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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38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0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38화

038. 약속

 

 

조르디 가문령 최동부에 위치한 제4 검문소를 벗어나자마자, 핫산 왕자는 주문을 외워 안톤을 팔찌에서 꺼내었다.

 

“다음 검문이 있기 전까지는 밖에 나와 있어도 괜찮을 걸세.”

 

“…….”

 

어떠한 말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무언가에 정신 집중이라도 하듯, 안톤은 한동안 눈을 감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이 자신의 잘못도 아닐진대, 지속되는 어색한 침묵이 핫산을 숨 막히게 만들었다.

 

“운이 좋다면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아니, 분명 그럴 거네.”

 

그가 안톤을 상대로 위로의 말을 던졌다.

 

속내를 감춘 덧없는 위로였다.

 

아무리 현경의 무인이라 한들, 그의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부상을 입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도처에 적이 만개한 곳에서 미끼 역을 자처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

 

“내가 자네의 심정을 감히 헤아린다 말은 못 하겠지만…….”

 

그때였다.

 

말을 끊고 나선 안톤이 확 하고 눈을 뜨며 안광을 흩뿌렸다.

 

“살아 있습니다.”

 

두서없는 말에 적잖게 당황하는 것도 잠시였다. 핫산은 전력으로 수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 그렇지, 분명 그럴 거네.”

 

“스승님께선 아직 살아 계십니다.”

 

자연스레 핫산의 얼굴에 의문기가 어렸다.

 

그 정도로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안톤은 자신의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문신을 핫산에게 보란 듯이 내밀었다.

 

“노예각인마법이 아직 이어져 있습니다. 만약 술주이기도 한 스승님이 명을 달리했다면 진즉에 끊어졌을 것입니다.”

 

핫산의 얼굴에 화색이 띠어졌다.

 

“오오! 그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참 다행인 일이네!”

 

사실 노예각인마법의 신호로는 겨우 생존의 여부만을 알 수 있을 뿐이지,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간신히 명줄을 이어 가고 있는 상태라, 곧장이라도 그 신호가 끊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핫산은 결코 이 생각을 겉으로 표현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외려 과장된 목소리로 연신 호들갑을 떨어 댔다.

 

“정말로 신이 도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네!”

 

안톤도 그런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다만 그것이 호의라는 것을 알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

 

하지만 그런 그의 여러 노력에도 안톤의 호응이 별로 없자, 다시금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핫산은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 마차의 창문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 마부석에 앉은 클린턴에게 말을 걸었다. 마차의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 등이 아우러져 소란스러웠기에 자연히 그의 목소리는 컸다.

 

“이보게, 클린턴 경! 우리가 얼마나 왔는가?”

 

“이제 라트 가문령에 진입했습니다. 그나저나 창문을 닫으시지요. 신변 노출의 위험이 있습니다.”

 

“아, 알겠네.”

 

괜스레 타박만 맞은 핫산 왕자가 창문을 닫았다.

 

클린턴은 그 이후에도 끝까지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고, 안톤은 여러 생각이 많은지 계속 침묵을 고수했다.

 

핫산 왕자만이 다음 대화 주제를 생각하느라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정숙한 분위기를 껄끄럽게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아! 맞다!”

 

드디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핫산이 무릎을 쳤다. 아무래도 물색하던 대화의 주제를 찾아낸 것 같았다.

 

“……?”

 

“그러고 보니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온-누르 공께선 자세한 이야기는 그대에게 들으라던데? 도대체 그 누가 천하의 온-누르에게 그런 부상을 입힐 수가 있었던 거지? 내가 살아온 날들이 결코 많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배가 꿰뚫렸는데 살아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네!”

 

“…….”

 

“아…….”

 

핫산은 잠시 자신이 흥분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스승님께선 아직 살아 있지 않습니까?”

 

“……크흠, 흠!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아무튼 대답은?”

 

“저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제 탈출 계획에 협력한 총관이 배신했습니다. 그걸 배신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지하 감옥을 나서자마자 헤스갈과 함께 대기하던 화경에 이른 쉰 명의 무인들이 공격해 왔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선 마법과 화살이 날아왔는데, 그조차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화살이 아니라니?”

 

핫산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안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공성전에서나 쓸 법한 크기의 화살이었습니다. 멀리서 날아왔기에 실물은 보지 못하였으나 왕자님께서도 화살 크기만 보더라도 절대 대인용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으셨을 겁니다.”

 

안톤은 두 팔을 크게 벌려서 화살의 크기를 어림짐작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짐작 가는 것이 있었는지 핫산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대쇠뇌! 음……. 그걸 고작 한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쓰는 일이 있을 줄이야. 거기다 화경의 무인 오십과 마법사들이라니……. 과연 온-누르 공으로서도 쉽지 않았겠소. 그럼 그 부상도 그때 입은 것인가?”

 

“아닙니다.”

 

안톤은 팔찌 속 무형의 공간에서 보았던 일들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지고한 경지에 이른 무인의 시점에서 바라본 전투의 과정들은 그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스승님께선 일 대 다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외려 그들을 압도했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나타난 이후부터입니다.”

 

“그녀? 설마 그분께 그런 부상을 입힌 게 여자였단 말인가?”

 

입이 떡 벌어진 핫산의 얼굴에서 강렬한 호기심이 느껴졌다. 안톤은 차분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창백한 피부의 은발 여인이었습니다. 외견은 가히 절색이라 칭할 만큼 아름다웠으나, 스승님께서는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인간이 아니라면……? 혹시 화요종이나 혼요종이었던가?”

 

대륙엔 인간 외에도 여러 이종족들이 존재했고,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이들이 화요종과 혼요종이었다.

 

그 외의 다른 종족들은 대부분 인간 사회에 나오지 않고 대륙 오지에서 활동했기에 인간과 교류가 없었다.

 

“일전에 한 번 그들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검기나 검강을 사용치는 않았지만 스승님과 접전을 이룰 만큼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그 힘을 요력이라고 칭하더군요.”

 

“하! 그런 자들이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블라디미르.”

 

의외에 장소에서, 상상치도 못한 단어를 들은 것처럼 핫산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

 

“스승님께선 그녀와 그 배후 무리들이 속한 단체를 그렇게 칭했습니다. 혹시 아시는 게 있는 겁니까?”

 

금방 대답해 줄 것 같던 핫산이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깊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항상 수다스러운 그가, 그의 의지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안톤이 핫산을 만나고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안톤. 앞으로의 대화는 꼭 비밀로 해 주어야 하네.”

 

사뭇 진지해 보이는 목소리에 안톤이 즉각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믿지 못한다면 맹세라도 해 드리지요.”

 

어찌 되었건 블라디미르는 안톤의 적이었다. 소우든에는 지피지기라는 말이 있다.

 

적과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해 주는 단어다.

 

그간의 경험을 뒤돌아보며 안톤은 그 말에 상당히 공감했다.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적에 대한 정확한 정체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심지어 그 적이 다름 아니라 현경의 무인조차 암살하고 능히 상대할 무력을 지녔음에야 그 정보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하고 있는 안톤을 바라보며 핫산은 멋쩍은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럴 필요는 없네. 믿지 않았다면 그 이름을 들었을 때 그냥 모른 척 지나갔을 테니까.”

 

진심은 확인하였으니 이제 무거운 분위기는 필요 없다는 뜻일까.

 

핫산이 다시 특유의 경쾌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 이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 혹시 그대는 일국의 왕자인 내가 자국민이 아닌 제국의 기사를 호위로 두고 있는 것을 이상케 여긴 적은 없었는가?”

 

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나 역시 처음부터는 그랬던 건 아니네. 그리 휘황찬란한 것은 아니지만 처음 내 나라를 나설 때만 해도 열다섯의 기사와 개인 시종 다섯, 세 대의 마차가 나와 함께하고 있었지. 하지만 목적지까지 향하는 중에 날 지키다가 모조리 죽었네.”

 

짐짓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는지 그는 살살 고개를 흔들었다.

 

핫산은 여전히 서글서글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안톤은 그에게서 불타는 듯한 원한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문득 피부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독하리만치 강렬한 원한이었다.

 

비록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대화의 흐름상 그 원한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블라디미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핫산은 잠시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대는 해린에 대해서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는가?”

 

“이름만 알고 있습니다.”

 

안톤의 솔직한 대답에 핫산은 자조적인 미소를 내지었다.

 

“하기야 그렇겠지. 북부인들의 입장에서 해린은 대륙 끝부분에 위치한 작은 나라에 불과하니까. 아아,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네. 난 지금도 내 나라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고 사랑하고 있으니.”

 

핫산의 말투에서 그 진심이 절로 묻어 나옴을 알 수가 있었다.

 

마땅히 조국이라든지, 고향이라든지 할 게 없는 안톤으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으나, 솔직히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아니 그렇기에 용납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핫산은 혼잣말 비스무리하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꽉 쥐어진 그의 두 주먹에는 땀이 송골 맺혀 있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뭘 용납할 수 없었다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안톤은 섣불리 질문해 대화의 맥을 끊기보단 이어질 그의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차라리 이 사실을 몰랐다면 모를까, 이를 알게 된 내가 어찌 이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해린 왕실의 28대 왕위를 계승해 국정을 운영해야 할 제1 계승자이자 나의 형제인! 내가 우러러보며 존경했던 그가 사실은 외부 세력에 속한 일개 일원이며, 그들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르려고 한다는 걸!”

 

필시 그 외부 세력이라 함은 블라디미르를 칭하는 것일 게다.

 

놀라웠다.

 

아무리 대륙 변방의 나라라 한들, 일개 단체가 차기 왕을 자기들 손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한 나라의 왕이 조국이 아니라 다른 소속에 속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일개 일원으로!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점점 핫산의 감정이 격해졌지만, 안톤은 차분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이를 용납하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네. 그간 지켜 왔던 나라의 정통성이 훼손되고 그로 인해 신민들의 마음이 갈가리 찢겨 나갈 건 불 보듯 뻔한 일일 테니까. 하지만 내겐 힘이 없었고 정보가 부족했네. 내가 펭 제국으로 향하게 된 계기도 바로 그것이었네. 몇 년간 갖은 고생 끝에 그들의 이름과 그들의 주력 무대가 북부라는 정보를 얻게 되었는데, 북부의 중심지인 제국이라면 이들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지. 물론 혹시나 황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내게 힘을 실어 줄지 모른단 기대도 있었고.”

 

“…….”

 

“허나 그곳까지 당도하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았지. 그동안에 참 많은 피가 부질없이 흩뿌려졌다네. 바로 내 눈앞에서. 나는 아직도 눈만 감으면 그때의 일이 소상히 생각나네. 그네들만의 삶이 가득 담겨져 울분에 찬 눈동자가, 고통에 흐느끼는 울부짖는 소리가.”

 

핫산은 울분이 가득한, 마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이제 멈출 수 없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내야 하니까.”

 

그의 말에선 사명감마저 느껴졌다.

 

안톤은 핫산이라는 사람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조국의 번영과 수하들의 복수.

 

그것이 그를 계속해서 쉬지 않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핫산의 모습은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망연자실하며 포기하는 패배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니 무언가 자기만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안톤은 그것이 듣고 싶었다.

 

핫산은 고개를 들고 움츠렸던 어깨를 당당히 폈다.

 

“나는 내 형을 몰아내고 해린의 28대 왕이 될 걸세.”

 

포부가 느껴지는 한 마디를 내뱉은 핫산은 안톤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사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이미 정해진 것이니까.

 

“제가 뭘 해 드리면 됩니까?”

 

“차기 명인이라고도 불리는 클린턴 경의 검을 부러뜨린 그 검으로, 내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날 지켜 주게나. 그럼 언젠가 반드시 내가 왕이 되어 그대를 위해 블라디미르를 찌르는 검이 되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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