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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39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77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39화

039. 해린

 

 

안톤은 무심결에 창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마차가 달리는 와중이어서 주변은 여러 소음들이 가득했으나 클린턴이 분명 이 대화를 들었을 거라는 생각에서 무의식중에 비롯된 행동이었다.

 

이를 알아챈 핫산이 씨익 웃었다.

 

“걱정할 것 없네. 클린턴 경은 이미 황제에게서 언질을 다 받았을 테니.”

 

“그렇습니까?”

 

“그는 내 호위를 맡고 있지만, 동시에 내 감시자이기도 하네.”

 

“감시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황제의 입장에선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근거가 없으니까. 그들 입장에선 내가 왕위를 목적으로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 제국의 힘을 빌리려는 욕심 많은 2왕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을 거네.”

 

안톤을 향한 말은 아니었으나, 안톤은 핫산의 말 속에서 자신의 말을 모두 다 믿느냐는 자조 섞인 의미를 감지했다.

 

“같이 조국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배후 세력이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면, 클린턴 경이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릴 테고, 그러면 본격적으로 제국의 지원을 받게 될 거네. 아무리 그런 거대한 세력인들, 제국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네. 그러니 그때까지 필사적으로 버텨야 하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제국은 대륙 최고의 강대국이며, 온갖 상업과 정치의 집결지이다.

 

그런 나라의 수장인 황제가 결코 연민이나 동정, 혹은 정의감에 휩쓸려 핫산을 도울 리가 없다.

 

분명 핫산은 황제와의 대면에서 무언가 대가를 약속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톤은 굳이 이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지…….”

 

말꼬리를 흐리는 그의 눈동자에선 간절한 집념이 풍겼다.

 

핫산 왕자는 평소의 밝은 목소리로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자네에게 줄 것이 있네.”

 

“뭡니까?”

 

핫산은 마차 내부의 짐칸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목제 재질로 만들어진 투박한 상자였다. 열린 상자 내부에는 반질반질한 재질의 은색 갑주가 잘 정리되어 보관되고 있었다.

 

북대륙식으로 제작된 기사 갑주였다.

 

남대륙에서는 덥고 습한 기후 탓에 이런 종류의 무구를 잘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걸 껴 주게. 자네가 북부인이란 걸 알게 되면 해린 내부에서도 정치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가 있네. 게다가 조르디가, 아니 블라디미르의 눈에서도 벗어나야 하니 얼굴을 가리는 건 필수적인 일일 걸세.”

 

핫산은 갑주의 여러 부위 중 하나를 꺼내 안톤에게 주었다.

 

시야 확보와 호흡을 위한 작은 실틈만이 존재하는 헬름이었다.

 

“이걸 걸친다면 오히려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괜찮네. 형님이 데려온 블라디미르 측 사람 덕에 해린에선 이런 북부식의 갑주가 유행하고 있으니.”

 

안톤은 헬름을 받아 직접 착용해 보았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철제 갑옷의 차가운 감촉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안톤은 내친김에 나머지 무구들도 앉아서 천천히 입어 보았다.

 

“능숙하군. 혼자서 갑옷을 입는 게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안톤은 능청스럽게 핫산의 물음에 거짓으로 답했다.

 

“기사를 주인으로 모신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노예로 살아온 전적을 아는 핫산은 그러려니 하며 수긍했다.

 

핫산이 준비한 갑주의 형식이 전생에 안톤이 입었던 규격과는 조금 달라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안톤은 완벽하게 전신 갑주를 장착했다.

 

“딱 들어맞는군요.”

 

“갖고 있는 게 맞아서 다행이군. 아니었으면 해린에 입국하고서부터 맞는 갑주를 구할 때까지 팔찌 속에 있어야 했을 테니까. 하하. 게다가 제대로 된 전신 갑주는 값이 비싸기도 하고 말이야.”

 

핫산은 해린에 도착하고부터는 얼굴을 가려 주는 헬름만큼은 절대 벗어선 안 된다고 누누이 당부했다.

 

그리고 이를 의아하게 여길 사람들을 위해 적당한 사연도 미리 만들어 두자고 했다.

 

“얼굴에는 어렸을 적 화상으로 흉터가 있다고 하면 되겠군. 그리고 이참에 이름도 멋들어진 것으로 하나 새로 만드세. 아! 혹시 억양으로 다른 지역 출신인 걸 알 수도 있으니 화상 때문에 말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건 어떤가?”

 

핫산은 즐거운 듯 활기를 띠며 여러 계획을 줄기차게 읊어 댔다.

 

하지만 그게 너무 지속된 게 문제였다.

 

맞장구치며 귀를 기울이던 안톤은 이제는 그가 하는 말이면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말이야 하지 않으면 되지. 친구를 사귀러 가는 것도 아니니.’

 

안톤은 계속되는 핫산의 수다를 한 귀로 흘려 대며 다른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나저나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입어 보는 갑옷이지?’

 

묘한 감흥이 일었다.

 

스무 살, 안톤은 백작 부인을 상대로 행해진 암살 시도를 멋지게 막아 낸 후 소영주의 호위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신분은 그의 나이 마흔, 전쟁의 종막부에 버림패로 클린턴 제오르의 손에 죽기 전까지 이어졌다.

 

비록 노예라는 신분은 여전했으나 인생의 절반을 기사로서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모두 전생의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 블라디미르라는 집단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것 말고도 저번 생과 현재 생은 너무 다른 점들이 많았다.

 

워낙 귀를 닫고 살아가다 보니 세상 소식에 둔감했고,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으나 너무 낮은 위치였기에 모르는 정보들을 직접 겪게 된 것일 확률도 있다.

 

‘하지만 가우스트는? 가우스트 조르디는 전생에 죽지 않았어.’

 

안톤의 뇌리에는 대전쟁에서 조르디가의 무사들을 이끌고 참전하여 그 위엄을 뽐내던 가우스트의 모습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내가 조르디가에 와서 비틀어진 건가? 내가 스승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도대체 블라디미르, 그들은 뭐지? 뭐가 목적인 거지?’

 

안톤은 새로운 삶을 얻게 되어 자유를 목적으로 다른 곳은 볼 새 없이 그것만을 위해 줄기차게 달려왔다.

 

하지만 이제 주위를 둘러봐야 할 때였다.

 

이번 일로 세상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들로만이 아니라 암약 중에 벌어지는 무언가를 동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가주전에 들었을 때, 연기에 당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아니, 애초에 하인의 말을 의심해서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치닫지 않았을지도 몰라.’

 

좀 더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누군가 시켜서, 혹은 해야만 하는 것 때문에 움직인다면 언젠가 이 각인에서 벗어난다고 하여도 결국엔 언제까지고 노예일 테니까.

 

‘간략적으로나마 미래의 사건들을 안다는 것은 대단한 이점이다. 하지만 나는 이를 제대로 사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지.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고, 분명 내가 처한 사건들도 벌어지기 전에 막을 순간이 있었을 거야.’

 

깨달음은 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삶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안톤은 목적의식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선 안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더 강했다면 이런 상황에 처하지도, 스승님이 위험에 빠지지도 않았겠지. 나는 더 강해져야 해.’

 

안톤은 지금보다 더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의 노예가 아닌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기에.

 

 

* * *

 

조르디 가문령을 벗어나고 보름이 지났을 때, 안톤을 포함한 그들 일행은 드디어 해린에 도착했다.

 

일국의 왕자라는 워낙 확실한 신분이기에 간단한 입국심사만으로 해린의 국경을 넘은 그들은 군인들의 극진한 호위를 받으며 수도로 향했고, 오늘 수도 쟝-그리던에 도착했다.

 

“정말 괜찮겠는가? 내가 사람들에게 그대를 고작 용병이라고 소개하여도?”

 

조심스레 물음을 던지는 핫산에게선 아직까지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습니다. 사실 그게 가장 위화감이 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그렇게 하자고 한 것이니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으십니다.”

 

“미안해서 그러네. 북부는 몰라도 해린에서는 용병을 천하게 여기니까.”

 

핫산은 그가 자신을 도와주기로 한 자이니만큼, 안톤을 타국의 기사라고 소개하며 어엿한 대접을 해 주고 싶었다.

 

“그래도 노예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아, 이제 보니 신분이 상승한 것이었군요.”

 

핫산은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안톤을 보며, 그가 이 문제에 대해서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군……. 아무튼 고맙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내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바깥에서 번잡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안톤은 벗어 두고 있던 헬름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그럼 잘 부탁하겠네, 칼.”

 

핫산의 격려에 안톤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쟝-그리던에서는 여타 도시들처럼 왕자라는 신분을 앞세워 검문을 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핫산 헤이젤 에르단 왕자님 외, 제국 기사 클린턴 제오르, 남부 출신 제국 용병 칼이 맞습니까? 투구를 벗어 얼굴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

 

안톤은 묵묵부답의 태도로 일관했다.

 

이제 해린에서는 안톤이 아니라 칼이란 신분으로 살아야 했으니까.

 

칼은 펭 제국에서 활동하는 남부 출신의 용병이다. 어린 시절 마적 떼에 의해 부모를 잃고 화상을 입었다.

 

핫산은 그를 대신하여 이러한 사연들을 치안대장에게 지나가는 투로 말해 주었다.

 

“보지 않는 게 좋을 걸세. 그는 어린 시절 화상으로 목소리를 잃고 끔찍한 얼굴을 지니게 되었으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핫산은 상상만으로도 역겹다는 듯한 표정을 연기하였으나 통하지 않자, 살살 달래는 어조로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의 신분은 내가 장담하겠네. 얼굴 확인은 넘어가세. 이미 호패도 확인해 보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지만 규정상…….”

 

치안대장이 곤란하다는 듯 소극적인 태도로 말꼬리를 흐렸다. 이때다 싶어 핫산이 큰소리치기 시작했다.

 

“해린의 2왕자인 내가 나라에 해가 될 일을 할까! 아니면 자네는 날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내가 1왕자가 아니라 2왕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무시하는 겐가?”

 

“……알겠습니다. 하지만 왕성에 들어갈 때는 이처럼 들어갈 순 없을 겁니다.”

 

“하기사 그렇겠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신경 써 줘서 고맙군.”

 

“그럼 왕성까지 가시는 길은 저희가 돕겠습니다.”

 

수도의 치안대는 자연스레 국경부터 이곳까지 호위를 해 준 국경 초소의 군인들을 대신해서 호위하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대우에 군인들 중 누군가 하나쯤은 불만을 표할 법도 했지만, 다들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지시를 따랐다.

 

그들 치안대가 지닌 평소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마차는 줄줄이 세워진 행렬의 호위를 받으며 관로를 따라서 쭉 올라갔다.

 

쟝-그리던은 고지대에 위치한 성이었고, 왕성은 그 중심이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왕성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시야 또한 넓어졌다.

 

어느 지점에 도달하자 핫산이 마차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마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짠 기가 감도는 듯했다.

 

안톤은 항구 특유의 진한 물비린내를 느낄 새도 없이 한눈에 들어온 쟝-그리던의 풍경에 넋을 잃었다.

 

“아, 혹시 바다를 처음 보는가?”

 

열린 마차의 창문 너머로, 지평선이 아닌 수평선이 보였다. 태양이 물에 빠지듯이 석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쟝-그리던은 대륙 가장 끝부분에 위치한 항구도시였다.

 

“장관이지 않은가?”

 

“…….”

 

마차에는 클린턴과 핫산, 그리고 안톤밖에 없었으나 항상 조심하기로 했기에 안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진심이었다.

 

항구에 정박된 수백의 선채, 짐을 싣거나 출항을 하거나 돌아오는 거대한 배들의 모습은 그 어디서도 본 적이 없던 장관이었다.

 

“하하! 그렇다고 어디 가서 절대 티 내지 말게나, 안톤. 남부인이 아니란 게 금방 탄로 나고 말아 버릴 테니.”

 

기분 좋은 듯 크게 웃는 핫산을 바라보던 클린턴이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체가 탄로 나는 건 아무래도 벙어리인 칼이 아니라 왕자님의 가벼운 입 때문일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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