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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3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7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32화

032. 암막

 

 

클린턴이 온-누르와 안톤이 기거하는 별채를 찾아온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꽤나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안톤이 가당찮은 사유로 예선에서 탈락하고 소천교에서 우승자가 정해졌다. 우승자는 조르디가의 소공자 헤스갈이었고, 마지막 대전 상대는 에스닌 공녀였다.

 

안 그래도 지고하던 조르디가의 위상을 한층 더 높여 주는 사건이었다.

 

‘언제 그렇게 실력이 는 건지.’

 

원래 에스닌 공녀의 실력이었다면 결승전까지 진출하는 것은 무리였겠으나, 그녀는 대전장에서 그녀만의 오러를 뽐냈다.

 

1년 사이 깨달음을 얻어 화경에 접어들었다는 뜻이었다.

 

조르디가의 장남과 장녀.

 

그 둘이 모두 이십 대 초반에 화경에 이르는 성취를 내었기에, 그다음으로 어린 린디아스에게 좌중의 관심이 쏠렸다.

 

허나 그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슐츠가 린디아스가 혼외 자식이라 말하는 것으로 인해 순식간에 다른 종류의 관심으로 변질됐다.

 

“혼사라…….”

 

그 위세 좋은 조르디가와 직접적인 혈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많고도 많은 권세가에서 조르디가에 혼담을 넣어 댔다.

 

소우든의 미혼 남성이 모두 모인 것 같다고 온-누르가 농담식으로 말했을 정도로 많은 수였다.

 

허나, 이상하게 안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쩌면 핫산 왕자와의 대화로 자신이 본질적으로 원하는 것을 재차 상기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모든 걸 손에 쥘 수는 없다.

 

안톤은 자신의 소망과 린디아스가 그 근본부터가 상반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간 린디아스에게서 편안함을 느꼈던 건 맞다. 전혀 다른 일면들을 하나씩 보아 가며 여인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린디아스가 안톤에게 잘해 주었기에 일시적으로 느낀 감정일 뿐이라고, 안톤은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일축했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다른 고민도 있었다.

 

며칠 동안 매일같이 찾아와 자신을 귀찮게 하는 핫산 왕자에 대한 고민이었다.

 

“친구라…….”

 

수련을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안톤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왜 또 같은 나이인 건지.’

 

우연찮게도 핫산 왕자와 안톤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핫산 왕자와 격의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둘 사이엔 나이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신분의 간극이 존재했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안톤이 그를 친구로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안톤은 친구라는 단어와 우정이라는 감정을 모르고 지내왔으니까.

 

‘그나저나 열일곱이라…….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군.’

 

열두 살. 검투사 양성소 생활 당시로 회귀하고부터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조차도 이번 가을과 겨울이 지나가면 열여덟이 된다.

 

“머지않았어.”

 

처음, 온-누르가 안톤을 제자로 삼을 당시에 그는 10년 안에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즉 온-누르는 안톤이 10년 안에 신안을 개방해 노예각인마법에서 해방되리라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안톤의 성취가 예상보다 빨랐기 때문일까?

 

지난날, 핫산 왕자와의 대화에서 온-누르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3년은 더 가르칠 게 남았다고 말이다.

 

‘열심히 해야겠지.’

 

오늘도 안톤은 별채에 위치한 후원에서 땀을 흘렸다.

 

이 땀이 언젠가 자신의 자유를 이뤄 줄 것이라 여기며.

 

‘이제 슬슬 핫산 왕자가 올 시간이군.’

 

 

* * *

 

조르디가의 성채 뒤쪽 인적 드문 곳에는 작은 숲이 하나 있다.

 

나무를 옮겨다 심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숲이다. 그리고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 숲에는 전대 가주 가우스트 조르디가 기거하는 비밀 가옥이 위치하고 있다.

 

온-누르는 전대 가주의 서신을 받고 그리로 향하는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연못과 이에 어울리는 한 채의 별장이 나타났다.

 

조르디가의 전대 가주로서도,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던 그 가우스트의 거처라고 하기엔 다소 무색한 감이 없잖아 있는 소박한 저택이었다.

 

온-누르가 후원에 들어서는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는가?”

 

손수 문을 열며 온-누르를 반긴 것은 다소 초췌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들어오시게.”

 

노인은 머리는 며칠이나 감지 않은 듯했고, 길게 뻗은 백발은 뒤로 넘겨 끈으로 묶고 있었다. 온-누르는 그 노인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 혼자 사는 별장이라기엔, 내부는 제법 깔끔했다.

 

청소라든가 밥을 지어서 먹는 거라든가. 평소에도 혼자서 해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소동이라도 하나 두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직은 내 스스로도 충분히 할 수가 있는데, 무엇하러 그러겠는가.”

 

부엌으로 향한 가우스트가 김이 솔솔 올라오는 물 주전자를 들고 왔다.

 

“이쯤 올 줄 알고 미리 끓여 놓았네. 차는 뭘로 할 텐가?”

 

“저는 괜찮습니다.”

 

“자넨 아직도 예전 버릇이 남았군.”

 

조르디가의 밀암무사로서 보냈던 시절을 말하는 것이었다.

 

문득 오래전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자 온-누르가 얼굴에 쓴 미소를 내걸었다. 잠시 처연하게 그를 바라보던 가우스트가 장내를 환기시켰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그렇게 내게 딱딱하게 굴 건가? 이제 나도 자네도 뒷방 늙은이 신세인데.”

 

“아직 갚을 은혜가 많이 남았습니다.”

 

온-누르의 대답은 여지를 남기지 않을 만큼 단호했다.

 

“쯧쯧. 자네도 참 어렵게 사는군. 누구보다 자유롭길 원하면서, 쓸모없는 것에 괜히 얽매이고 있어.”

 

온-누르가 암중에서 가우스트를 보필한 것이 수십 년이 넘는다. 서로 겪을 만큼 겪어 왔기에 그 누구보다도 서로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가우스트는 온-누르가 조금은 가여웠다.

 

“쓸모없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어인 일로 부르신 겁니까?”

 

가우스트가 마음속에 남은 동정을 깔끔하게 지워 냈다. 그리고 젊을 적의 어느 날처럼 은은한 미소를 꺼냈다.

 

“평소와 같지 뭐……. 그냥 바깥 얘기나 들어 볼까 해서 불렀네.”

 

“저도 그리 바깥 사정에 밝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여기 박혀 있는 나보단 낫지 않겠나?”

 

그건 그렇다는 생각을 하며, 온-누르와 가우스트는 천천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제자, 안톤을 키우는 이야기서부터 시작해 조르디 가문령에 도는 소문이나, 정세에 관한 것들까지 주제를 가리지 않았다.

 

“자넨 참 많이 변했군.”

 

“그렇습니까?”

 

제자의 이야기를 할 때면, 온-누르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감돈다.

 

가우스트는 그 사실이 못내 어색하면서도 부러웠다.

 

“그나저나 안톤이라고 했나? 자네 제자 말일세.”

 

“예.”

 

“어느 정도인가?”

 

두서없는 물음이었으나, 온-누르는 그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했다.

 

안톤의 무위를 묻는 것이었다.

 

“1대1로 싸운다면 헤스갈 님은 분명 이길 수 있을 겁니다.”

 

확신이 담긴 단언에 가우스트는 턱을 짚었다. 뭔가 깊게 생각할 때마다 내비치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음……. 내 손자 놈이 화경의 지급까진 올랐다고 그랬지?”

 

“제가 보기론 그랬습니다.”

 

“자네가 그리 봤다면 분명 그런 거겠지. 자네 제자의 나이가 몇이라고 했지?”

 

“열일곱입니다.”

 

“그러면 내 손녀보다는 두 살 어리군?”

 

온-누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살이라 하였으니 린디아스 공녀를 말하는 것은 틀림없는데, 갑자기 왜 그런 화제로 넘어갔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렇지요.”

 

“성품은 어떤 것 같나?”

 

안톤의 인간성을 확인하려는 가우스트의 모습에서 온-누르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했다.

 

“혹시…… 제자 녀석과 공녀님을 엮어 주시려는 겁니까?”

 

“얘기를 들어 보니 나쁘지 않게 들려서 말이네. 그냥 우리 대에서 우리의 인연이 끝나는 것도 애석한 일이기도 하고. 애써 키운 제자를 남에게 줄 바에는 그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나?”

 

온-누르는 잠시 안톤과 린디아스 공녀가 맺어진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 나쁘진 않았다.

 

안톤의 실력은 점점 늘어 갈 것이니 분명 언젠가 조르디가에 큰 보탬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제자라는 직함과 공녀의 남편이라는 배경을 토대로 한다면 조르디가에서 입지를 다져 출세하는 것도 수월할 테고 말이다.

 

누구든 부러워할 영예롭고도 안정적인 생활임에는 틀림없다.

 

혹시 그렇게 된다면 그 둘의 아이를 자신이 안아 보는 날이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회의적인 온-누르의 대답에 가우스트가 눈썹을 찌푸렸다.

 

“슐츠나 장로 놈들이 문제라면 내가 나서서 조율할 수 있네. 아직 그럴 힘은 남았어.”

 

“그게 아니라 제 제자 놈의 문제입니다. 그 녀석이 받아들일 것 같지가 않군요.”

 

“왜? 뭐가 문제인데 말인가? 저번에 듣자 하니 그놈도 넬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결국 스스로 쳐 낼 겁니다. 절 많이 닮은 놈이니까요.”

 

그 한마디가 묵직하게 다가온 것일까.

 

“음……. 그런가? 아깝게 됐군.”

 

잠시 말을 삼킨 가우스트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이에 대한 잡담은 이제 끝이라는 듯, 가우스트의 눈매가 순간 날카롭게 변하였다.

 

“그나저나 내가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는가? 사실이었는가?”

 

“……아직은 확언을 할 단계는 아닙니다. 지켜보고 있는 중이지요.”

 

몇 달 전, 온-누르를 호출한 가우스트는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조르디가 내부에 변절자가 있는 것 같다며, 그걸 조사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온-누르는 매일 밤 밤이슬을 맞으면서까지 그 약속을 성실히 이행했다.

 

확실히 신경을 쓰고 살펴보니 가문 내에 이상한 암운이 돌고 있었고, 실제로 몇몇의 변절자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 수가 한둘이 아니었고, 심지어 장로들 사이에도 섞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가우스트는 한 가지 부탁을 더 했다.

 

조르디가의 현 가주.

 

슐츠에 대해서 유심히 살펴 달라고 한 것이다.

 

“자네가 더 잘 알아봐 주게. 부탁할 게 그대밖에 남지가 않았어.”

 

“물론입니다.”

 

한때 열을 다해 모셨던 자의 초라한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진 온-누르였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자네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해 놓고 있게.”

 

준비라는 단어에서 피 냄새가 맡아진다.

 

지금에야 일선에서 물러나 은거 생활을 하고 있지만, 과거 가우스트는 명실상부 대륙제일의 검사였다.

 

“썩어 빠진 장로 녀석들은 몰라도, 슐츠 님은 절대 아닐 겁니다.”

 

“그렇길 바라야겠지.”

 

그렇게 말하는 가우스트의 눈에는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친아들을 의심하는 심정이 어떨지, 온-누르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 * *

 

하인들조차 모두 잠이 든 야심한 밤.

 

웬일로 가주전의 불빛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평소 같았으면 장로들로 북적했을 이곳도 한 사람을 제외하면 텅텅 비어 있어서 공허했다.

 

그 한 사람이란 조르디가의 가주, 슐츠 조르디였다.

 

그는 홀로 자신의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무언가 일이 밀려 업무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슐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사삭.

 

그때, 슐츠가 앉은 곳에서부터 제일 멀리 떨어진 출입구 쪽 가장자리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어둠이 시작되기라도 하듯, 이어서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평범한 사람의 보폭 정도의 속도로 어둠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말의 시간이 지나자 환하던 가주전의 절반이 어느새 어둠으로 물들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슐츠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어둠과 대화라도 하듯이 그가 입을 열었다.

 

“블라디미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혼잣말은 결코 아니었다.

 

사삭.

 

누군가 한 발자국 내딛기라도 하듯, 어둠이 다가왔다.

 

“비천한 이념을 앞세워 과분한 목적을 이뤄 내려는 미친놈들이 있다고 소문으로는 들었다. 그리고 감히 우리 가문을 노리려고 한다는 것도.”

 

사삭.

 

“살아서 돌아가진 못할 거다.”

 

슐츠가 무릎 앞에 정리해 둔 자신의 애검을 치켜들었다.

 

“과묵해 보이지만, 모든 걸 샅샅이 고해 내게 해 주마.”

 

그리고 가주전에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다.

 

사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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