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35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35화
035. 괴물
“공녀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 말에 동의한다는 뜻인진 모르겠으나, 헤스갈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 또한 더 이상 가문의 치부를 늘리고 싶은 마음은 없소.”
과연 그 말이 사실일까 의문이 들면서도, 마땅히 좋은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온-누르는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믿겠다.”
헤스갈을 향한 대답이었으나, 온-누르의 시선은 총관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이 믿는 쪽은 헤스갈이 아니라 총관이라고 말이라도 하듯이.
총관이 헤스갈에게 눈짓을 보내자, 이내 헤스갈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총관은 성큼성큼 온-누르에게로 다가갔다.
“공녀, 이리 오시오.”
혼자 남을 온-누르를 바라보며 머뭇거리던 린디아스는 이내 착잡한 기분으로 발을 뗐다.
린디아스가 총관을 따라 무리 사이로 돌아가자, 헤스갈이 그녀의 앞에 정면으로 선다.
과연 어떤 말을 들을까 싶어 안절부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의 귀로 들려온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덕분에 아버님을 죽인 원수를 유인해 낼 수 있었다. 아주 잘했구나.”
심지어 헤스갈은 다정하게 린디아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그건… 오라버니가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게 틀림없…….”
“조용히 입 닫고 있어라.”
헤스갈이 린디아스의 입을 거칠게 가로막았다.
그리고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읊조렸다.
“반역자 년아.”
소스라치게 싸늘한 목소리에 그만 몸이 얼어 버린 린디아스를 보며 헤스갈은 몸을 떨어트리며 작게 웃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할 거면서,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한 거냐? 이번 일이 끝나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거다. 이제 널 지켜 줄 사람은 없으니까.”
“…….”
얼어붙은 듯 몸이 굳은 린디아스의 옆으로 총관이 다가섰다. 그는 헤스갈을 바라보며 통보식으로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기 거북하군요. 저는 먼저 공녀님을 데리고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시오.”
둘이 자리를 벗어나며, 이번 건에 대해선 일단락 지은 헤스갈은 이제 온-누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럼 시작해 봅시다.”
“…….”
“당신을 잡기 위해 준비한 게 참 많아.”
온-누르는 장내를 한 번 쓱 훑어보았다.
사태가 이렇게 번졌음에도 그는 딱히 두렵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게, 참 많이도 준비했군.”
무미건조한 짧은 감상에 헤스갈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엄중한 기세로 대치 중인 무인들 하나하나가, 명문 조르디가만 아니라면 어딜 가더라도 장로 자리는 차지할 수 있을 만큼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다니.
마치 얕보이는 듯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게 그 녀석들의 힘인가?”
“……?”
순간 시종일관 호쾌한 선을 그리던 그의 입가가 흠칫 굳는다.
온-누르는 아랑곳 않고 거침없이 독설을 이어 갔다.
“얼굴을 가렸다고 해서, 이 이질적인 기운들을 내가 느끼지 못할 것 같던 건가? 외부의 힘을 빌리다니, 쓰레기 자식. 다름 아니라 너야말로 조르디가 역사상 최고의 치부다.”
“……상황이 몰리니까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해 대는군.”
“너야말로 언제까지 광대 짓을 할 셈이냐?”
“시간이라도 끌어 볼 참인가?”
“블라디미르.”
잠깐이지만 헤스갈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네가 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
“애써 침착한 척할 필요 없다. 이미 다 알고 말하는 것이니까. 하나만 묻자.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거냐?”
온-누르는 정말로 궁금했다.
대륙제일검가라는 조르디가의 장남이자 후계자로서 누릴 건 모두 누리면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런 가당찮은 일을 벌였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던 것이다.
아쉽게도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가 않았다.
“뭣들 하느냐? 당장 공격하지 않고!”
그 외침 소리를 기점으로, 흑의의 무인들이 날아든 것이다.
검과 화살이, 마법이 날아든다.
“빈말은 아니었던가.”
온-누르는 공기를 가르며 쏘아지고 있는 화살을 검으로 쳐 냈다. 묵직한 일격에 검을 쥔 손목이 얼얼했다.
쉴 틈은 없었다.
온-누르는 재차 양면에서 찔러 오는 검을 피하려 몸을 비틀었다. 허나 회피 동작을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 그 자리로 마법이 쏘아졌다.
마법에 적중하고 말았지만 물리적인 타격은 없었다. 대신 육신의 기력이 빼앗기듯 몸이 조금 굼떠졌을 뿐이다.
“약화 마법인가.”
각성. 혹은 환골탈태라 불리는 과정을 통해 갖게 된 초인적인 육체는 마법에 대한 저항력도 뛰어나기에 효과는 미미했다.
하지만 이 같은 마법들이 계속 중첩되다 보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상황까지 번질 것이었다.
‘소모전으로 갈 생각이군.’
현경의 무인이 절대적인 이유는 검기로는 검강을 막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는 이 점을 보완할 점을 찾아냈다.
혼자서 막을 수 없다면 둘이서.
둘이서 막을 수 없다면 셋이서.
검강을 두른 검을 휘두르면, 벽처럼 굳건하게 진형을 잡은 전열의 무인 서넛이 힘을 합쳐 이를 막아 냈다. 게다가 들고 있는 검도 표면에 기이학적인 문양들이 새겨진 걸로 보아 평범한 무기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제일 귀찮은 점은 그런 수비적인 대세에 이어 외부에서 쏘아지는 지원 사격이었다.
과연 단단히 준비했다는 느낌이 물씬 났다.
“나도 참, 어지간히도 얕보였나 보군.”
격렬한 사투 속에서도 온-누르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이런 전략을 짜 온 자는 화경은 검기, 현경은 검강과 환골탈태라는 이등분적 관념에 사로잡힌 인물 같았다.
경지에만 사로잡혀 정작 온-누르라는 무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그가 어떤 부류의 무인인지 알았다면 이따위의 전술을 채택했을 리가 없다.
자존심이 상한 맹수처럼, 온-누르가 이를 드러냈다.
“본격적으로 상대해 주마.”
밀암무사로 지낸 30년의 세월.
그는 한 사람의 무인이기도 했지만, 대인전에 특화된 훌륭한 암살자이기도 했다.
“이게 무슨…….”
온-누르가 전력을 다하기 시작하자 헤스갈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감돈다.
괴물.
이 단어보다 저 상대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기나 할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상대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화경의 무인이 오십. 외곽에 위치한 저주 계열 마법의 전문가인 흑마법사 다섯. 그리고 전쟁에서나 쓰일 공성병기들과 이를 한데 아우르는 전략까지.
이 정도의 준비면 아무리 현경의 무인이라고 한들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온-누르의 몸에서 검은색 오러가 풍겨 나오면서부터 상황은 변했다. 분명 눈앞에 존재함에도 기척을 읽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는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변했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마다 전열에 서 있는 무인이 하나씩 쓰러졌다. 힘을 합쳐 공격을 막아 낼 틈도 없었다.
무력화된 무인들이 늘어날수록 진형에는 공백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쓰러지는 속도가 점점 가속화됐다.
어느 누구도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헤스갈은 온-누르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인의 등 뒤에서 나타나 망설임 없이 목덜미를 긋는 와중이었다.
공포에 질린 짐승처럼 등 뒤의 피부가 바짝 선 헤스갈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어?”
누군가와 부딪쳤다는 감각이 어깨에서 전해져 왔다. 오싹했다. 그는 가장 안전한 후위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주변엔 어떤 사람도 없었으니까.
헤스갈은 황급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등 뒤에 있던 인영은 온-누르가 아니었다.
석양을 등지고 반짝거리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한 인영이 서 있었다.
“곤란해 보이시네요?”
핏기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피부를 한 은발의 여자였다. 그녀는 육감적인 몸매를 감추지 않고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다, 당신은……!”
경악과 안도가 한데 섞인 얼굴을 한 헤스갈을 바라보며 여인은 빙긋 웃었다.
“도움이 필요한 것 같네요, 당신.”
그 화사한 얼굴을 바라보며 헤스갈은 심장이 멈춘 사람처럼 몸이 굳고 말았다.
성욕이나 설렘 따위의 감정이 아니었다.
공포.
그것은 상위 포식자를 바라본 먹이사슬의 하위 개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헤스갈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녀와는 아군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관계이지만, 적이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아직 놓친 것은 아니오.”
겨우겨우 한 마디를 내뱉은 헤스갈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 자신은 조르디가의 가주라는 높은 위치에 섰다. 그런데 일말의 순간이라지만 겁을 집어먹었다니, 자존심이 조각나고 있었다.
“인정하는 것이 어렵나요? 나한테 부탁해 봐요. 혹시 들어줄지도 모르니까.”
은발의 여인은 그런 헤스갈이 귀엽게만 보이는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를 첨언했다.
“당신 아버지를 죽인 것처럼.”
빠드득.
무의식중에 세게 다문 입에서 이가 엇갈리는 소리가 났다. 헤스갈은 뒷짐을 진 손가락을 손톱으로 꾹 눌렀다.
화르륵 타오르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노력이었다.
“뭘 원하지……?”
“글쎄요? 그냥 도와 달라고 하면 해 줄지도?”
슬슬 인정해야 할 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성이 외치고 있다.
저 여인의 힘이 없다면 진정으로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일 것이라고, 그러니까 감정을 배제하라고.
“도와……주시오…….”
힘겹게 뱉은 말이었으나 여인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공짜로요?”
이윽고 굳게 다물어진 헤스갈의 입에서 한 방울의 피가 실선을 그리며 흘렀다.
“어머, 무서운 얼굴. 그럼 이번엔 빚으로 해 둘까요?”
어떤 게 좋을까.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은발의 여인이 전장에 난입했다.
* * *
열다섯 명째 무인의 목을 따 버린 이후, 견고하던 수비 진형은 완전히 붕괴됐다.
그리고 온-누르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밖으로 도주할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전장에 남아 나머지 무인들을 모조리 해치우고자 마음먹었다.
감히 조르디가를 넘보는 외부 세력의 힘을 조금이라도 줄여 놓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의 숫자면 그놈들도 꽤나 타격을 입겠지. 우선 밖에 있는 마법사부터 처리해야겠군.’
그렇게 온-누르가 야외로 몸을 날리던 찰나였다.
‘이건……!’
강대한 마력의 응집이 측면에서 느껴졌다. 온-누르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었다.
콰콰쾅!
‘이런 속도에 이런 힘이라니.’
게다가 마법도 아닌 것 같았다. 느껴지는 기의 흐름이 마법의 패턴과는 명확히 달랐다.
앞서 해치운 무인들의 기운처럼 이질감이 느껴지는 기운이었지만, 그 크기는 비할 수 없이 강대했다.
흙먼지가 가시고, 온-누르가 서 있었던 지면에는 원 형태의 흔적이 생겨났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은발의 여인이었다.
‘여자?’
온-누르는 갑작스레 등장한 여인이 자신과 시선을 마주쳤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독문 무공인 암혼지공(暗混地功)을 사용해 나무 그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온-누르는 순순히 무공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인간이 아니군.”
“초면에 그런 질문은 실례인데요.”
여인은 어깨를 움츠리고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등 부끄러운 기색을 겉으로 내비쳤으나 그 행동이 의도적으로 보여 준 과장된 모습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인간 흉내라도 낼 참인가? 저치들은 미약해서 몰랐지만, 지금 보니 확실해지는군. 이건 요력이야.”
요력(妖力).
인간 외의 몇몇 이종족 혹은 괴수들이 다루는 힘이자, 마나와 비슷하면서도 그 근간이 완전히 다른 불가해의 힘.
온-누르는 세 번에 걸친 북대륙 탐방 과정 속에서 그 힘을 겪을 일이 수어 번 있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진한 요력을 풍기는 상대는 그로서도 본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어머, 예리하기도 하셔라.”
여인도 온-누르의 추측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로서 온-누르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하였다.
‘인간뿐만 아니라, 이종족 또한 포섭하다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군.’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을 지닌 기괴한 집단이 가진 힘은 상상 이상의 것인 듯했다.
온-누르는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너희들은 대체 목적이 뭐지?”
“글쎄요? 알려 주면 순순히 잡혀 주실 건가요?”
“알려 주기 싫다는 거군.”
“제가 언제 그랬어요? 당신이야말로 잡혀 주기 싫다는 거겠죠.”
“말장난은 여기까지다.”
말재주가 뛰어났다면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 작은 단서들이라도 유도해 낼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온-누르에게는 그런 화술이 없었다.
그러나 신은 공평하다고, 그는 유려한 화술을 대신할 뛰어난 장기가 하나 있었다.
“싸우자.”
대답은 그 이후에 듣자고 생각하며, 온-누르의 검이 은발의 여인을 향해 쏜살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콰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