의 희생에 책임지는 일이다.’
이곳 해린 왕국에서 실력을 쌓아 진정한 적인 블라디미르의 영향력을 지우고, 핫산을 왕으로 추대해 원군을 얻는다.
이것이 여기서 안톤이 해내야 할 과제였다.
‘첫 임무는 레몽드 백작과 비등하게 다퉈 실력을 인정받는 것인가.’
안톤은 대련이 시작하기 전 핫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절대 이겨선 안 된다고 그랬지.’
문득 실소가 나왔다.
‘대륙제일검가의 공녀들과 일국의 삼대호장이라니. 나도 참 많이 컸군.’
삼대호장이 어떤 지위인지는 알지 못하나, 사람들의 반응을 보건대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무인을 칭하는 듯 보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안톤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군. 물론 이겨선 안 되겠지만…….’
대련이 시작됐다.
‘이거, 내 예상이 틀렸군.’
검을 나누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안톤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선입견을 갖고 있던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레몽드 백작의 검술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굳세고 고집스러운 첫인상과 선천적인 거구로 인해 가졌던 선입견과 달리, 그는 강(强)보다는 쾌와 변을 중심으로 한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비록 그의 무기가 연검은 아니었으나, 그와 검을 맞대고 있자니 에스닌 공녀가 떠오를 정도다.
과거 안톤은 에스닌의 현란한 변초를 대응하기 위해 소맷자락을 먼저 공략했었다.
‘하지만 그녀보다 훨씬 더 깊이가 있군.’
레몽드 백작은 손목을 가리지 않았다.
허나 그럼에도 그의 검로를 읽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본인의 경험과 실력도 그것이지만, 검술 본연의 위력 또한 만만치 않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온-누르가 지나가듯 해린의 검술에 대해 언급했던 일이 생각이 났다.
‘검술만 봤을 땐 조르디가의 여러 검술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그랬지.’
그리고 해린의 검술은 굉장히 특이하다고도 말했다.
온-누르는 해린의 검술에서 도대체 무엇을 특이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검술에 비해 기공의 수준이 너무 낮아.’
레몽드 백작은 검기라든가, 신체 활성 같은 기공술은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못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톤은 레몽드를 쉬이 여길 수 없었다. 부족한 힘을 보완해 주는 기공술 없이도 본연의 신력으로 그것을 메웠기 때문이다.
특이점이 그것뿐만이라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잠시 후 안톤은 온-누르가 어떤 부분이 특이하다고 강조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자네가 뛰어난 검술의 소유자라는 건 알겠네. 하지만 설마 기공을 익히지 않은 겐가?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자네는 이 시험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네.”
레몽드의 장검에 서린 빛이 얇게 어렸다.
‘검기?’
형태도, 효과도 분명 검기와 비슷했으나 근본적인 원리 부분에서 그 둘은 서로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검기보다는 오히려 안톤이 익힌 의검과 비슷하달까.
“우린 이걸 검혼이라고 부르네. 수십, 수백만 번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른 검사만이 지닐 수 있는 검의 정수이지. 우린 기공을 익힐 수 없는 대신, 이걸 손에 넣었네. 검혼을 손에 넣은 무사는 제국의 기사들을 상대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네.”
레몽드 백작의 검이 직선으로 안톤을 향해 쏘아졌다.
지금까지의 신속하고 화려하던 검초들에 비하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검로였으나, 그 검세에 실린 기운은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날카로웠다.
이제 안톤도 숨겨 둔 패를 꺼낼 차례였다.
이대로면 검이 두 쪽으로 동강 나 허무한 패배를 맞이할 참이었다.
‘나는, 내 검은 부러지지 않는다.’
그런 강건한 의지가 안톤의 검에 실렸다.
안톤과 레몽드 백작의 검이 십(十)자 모양으로 교차했다.
만약 안톤이 베어 내겠다는 의지를 검에 담았다면 레몽드의 검은 부러졌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둘의 검은 모두 멀쩡했다.
그 이후 몇 번 더 검격을 나누고 서로 실질적인 타격 없이 완벽한 동수를 이루자 레몽드 백작이 검을 거두었다.
“대단한 검력이군. 나는 자네의 검을 부러트릴 수도, 그렇다고 자네의 검을 피해서 자네를 찌를 자신도 없네. 아직 내겐 몇 가지 비기들이 남았으나, 전장이라면 모를까 그 기술들은 이 자리에 알맞지 않겠지. 자네를 핫산 왕자님의 호위 무사로 인정하겠네.”
“…….”
안톤은 짧게 목례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네와 검에 대해 논하고 싶군. 묻고 싶은 게 참 많아.”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벙어리 신세라 말을 못한다는 문제는 제쳐 둔다 하여도 레몽드 백작은 1왕자의 심복이었고, 안톤은 핫산 왕자의 호위였다.
명명백백하게 서로는 섞일 수 없는 적이며, 작은 정보라 할지라도 적에게 노출해선 안 되는 사이였다.
“와아!”
“대단하군!”
“신성의 출현인가? 핫산 왕자님이 부러워지는군.”
해린은 동방 대륙과의 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아 올린 상인 국가다.
당연히 귀족들은 대개 넘치는 금은보화를 지니고 있었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평민들에게는 분에 넘치는 호화스러운 생활이지만, 삶에서 단조로움을 느끼는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자극에 목말라 있었다.
그리고 안톤은 그들에게 딱 들어맞는 새로운 자극이었다.
아마 오늘 이래 이번 사건은 해린 사교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될 터였다.
“잘해 주었네.”
어느새 다가온 핫산이 안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진심으로 안톤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해린의 수도 쟝-그리던에 도착한 첫날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