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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3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3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33화

033. 함정

 

 

아직 날도 채 밝지 않은 깜깜한 이른 새벽이었다.

 

안톤은 황급히 잠을 깨운 시종을 따라 별채를 나섰다.

 

가주, 슐츠 조르디의 호출이 그 이유였다.

 

‘무슨 일로 날 부른 거지?’

 

지난 1년 동안 슐츠가 먼저 안톤을 부른 적은 없었다.

 

소천교에 참가를 명할 때도 사람을 시켜 전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명확히 증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모두 잠에 든 이른 시간이라는 사실도 그 위화감을 더욱 키우고 있었다.

 

‘꼭 이런 시간에 불렀어야 하는 걸까.’

 

이상한 점은 한둘이 아니다.

 

다만 안톤을 깨운 자가 지난 1년 동안 낯이 익은 하인이었기에 순순히 따라나섰을 뿐.

 

바깥은 어두울 뿐만 아니라, 안개도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그리고 묘하게 인적도 드물었다.

 

‘원래 이렇게 사람이 없었나?’

 

이쯤 걸었으면 야간 순찰을 도는 경비 무사를 몇몇 마주칠 법도 한 거리였다.

 

점점 더 진해지는 위화감에 왠지 모르게 자꾸 속이 거북했다.

 

스승인 온-누르도 그 자리에 같이 있다는 하인의 말이 아니었으면, 안톤은 진즉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결국 안톤은 가주전에 도착했다.

 

일전에 린디아스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날 들른 적 있던 그곳이었다.

 

다행히 두 명의 무사가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얼굴까지 투구로 가린 무사들은 하인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어 주었다.

 

샅샅이 몸수색을 하던 지난날과는 대조되는 행동이었다.

 

턱!

 

실내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둔탁한 여닫이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장내는 안개라도 낀 듯 연기가 자욱했다.

 

어떤 향초라도 피운 것일까?

 

숨으로 맡아진 연기는 매캐하기보단 은은한 꽃내음이 풍겨 왔다.

 

“이건……?”

 

그리고 동시에 익숙한 냄새가 맡아졌다.

 

향기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짙은 피비린내였다.

 

확정할 수 없던 위화감이 순식간에 거대한 형체로 화하는 순간이었다. 피부가 곤두선 안톤이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인을 향해서였다.

 

길 안내를 마쳤으면 이제 돌아가야 할 하인이 가주전 내부까지 따라와 있었다.

 

“스승님은 어디 계시오? 또 날 불렀다는 가주는 어디 있고?”

 

문득 안톤은 그 하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 하인이 품속에서 은장도를 꺼내 안톤을 향해 직선으로 팔을 내찔러 왔고, 반사적으로 움직인 안톤의 손이 하인의 팔목을 붙잡았다. 초 단위의 짧은 과정이었으나, 안톤은 그 순간이 수십 배는 길게 느껴졌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렇게 소리를 쳤지만, 하인에게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안톤은 남은 한 팔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갑작스레 느껴진 극심한 구토감 때문이었다.

 

‘향에 뭔가가 섞여 있어.’

 

시야가 어지럽게 여러 조각으로 나뉘기 시작한다.

 

안톤은 하인의 팔을 놓고 몇 걸음 물러났다.

 

‘함정이다. 그치만 왜?’

 

멀쩡한 정신으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안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기괴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푸름보다 찬란한 붉은 피를 위하여!”

 

은장도를 역수로 쥔 하인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망설임 없이 찔렀다.

 

분수처럼 잔뜩 쏟아져 나온 피가 안톤의 얼굴을 적셨다.

 

“젠장.”

 

안톤은 자신이 손을 쓸 새도 없이 즉사한 하인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생각하기엔 아주 평안한 얼굴이었다.

 

정신을 부여잡은 안톤은 문밖으로 나가기보다 연기를 헤치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밖에 있는 경비 무사들 또한 한통속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걷다 보니 바닥 아래로 진득한 핏물이 보였다.

 

그 흔적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니 한 사람의 주검이 드러났다.

 

조르디가의 가주, 슐츠 조르디의 시신이었다.

 

금빛의 용포는 피로 흠뻑 젖었고, 평소 위엄 넘치던 눈은 초점 없이 천장을 향하고 있다.

 

왜 멀쩡하던 슐츠가 하룻밤 사이에 눈앞에 주검이 되어 있는 것인지.

 

오러 마스터. 즉 현경의 무인을 죽인 암살자의 정체는 무엇인지.

 

하인은 왜 자신을 공격하기보다 자결을 한 것인지.

 

모두 다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다.

 

“저게 왜…… 여기에…….”

 

대장간에 보수를 맡긴 자신의 대검이 어떠한 연유로 슐츠의 심장에 꽂혀 있는가였다.

 

그 모든 의문들이 미처 해결되기도 전에, 순간 뒤통수에서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눈앞의 시야가 어둡게 변하면서도, 안톤은 귓가로 한 남성의 흥분한 외침 소리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주께서 살해되셨다!”

 

 

* * *

 

“지금 아버님이 살해당하셨다고 하셨습니까?”

 

이른 아침, 헤스갈은 총관의 입으로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는 중이었다.

 

연신 경악을 금치 못하는 헤스갈을 상대로, 염소수염의 총관은 침울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

 

헤스갈은 잠시 두통이 몰려왔는지 몸을 휘청였다.

 

힘이 쭉 빠진 몸과는 다르게, 그의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범인은…… 범인은 누굽니까?”

 

“경비 무사가 현장에 있던 자를 우선적으로 사로잡았고 심문 중입니다만,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자가 누구냔 말이오!”

 

탕!

 

헤스갈은 자신의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언제나 이성적이던 헤스갈의 언행들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평소였으면 그런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을 총관도 그저 또다시 고개를 한층 숙일 뿐이었다.

 

“안톤이라는 자입니다. 현장에 있던 것은 그뿐이었고, 가주님의 시신에는 그의 검이 꽂혀 있었습니다.”

 

“안톤? 암검의 제자인 그 노예 놈 말이오?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오? 아버님께서는 현경에 이른 무인이었단 말이오!”

 

“그 사안은 앞으로 밝혀내야 하는 일이지만…….”

 

잠시 말꼬리를 흐리던 총관은 이내 무언가 결정한 듯 재차 말을 이었다.

 

“내부적으로는 그 동조자가 있었음을 의심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동조자가 누구요?”

 

“그의 스승인 암검 온-누르입니다. 가주님과 같은 현경의 무인이며, 밀암무사 출신으로 그 누구보다 암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습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시겠소?”

 

“알겠습니다. 가문이 어수선하니 금방 자리에 나오셔야 합니다.”

 

방금 부친상의 소식을 접한 아들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다소 냉혹할 수도 있다. 허나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총관의 심정을 이해하기라도 하듯, 헤스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공자님,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고맙소.”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턱.

 

총관이 방을 나가고 이내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 소리가 기점이라도 되듯, 울분 가득하던 헤스갈의 낯빛이 변하였다.

 

아주 무표정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입가의 끝이 살짝 올라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막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팔을 위로 내뻗으며 어깨를 돌리는 등 몸을 풀었다.

 

“이제…… 시작이야.”

 

주름진 소매를 어루만지며 옷을 가다듬은 헤스갈은 다시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표정을 점검했다.

 

이윽고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방을 나서는 헤스갈의 얼굴은 비장하기만 하였다.

 

 

* * *

 

슐츠 조르디가 죽었다.

 

그것도 심지어 가주전에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 사실이 불러온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최종 결정권자가 사라진 가주전의 장로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허나 모든 혼란은 스스로 추스르고 등장한 헤스갈이 전권을 위임받으며 차차 정리되었다.

 

그는 가장 먼저 백무대의 대주에게 책임을 물었다.

 

지척에서 가주의 신변을 보호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에서였다.

 

징계는 그 어느 때보다 가혹했고 거침없었다.

 

즉참.

 

30년이 넘게 가문에 헌신했고, 주변 인망이 좋던 백무대주의 목이 단숨에 날아갔다.

 

상황이 채 정리가 되기도 전에 헤스갈은 두 번째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란 조르디 가문령 전 지역에 모든 출입을 봉쇄하라는 것이었다.

 

성 하나면 모를까.

 

마지막으로 전 지역 규모로 하는 봉쇄령이 내려진 것이 100년하고도 50년이나 더 전의 일이었고, 그마저도 국경선을 맞댄 지아누와의 전쟁 당시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장로들은 필사적으로 만류하고 나섰다. 합당한 이유에서였다.

 

조르디가의 영토는 아주 넓다. 그리고 지리상으로도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상단이 오간다.

 

그런데 모든 지역의 문을 잠가 버린다?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예상되는 건 빤한 노릇이었고, 실질적으로 가문의 중요 업무를 결정하는 장로로서 용허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게다가 그런 짓을 했다간 슐츠가 암살되었다는 사실이 천하에 공표되지 않는가.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습니다.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 한 마디에 장로들은 아무런 의견도 내지 못했다.

 

같은 장로이기도 했던 백무대주가 목숨을 잃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본 이후인지라, 다들 말을 아끼고 몸을 사리기 바빴다.

 

그리고 그런 장로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헤스갈은 또 이렇게 말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가문령 전역에 봉쇄령에 관한 공문이 내려갔고, 모든 성문이 잠겼다.

 

지역민은 물론 상인이나 소천교에 참가하기 위해 모였던 권세 가문의 사람들 또한 모두 영내에 갇힌 신세가 되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불만을 표하지는 못했다.

 

후에 책임을 묻는 한이 있더라도,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삼엄한 위세에 질려 버린 것이다.

 

물론 그들의 소리가 모이면 설령 조르디가라고 한들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가만히 몸을 웅크리며 거대한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다소 강압적일 수 있는 조르디가의 행사에도 협조적이었다.

 

슐츠 조르디라는, 소우든 최고 권세가의 가주임과 동시에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무인이기도 했던 남자의 죽음에 다들 애도를 표하며 한 걸음씩 양보해 준 것이었다.

 

아무튼 누군가 거대한 설계를 짜 두기라도 한 듯, 상황은 긴박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헤스갈은 다시금 모인 장로들 앞에서 한 가지 사실을 공표했다.

 

심문을 통해 안톤이 슐츠의 암살 사건을 인정하였고, 단독 소행이 아니라 암검 온-누르가 그 과정에 가담했다는 사실까지 자백했다는 것이다. 미리 만들어 두기라도 한 것처럼, 신상명세가 샅샅이 적힌 온-누르의 수배지와 그를 상대하기 위한 특별 전담 부대가 창설됐다.

 

그렇게 온 거리를 헤집으며 온-누르의 수색에 일념하길 일주일.

 

아직까지 온-누르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결국 이미 영내를 벗어났다는 결론이 내려지며, 더 이상 물밀듯 쏟아지는 불만들을 버티기 힘들어진 이때.

 

조르디가의 봉쇄령은 끝이 났다.

 

그리고 동시에 안톤의 처형이 결정됐다.

 

 

* * *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면 미련하게만 보일까 싶지만,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안톤 또한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 누명을 썼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하지만 누가?’

 

문제는 그 누군가의 정체와 그 연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건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건 잘 짜인 거대한 판이었고, 그저 아무나 적당한 희생양으로 자신이 선택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대체 얼마나 지난 거지?’

 

한 달? 아니면 일주일?

 

모르겠다.

 

이곳에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확인하기는커녕, 시간을 측정할 기준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겨우 하루 이틀 정도 지났을 뿐인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아닐 터였다.

 

그간 느낀 공복감과, 이 단어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심문관이 가져다준 음식의 주기를 고려하면 적어도 며칠은 지난 듯했으니까. 무너질 대로 무너진 의식 속에서도 안톤은 최대한 이성을 찾으려 애썼다.

 

‘정말 망가질 대로 망가졌군.’

 

이 한 줌의 빛도 없는 공간 속에서 사지가 결박된 채로 지내다 보니 감각이 무뎌지고, 모든 기준들이 모호해졌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귀로는 어떠한 것도 들리지 않는다.

 

퀴퀴하고 역겨운 악취에 적응된 코로는 무엇도 맡아지지가 않는다.

 

어떻게든 정신을 열고, 의식을 붙잡으려 해 보아도 쉽지가 않았다.

 

강철 같던 그의 의지가 잘게 잘게 부서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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