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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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71화
071. 격돌
콰콰콰콰콰앙!
가우스트가 휘두른 일격에 굳건하던 성문이 조각나며 무너져 내린다. 응축된 강철조차 베어 내는 그의 검 앞에서 사실 목재로 만들어진 성문은 의미가 없었다.
성문이 뚫리기가 무섭게, 가우스트는 잔해 위를 넘어갔다.
백주대낮에 벌어진 습격에 성문 보초들이 기겁하며 제각기 검을 빼 든다.
“적이다!”
“막아라!”
그들은 이미 조각난 성문을 대신해 길목을 막아섰지만, 물밀듯 돌진하는 수백의 검사들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댕댕댕!
비상 상황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이제 적들도 기습을 알았으니, 본대가 이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가장 선두에 선 가우스트가 적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며 기를 실어 외쳤다.
“뚫어라!”
“우아아아아아!”
적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까지 검의 제단에 도착하는 것이 1차 목표다.
그러니까 서둘러야 한다. 지금 이 순간순간에도 적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길을 막아서는 자들과, 이를 뚫으려는 자들의 격돌.
검과 화살이 날아들며, 피와 비명이 난자한다.
가우스트가 선두에서 열심히 길을 열고 있었기에, 쓰러지는 자들의 수는 아군보다는 적들이 월등히 많았다.
다만.
“부상자는 두고 간다!”
적들과 달리 부상자들을 챙길 여유가 없는 것은 이쪽이었다.
“됐어, 날 두고 가!”
이름도 모르는, 안면 없는 검사 하나가 동료들을 향해 소리친다.
그의 복부에는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다. 내장을 건드렸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치료만 제 시기에 한다면 분명 살릴 수 있는 부상이었다.
“젠장!”
살릴 수 있는 동료를 험지에 버려두고 간다는 것.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톤과 달리 그들에겐 몇 년을 함께한 친구이자 동료일 테니.
허나 대의를 위해서, 그들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이동하는 병력에 뒤처지지 않게 쫓아갔다.
“이런 건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품에 안긴 린디아스가 손으로 안톤의 옷깃을 꾹 눌러 잡는다. 그녀의 동공은 여린 손만큼이나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선 첫 대면 때의 당찬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는 억지로 꿋꿋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을 뿐, 이게 그녀의 진짜 모습인가?’
하기야 그러니 검사의 길을 포기한 것일 테지.
참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잔혹함이 싫어 모든 걸 포기했는데, 세상이 다시 그녀를 악다구니 속으로 불러왔으니.
“익숙해질 필요 없소.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버티기 어렵다면 제단에 도착할 때까지 눈이라도 감고 있으시오.”
“아뇨. 그러진 않을래요.”
안톤은 별말을 더 하지 않고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부대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빠르게 발을 옮겼다. 그들은 가장 안전한 후열 중앙 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안톤이 오늘 해야 할 임무는 딱 하나다.
후방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다가, 단숨에 린디아스를 제단까지 데리고 가는 것.
이를 위해 안톤은 옆에서 아군이 죽어 나가도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달려라!”
그야말로 폭풍 같은 군세랄까. 수백의 병력이 움직인다고 하기엔, 아주 빠른 이동속도였다.
병력은 단숨에 검의 제단이 위치해 있는 숲가까지 진격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작은 숲.
그곳에 발을 들이밀고부터는 오히려 적의 방해가 적어졌다. 추격하던 적들도 멀리서 화살을 쏘아 댈 뿐이지, 직접적으로 길을 막아서진 않았다.
“방심하지 마라!”
허나 그 사실에 안심하기보단 외려 경계심과 긴장감을 키우며 조심스레 숲을 헤쳐 나갔다.
아주 작은 숲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지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은 원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두막과 그 옆에 마련된 작은 연못은 여전했으나, 그 주변에 무성하던 나무들은 모조리 베어져 있었다.
옛날에 비하면 상당히 휑해졌지만, 한적하다는 느낌은 없다.
그 앞에 가득한 수백의 검사들이 이글거리는 눈빛을 뿌려 대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군.”
단순히 혼잣말을 내뱉은 가우스트였지만, 대답이 들려왔다.
“당연히 이쪽으로 올 줄 알았지.”
적들 무리 가운데서 한 인물이 앞으로 나왔다. 백무대주 카트락시아였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은색 머리카락과 함께 왼쪽 소매가 맹렬히 나부끼고 있었다.
득의양양한 얼굴인 그녀를 보면서도 가우스트는 별다른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얼굴로 좌중을 한 번 더 쭉 훑었다.
양측 모두 다분히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이나 아군이나 숫자는 엇비슷했다.
허나 보다 유리한 것은 상대 쪽이라 할 수 있었다.
조르디가의 성채는 그들의 본진이라 할 수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적의 숫자는 점점 늘어날 테니까.
아마도 이미 숲 밖에서는 서서히 포위가 시작되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가우스트가 홀로 한 걸음을 내딛자 양측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도합 칠팔백가량의 인파가 모였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정적인 분위기. 공기 중에 잔뜩 실린 긴장감엔 살이 베일 듯 날이 서 있었다.
가우스트는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내 열린 그의 입으로 퍼진 쩌렁쩌렁한 외침이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돌격!”
겨우 짧디짧은 하나의 단어였을 뿐, 별다른 미사여구는 없었다.
장대한 말들은 앞서 연설에서 모두 했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단 것일까.
아무튼 가우스트의 외침을 기점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우아아아아!”
양 병력이 부딪친다. 서로의 전력은 비슷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분일초가 다르게, 한 생명이 불같은 피를 뿜어내며 꺼지고 있다.
가우스트는 그 전장 한복판에서 앞서 검을 휘둘렀다.
휘황찬란한 그의 황금빛 오러를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혼잡한 전장이었으나, 그의 주변으로 원 형태의 공백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그리고 그 반경에 카트락시아가 난입했다.
“당신은 나랑 놀아야지?”
“팔 한쪽으로 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럴 줄 알고 한 명을 더 모셔 왔지.”
태평스러운 그녀의 표정에 가우스트의 미간이 좁혀진다. 그리고 그때였다.
가우스트의 그림자 위에서 무언가 검은 형체가 빠르게 솟구쳤다.
“읏!”
불시의 일격.
가우스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고, 예리한 단검이 그의 목덜미에 작은 혈선을 그리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휙!
검을 휘둘러 적을 밀쳐 낸 가우스트는 그제야 검은 형체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날렵한 체격을 지닌 복면의 사내였다.
‘살수 출신인가?’
그것도 아주 뛰어난 살수.
과연 카트락시아가 저렇게 자신만만할 정도로 한몫은 톡톡히 해낼 실력자였다.
‘조금, 아니 꽤나 어렵겠군.’
허나 가우스트는 웃었다.
애초에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전투의 승리가 아니었다.
제단으로 침투해 검령을 흡수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안톤이 린디아스를 제단 안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오늘 가우스트의 역할이었다.
그러니 이거 참 잘된 일이다.
가장 큰 방해 거리인 둘이 제 발로 이곳으로 와 묶였으니.
가우스트는 그렇게 살짝 실웃음을 내지었고, 그 모습이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이라 여긴 카트락시아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나도 어지간히 얕보인 모양이네. 빌어먹을 자식들.”
욕지거리를 내뱉는 그녀를 보며 가우스트가 사족을 붙였다.
“얕보는 건 아니네만…….”
이 말은 사실이었다.
카트락시아만 해도 슐츠에 이어 온-누르를 상대로 승리했고, 더군다나 안톤과의 전투 때에는 괴물로 변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 파괴만이 지나간 현장을 가우스트는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런데 의문의 사내까지 껴 있는 지금, 감히 얕잡아 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다행이라곤 생각하네.”
“그게 무슨 소리지?”
영문 모를 말들에 찜찜한 표정을 짓는 카트락시아였으나, 가우스트는 그녀의 의문을 해소시켜줄 마음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될 듯하네. 그럼 시작하지.”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그를 보며, 카트락시아는 진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건 마치 싸우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조급해 보이지 않는가.
‘뭐지……?’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일 대 이의 상황 속에서 가우스트가 선공을 취한 것이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한눈팔지 말고 덤벼라!”
가우스트의 검을 피해 뒤로 물러난 카트락시아의 눈빛이 변했다.
비록 미심쩍고 수상한 점들이 남았지만, 그의 말대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상대할 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로푸스! 합공이에요!”
“…….”
복면 사내는 허리춤에서 단검 하나를 더 꺼내 손에 쥐며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전에 함께 전투를 치러 본 경험은 없었으나, 둘의 호흡은 괜찮은 편이었다.
복면 사내의 움직임은 현란하면서 날카로웠다. 그가 앞에서 시선을 분산시키면, 카트락시아는 빈틈으로 묵직한 일격을 날렸다.
가우스트는 금방 수세에 몰렸다.
그의 몸에도 잔상처들이 즐비하기 시작했다. 허나 그는 결코 치명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었군.’
카트락시아는 눈앞의 사내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어느덧 시간이 꽤나 흘렀다. 아무리 자신이 한쪽 팔을 잃었다 한들, 이 대 일인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잘 버텨 내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가우스트는 단순히 강할 뿐만 아니라, 전투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다.
살을 내주되 절대 뼈는 내주지 않는다.
순간순간의 판단이 삶의 기로를 결정하는 찰나에서도 가우스트는 늘 옳은 판단을 내렸다.
물론 가우스트가 수비에 중점을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싸웠다면 어느 쪽으로든 이미 결판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을 이곳에 묶어 놓는 것이 사명인 사람인 양, 수비적인 형세를 일관했다.
‘잠깐만……. 묶어 놓는다고?’
스치듯 지나간 의심이었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카트락시아는 대뜸 뒤로 물러난 뒤 곧장 공중으로 도약했다.
전장의 형세가 훤히 보일 정도로 탁 트인 시야.
피와 시체가 난자하는 혼란이 가득한 지상. 특이점이 하나 있었다. 전장의 외곽 부분이었다.
하나의 인형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길을 열어 내고 있었다.
카트락시아는 월등한 시력으로 그의 얼굴을 확인하곤 크게 놀랐다.
“아니, 저 녀석은?”
설마 그 부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건가!
2공녀 린디아스를 품에 안고 전장을 헤치는 안톤을 보는 순간, 카트락시아는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낭패한 얼굴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수십 미터 상공이었지만 그녀의 발치에 어느새 따라온 가우스트가 있었다. 카트락시아는 바로 그 아래에 뒤따라온 복면 사내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로푸스! 그를 막아요!”
“…….”
복면 사내가 가우스트의 다리를 발로 잡았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기운을 내뿜는 단검으로 이를 긋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챙!
가우스트도 어쩔 수 없이 카트락시아를 노리려던 검으로 이를 막아 내야 했다.
이윽고 도약력이 한계점에 도달한 그들 셋이 지상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도 가우스트는 카트락시아를 잡기 위해 몸을 틀었고, 복면 사내는 끈질기게 가우스트를 노리며 이를 방해했다.
발 디딤대가 없는 공중에서도 이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몸의 균형을 잡아내며 전투를 치러 내고 있었다.
쿠웅!
가장 먼저 몸을 날린 카트락시아가 그들 중 첫 번째로 지상에 내려왔다.
그녀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자리를 박차며 다시금 도약하려 했다.
“보낼 것 같으냐아아!”
검을 역수로 쥔 가우스트가 카트락시아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낙하의 충격이 더해진 흉폭한 기세의 금빛 오러에 닿는다면, 아무리 그녀라 할지라도 큰 부상을 입으리라.
그녀로서는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
가우스트의 뒤쪽에서 묵묵히 떨어져 내리던 복면 사내는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주문을 읊조렸다.
낡은 시계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순간.
콰아아앙!
무언가 검 끝에 막힌 감촉이 손을 타고 전해진다.
충격파로 인해 먼지구름이 크게 피어났지만, 가우스트가 앞을 분간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로푸스라는 이름의 복면 사내는, 원래 카트락시아가 있던 자리에서 양손에 쥔 단검을 십(十)자 형태로 교차하며 검 끝을 막아 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마치 마법이라도 사용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
시간의 간극 속에서 피어난 의문은 해소될 여지없이, 보다 큰 의문에 잡아먹혔다.
‘카트락시아는 어디로 사라졌지?’
가우스트는 문득 어깨에서 느껴진 충격에 고개를 들었다.
광활한 하늘의 풍경 대신, 자신의 몸을 밟고 지나가는 카트락시아가 보였다.
“고마워요, 로푸스!”
툭!
이윽고 그녀의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에 낡은 회중시계 하나가 사뿐히 떨어진다.
바닥에 닿은 시계는 뿜어내던 빛이 사그라들더니 이내 먼지처럼 바스러져 바람에 흩날렸다.
‘마령구인가.’
어떤 마법 주문이 각인된 마령구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효능으로 카트락시아가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놓치고 말았군.”
당장 뒤따라간다면 쫓아갈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이 복면 사내 역시 진득하게 따라와 방해할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다. 이제 뒷일은 안톤에게 맡길 수밖에.
가우스트의 굳게 다물린 입에서 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아나, 자네?”
“…….”
“초지일관 묵묵한 친구구먼그래.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마시게.”
“…….”
복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날렵한 몸짓으로 거리를 벌린 후, 다시 싸울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