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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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31화
031. 왕자
“으음.”
잠깐 침음을 흘린 클린턴이 대치 중인 안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예전에도 그러했지만, 이번에 역시 별다른 기세는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마나 연공법은 익히지 않았어.’
암만 마나 연공법이 비전이라고 하나, 무려 스승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다.
연공법을 배우지 못해 익히지 않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외공이라고 하기엔, 동생 헤일스의 검을 반쪽 내 버린 근원 모를 힘이 걸린다.
‘역시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검리인 것이 틀림없어.’
클린턴은 증거만 명확하다면, 새로운 것을 인정할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다.
지금에서야 만인의 상식이 되었다곤 하나, 결국 마나 또한 그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 못 할 종류의 힘이었을 테니까.
‘이 또한 그러한 것일지 몰라.’
그렇다면 이들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구자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난 대륙의 역사는 그런 선구자들의 발자국으로 진화해 왔다는 걸 클린턴은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난 그 발자취를 바로 코앞에서 보고 있는 걸지도…….’
조금은 흥분한 것일까.
호흡이 조금 거칠어지고, 몸은 기분 좋게 달구어졌다.
클린턴은 자신의 애검을 쥔 손잡이에 힘을 더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최대한 감정을 죽이고 던진 정중한 물음에 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린턴은 들뜬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 사정해서 단 한 번. 일전에 보았던 검을 직접 대면해 볼 수 있게 된 것뿐이지, 이건 대련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안톤이 눈을 감는다.
순간 제대로 할 마음이 없는 것인가 싶었지만, 이내 무언가 규정할 수 없는 기세가 육감으로 잡혔다.
그것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누군가 클린턴에게 그 감각에 대해 묘사해 보라고 한다면 단 한 줄도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이건…… 굉장히 위험하군.’
분명 겉보기에는 어떠한 기운도 작용하지 않은, 평범한 철검일지언데. 압도적으로 예리한 기운이 소스라친다.
문득 클린턴의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무지란 필연적으로 공포를 동반한다.
하지만 클린턴은 외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처음 보는 형태의 검학이 자신이 벽을 넘는 데 있어 도움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클린턴은 전신전력을 다해 검에 오러를 발현했고, 그 위로 겉으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안톤의 검이 휘둘러졌다.
솨아아아.
일격을 나눈 이후, 후원에는 바람 스치는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안톤의 일검을 받은 클린턴은 입을 꾹 다물고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감사…합니다…….”
결국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한 표정이었다.
클린턴은 무언가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너무 심한 무례라는 생각에 그 욕심을 자제했다.
안톤도 그를 따라서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약간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완전히 베어 내지 못했어.’
검날이 검면의 절반을 넘게 파고들었지만, 단번에 끝까지 베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혹시 클린턴이 무인으로서 완성되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이런 감정은 사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클린턴은 아직 오러 유저의 경지이다.
‘아직 멀었다는 걸까.’
아니면 마스터의 경지가 아닌 한,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던 온-누르의 단언이 틀렸던 것일까.
아니 설령 그렇다 한들, 자신이 아직 갈 길이 한참이라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클린턴은 반쯤 부러진 검을 소리 없이 검집에 도로 집어넣고는 안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척 내밀었다.
잠깐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안톤이 그 행동을 이해하고는 마주 잡았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훈훈한 광경이 연출되던 때.
짝짝짝.
큼지막한 박수갈채 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주목시켰다.
클린턴과 동행한 십 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대단하군! 암만 봐도 내 또래로 보이는데, 그 나이에 벌써 제오르 경의 검을 베어 낼 성취라니, 정말 놀라운 일이네!”
“아. 그러고 보니 이분의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해린의 2왕자 핫산 님이십니다.”
클린턴의 소개에 온-누르와 안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그런 반응이 멋쩍은지, 2왕자 핫삿이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큼큼. 핫산 헤이젤 에르단이라고 하네.”
“2왕자……? 그런 분이 여긴 왜…….”
“지나가는 길에 외가에 들른 것이 그렇게 이상한가?”
“외가라면……?”
안톤의 의문은 온-누르가 대신 해소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조르디가와 해린 왕실 간에 혼사가 진행된 적이 있었지.”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을까.
온-누르가 옛 기억을 되짚으며 말했다.
“카놀라.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맞소. 바로 그분이 내 어머님 되시는 분이오. 하하!”
“그러고 보니 눈매가 쏙 닮았구나.”
“그렇소이까?”
무려 왕족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거침없는 하대라니.
온-누르의 행동에 안톤이 질색을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정작 핫산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핫산은 외려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여기서 우리 어머님을 기억하는 사람을 뵙게 되다니 기쁘구려. 헤스갈 공자나 에스닌 공녀는 제 어머님을 알지도 못해서 조금은 서운하려던 찰나였는데.”
“슐츠 님은? 슐츠 님이라면 분명 기억할 텐데?”
“저번에 한 번 인사는 드렸지만, 그리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소이다. 오늘 다시금 독대할 예정이었지.”
“그렇군. 그나저나 해린이라면 펭 제국의 정반대에 위치한 나리인데, 어째서 그치들과 동행을 하고 있는 것이냐?”
점입가경이라고.
마치 따지기라도 하는 듯한 어조였다.
도대체 조르디가의 가주나, 그 후손들에겐 따박따박 존칭을 하면서 왜 정작 왕족에겐 이토록 가볍게 대하는 것인지.
안톤은 도통 그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남의 나라이니 상관이 없다는 건가?’
정말 그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이런 걸로 외교적인 문제가 빚어지게 되는 건 아닌지 고민이 들 정도였으나,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숙식을 이곳에서 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조르디가의 식솔도 아닌데 이런 일에 노심초사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제일 이상한 것은 유유자적한 핫산 왕자의 태도였다.
“펭 제국 황실 연회에 초대되어 자리에 참석했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오. 여기 제오르 경은 그 여정까지 날 호위하기로 해 주었고.”
본신의 안위를 타국의 기사에게 맡긴다는 부분에서 약간의 위화감이 있었으나,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다.
“아무튼. 자네는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내가 무술에는 문외한이지만, 정말 놀라운 검이었네!”
“안톤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성이 없다고? 으음.”
잠깐 턱을 짚고 고개를 갸웃하는 핫산에게 클린턴이 미약한 목소리로 무언가 속삭였다.
들리진 않았지만, 아마도 안톤의 신분을 설명하는 듯했다.
“그렇구만. 노예라도 이미 해방되었으면, 노예가 아닌 게지! 별로 마음에 두지 말게!”
애써 귓속말을 한 보람이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여태까지 이런 일이 꽤나 자주 있었는지 클린턴은 잠시 골머리를 짚을 뿐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핫산이 안톤의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도대체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 거지?’
핫산은 난생처음 대하는 부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저 성격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신분도 신분인지라 대하는 게 어려웠다.
“그건 그렇고, 혹시 안톤 그대는 날 따라올 생각이 없는가? 내가 이렇게 보아도 일단 일국의 왕자네! 물론 두 번째이긴 하지만! 하하하!”
말에 뼈가 있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대화 내내 웃는 얼굴을 하면서 농담 투로 던진 핫산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절로 묻어나고 있다.
“응? 대우는 잘해 주겠네.”
은근한 물음을 계속해서 던져 오는 핫산을 만류하고 나선 것은 클린턴이었다.
“왕자님, 너무 급하십니다. 아직 초면이지 않으십니까.”
“아니, 이미 한 번 대면해서 통성명까지 했는데 뭐가 초면이란 말인가?”
그런 억지식 대꾸에 클린턴이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특유의 껄껄 웃음을 지으며 온-누르가 나섰다.
“이것 참 재미난 녀석이군!”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지만, 아무래도 온-누르는 핫산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어, 노인장. 그러면 안톤을 내게 주는 거요?”
노인장이라니.
안톤과 클린턴은 동시에 온-누르의 눈치를 살폈다.
어떤 반응을 할지가 궁금해서였다.
조금 기분이 나쁜 내색을 할까도 싶었는데, 온-누르는 안톤이 본 어느 때보다 큰 소리로 웃었다.
“껄껄껄! 이거 참 물건이군그래. 이제 보니 눈매 말고도 카놀라 님의 넉살 좋던 그 성격도 그대로 물려받았구나.”
“그런 말은 꽤나 자주 듣소이다. 하하하!”
“그래도 안톤은 안 된다. 아직 가르칠 게 많이 남았어.”
“얼마나 남았기에 그러오?”
“음. 적어도 3년? 검술이나 보법 등 아직 가르칠 게 많아.”
“그럼 다 가르치고 나서는 내게 보내줄 수 있소?”
마치 시장 물건을 흥정하는 투의 대화가 이어지자 안톤은 어이가 없었다.
“글쎄. 그건 이놈 마음에 달렸지.”
“음…… 그럼 안톤의 마음을 사야 하겠구려. 그래, 얼마면 되는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어찌 보면 핫산의 말은 노예로 살아온 전적이 있는 안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무례한 말이었지만, 안톤은 썩 기분 나쁘게 들리진 않았다.
악의가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이 언행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럴 땐 오히려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산이었을까.
자칫 무안할 수도 있는 즉답에도 핫산은 또다시 그만의 호방한 웃음을 내질렀다.
“딱히 돈이 아니어도 되네. 그럼 원하는 걸 말해 보게.”
바라는 것이 뭐든지 자신은 들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원하는 거라…….”
잠시 안톤은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가볍게 던진 핫산의 물음이 안톤에겐 큰 고민으로 와 닿은 것이었다.
“그래. 그대도 사람이라면 원하는 게 하나쯤은 있을 것 아닌가?”
맞는 말이었다.
만사에 달관한 현자라면 모를까.
사람인 이상, 욕망이 없을 수 없다.
온-누르는 제자인 안톤이 새로운 검학을 정립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후일 검을 완성한 안톤이 자신을 패배시킨 남자를 상대로 승리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린디아스는 명문 무가의 자녀로서의 어엿한 무인보다는 그저 소박한 삶을 추구한다.
앞에 있는 클린턴 제오르는 벽을 깨고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곳까지 찾아와 안톤에게 고개를 숙였고, 하다못해 길거리에 마주친 인파들조차 저마다의 목표가 있다.
‘그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뭐지?’
생각을 이어 가던 중에 잠깐 실소가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검과…… 자유.’
검을 휘두르는 건 즐겁다.
수련 속에서 성취를 얻어 자신이 보다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건 더 즐겁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안톤은 힘이 없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제든지 상황이 변할 수 있는, 일시적인 상태일 뿐이라는 관념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나쁜 길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콜로세움을 탈출할 당시 온-누르에게 무력적으로 굴복당하며 그 생각은 보다 깊어졌다.
길었던 생각이 끝이 났다.
사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는 과정이었다.
“아무래도 왕자님께선 제가 원하는 걸 주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음……. 그런가? 그거 아쉽게 됐군.”
보다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 같던 핫산 왕자는 그의 예상과 다르게 호쾌히 물러났다.
낙심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니네.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걸 채워 줄 수 없다니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렇게 이 이야기는 완전히 끝이 나는 듯하였다.
“하지만 신하 관계가 아니라, 그냥 친구는 괜찮겠지?”
“예?”
“내가 조르디가를 떠나기 전까지 그냥 말동무나 좀 해 달란 말이네. 혹시 그것도 싫은 건가?”
“하지만…….”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받아들이겠네. 그래, 친구가 되려면 일단 이것 먼저 물어봐야겠지.”
악동의 얼굴을 한 핫산 왕자가 눈을 빛냈다.
“자네는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