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70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70화
070. 결전
안톤이 의식을 되찾은 다음 날.
아침부터 린디아스가 불쑥 찾아왔다.
“으차!”
린디아스는 앙증맞은 기합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후! 이건 대체 뭐기에 이리 무거운 거예요?”
여기까지 가지고 오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는지, 그녀는 헥헥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냈다.
상당히 흐트러진 미인의 모습은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맛이 있었지만, 정작 안톤의 시선은 다른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검면에 마법 주문이 각인된 것을 제외하면 투박한 형태의 대검이었다.
“이건……!”
예전에 안톤이 보영전에서 획득한 무구로, 과거 보수를 위해 대장간에 맡겼다가 안톤이 가주 살해의 누명을 쓰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며 분실하고 말았던 아티팩트.
“이걸 어떻게?”
반응이 썩 맘에 들었던 걸까. 린디아스는 생기발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가문에서 도망칠 때, 조부님한테 부탁해서 가지고 왔어요. 혹시 당신이 돌아온다면 그때 돌려주려고. 그러니 이제는 잃어버리지 말아요.”
핫산이 구해다 준 장검도 이제는 제법 손에 익었지만, 요즘에도 간간이 이 대검에 대한 생각이 났었다.
여러모로 안톤에게 이 대검보다 알맞은 무구는 없었다.
정신력이 엄청나게 확장된 지금, 쓰던 장검보다 몇십 배는 높은 출력을 낼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까.
고민은 길었으나 안톤은 그저 진심을 담아 짧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고맙소.”
이 상황 자체가 계면쩍게 느껴진 것인지, 린디아스가 연신 볼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녀의 얼굴엔 살짝 홍조가 어려 있었다.
안톤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어진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흠! 그나저나 이제는 말투가 완전히 바뀌었네요?”
“어…….”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안톤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고 보니 린디아스와 헤어지기 전까진 늘 그녀에게 극존대를 써 왔었다. 너무 딱딱하다며 여러 사람이 핀잔을 주었어도 안톤은 그것을 고치지 않았다.
항상 낮은 위치에서 살아와서인지, 안톤에겐 그런 말투가 오히려 편했다.
‘근데 도대체 언제부터였지?’
대충 그 시기를 가늠해 보니, 실력에 자신감이 생기고서부터였단 걸 알게 됐다.
안톤은 문득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아냈다.
자존감이 무력에 비례하다니, 이건 단순히 자만이 아닌가.
“그래도 내가 더 연상인데 말이죠?”
“……신경 쓰인다면 고치겠소.”
약간 툴툴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안톤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린디아스가 피식 웃는다.
“농담이에요. 그리고 애초에 혼자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지 당신은 노예가 아니었어요. 아무튼 이제 조금이라도 자각해서 다행이네요.”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은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안톤. 하잘것없는 것들에 너무 얽매이지 말아요.”
“…….”
자유롭다라.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게 자유란 그가 늘 갈구하던 단어였으니까.
지금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다.
허나 안톤은 그 단어에 현혹되지 않으려 했다.
‘아직은 아니야.’
신안 개방을 통해, 마법각인의 속박을 벗어 내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안톤을 묶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자유롭다 여길 수 있을 때는, 아마 조르디가의 일들이 모조리 마무리된 이후나 되어서일 것이다.
“알겠소.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당신도 말을 편하게 하는 게 어떻겠소?”
린디아스는 손사래를 치며 이를 거부했다.
“됐어요. 전 그냥 이게 편해요. 괜히 이제 와 말투를 바꿔 봤자 어색하기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또 왠지 당신은 연하처럼은 안 보인단 말이에요.”
“그렇군. 그럼 더는 이 문제에 신경 쓰지 않겠소.”
“그래요.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말해 보시오.”
안톤은 웬만한 건 모두 대답해 줄 요량이었으나, 정작 린디아스는 질문하길 망설였다.
도대체 어떤 걸 물어보려고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일까.
혹시 곤란한 질문을 해 올까 싶어 안톤은 살짝 긴장했다.
그녀는 힘겹게 입술을 떼어 냈다.
“그게…… 카린이라는 상인 있잖아요.”
“카린? 갑자기 그녀는 왜…….”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내용에 안톤의 얼굴에 의아함이 맺혔다.
안톤이 알기론 카린과 린디아스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점도 없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나?’
그런 생각이나 하던 때, 고대어 같은 것도 아닐진대 이해 불가의 한 마디가 안톤의 귀에 틀어박혔다.
“예뻐요?”
“그게 무슨 말이오?”
잘못 들은 것 같아 재차 질문을 하였지만, 린디아스는 친절하게 주어까지 첨부해서 끊어 말했다.
“카린이라는 여자, 예쁘냐구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땀이 삐질 흘렀다.
* * *
그동안 린디아스는 손수 나서 안톤을 극진히 보살폈다.
다만 여인의 몸으로 하기엔 뭔가 거북한 문제들이 몇몇 있기 마련이었는데, 그런 부분들은 타르티안이 도와주었다.
그는 목숨을 빚졌다는 데서 오는 마음인지, 안톤의 수발을 드는 것을 기꺼이 도왔다.
그러다 보니 꽤나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예의 총관의 자식이 바로 타르티안이었다.
아무튼 안톤이 깨어나고서부터 벌써 세 달이 흘렀다.
꽤나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최근에 있던 큰일은 드디어 안톤이 몸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일주일 전, 안톤은 카린이 보낸 남자에게서 엘릭서를 받고 복용했다.
비약이라는 말이 과장이 없을 정도로 엘릭서의 효능은 뛰어났다. 약을 목으로 넘기는 순간부터 덜 아문 흉터 위로 하얀 새살이 돋아나고, 끊어진 신경과 근육이 재생됐다.
아마 안톤이 기공을 사용하는 무인이었다면, 무술적인 성취도 부가적으로 얻을 수 있었을 터였다.
솔직히 안톤으로서는 딱히 그 부분이 아쉽다고 여기진 않았다. 그는 그저 몸이 나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허나 정작 옆에서 구경하는 온-누르나 타르티안이 아까워했을 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나 더 구해 봐야겠군.’
엘릭서는 갖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예비용 목숨 하나를 챙기는 격이나 진배없다. 그러나 안톤이 이를 구하려는 것은 그 이유가 아니다.
아직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온-누르를 위해서였다.
안톤은 온-누르를 볼 때마다 마음 한켠이 무거웠다.
결국 자신을 탈출시키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니까.
그러니 최소한의 책임이라도 지고 싶었다.
물론 엘릭서를 복용한다고 해도 그가 안톤처럼 다시 무위를 되찾거나 하지는 못할 거다.
그의 경우 마나를 잃고 육체가 붕괴되어 급격하게 노화가 진행된 것이니 말이다.
아무리 엘릭서라도 깨진 단전을 이어붙일 수는 없으며, 세월로 인한 노화를 막을 수는 없다.
그래도 적어도 지팡이 없이 혼자 힘으로 걸어 다닐 수는 있으리라.
‘카린이 말했던 그 노친네를 찾아가 봐야겠어.’
사실 이번에 안톤이 복용한 엘릭서는 카린이 구해다 준 물건이 아니었다.
카린이 처음 말했던 노인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밀며, 엘릭서를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핫산의 귀에까지 안톤의 부상 소식이 들어갔고, 왕실에 하나뿐인 엘릭서를 받게 되었다.
카린에게 듣기로 핫산은 안톤의 부상 소식을 듣자마자 고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찾아갈 때 단단히 준비해서 가야겠군.’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지만, 전혀 무겁게 느껴지진 않는다.
왠지 마음에 포근한 무언가가 얹어진 듯한 기분이랄까.
“준비는 다 되었소?”
문 너머에서 타르티안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안톤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생각해 보니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늘을 살아남지 못하면 모두 부질없는 것일 테니 말이다.
지금은 먼 미래의 일보단 당장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똑똑.
재촉이라도 하듯 또다시 울린 노크 소리에 안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나가리다.”
안톤은 옆에 비껴 세워 둔 대검을 등에 맸다.
문을 열고 나가니 타르티안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얼굴 좀 펴시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잖소?”
세 달 동안 조금 친해졌다고 이젠 능청스러운 말도 던지는 안톤이었지만, 그의 비장한 기색은 옅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오. 나는 오늘 유언장도 쓰고 나왔단 말이오.”
“유언장이라니? 그게 정말이오?”
“아, 혹시 쓰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쓰시오.”
타르티안은 가방을 뒤적거렸다. 아무래도 필기구라도 꺼내 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것보다 전투를 치르러 가는데 웬 가방일까 싶었지만, 그에 대해 말을 걸었다간 괜히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필요 없소. 나는 반드시 살아 돌아올 생각이니까.”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시오? 그 누구보다 가장 위험한 임무를 해내야 하는 건 당신이면서.”
타르티안은 뭔가 자신이 모르는 정보가 있다면 알려 달라는 눈초리였지만, 딱히 안톤에게 그런 건 없었다.
“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단 말이오.”
“제발 당신의 예감대로 일이 술술 풀렸으면 좋겠소. 결국 우리의 목숨 또한 당신에게 달린 격이니까.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어서 갑시다.”
안톤은 타르티안을 따라 집결지로 향했다.
숲 공터에 수백의 검사들이 모여 있었고, 마련된 단상 위에선 가우스트가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으며, 이길 것이라는 의례적인 내용들이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사기가 한껏 올라갔다.
계속된 실패에도 검성의 명성은 그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갖게 하는 힘이 있었다.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온 가우스트가 안톤을 찾았다.
그는 조용히 다가와 안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잘 부탁하겠네.”
그러자 검사들의 시선들이 한 군데 모인다.
각자 기대와 불안, 걱정이 담긴 오묘한 눈빛들.
못내 그러한 시선들이 부담스레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안톤이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가우스트도 고개를 끄덕인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 모든 일의 준비가 끝이 났고, 이제는 몸으로 직접 움직여야 할 때다.
가우스트가 검을 빼 들어 하늘을 향해 한껏 치켜세웠다.
“충!”
* * *
소우든 왕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조르디가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무수한 세월 속에서 크고 작은 전란들과 수많은 고비들을 겪었는데, 이번 계획에 이동 수단으로 선택된 지하 암굴 또한 그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땅 아래 만들어진 암굴은 얽히고설킨 미로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그 지도는 대대로 가주만이 지닐 수 있었다.
허나 가우스트가 미리 그 지도를 빼돌렸기에, 신임 가주인 헤스갈은 암굴의 존재는 알아도 그것들이 어디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는 몰랐다.
그 덕에 완전히 열세에 몰린 에스닌 측의 인물들이 아직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1년간의 내전 끝에 많은 암굴들이 파괴되었고, 이제 더 이상 내성 안으로 직접 연결되는 암굴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외성벽 내부에 위치한 암굴들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직접 외성벽을 뚫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크나큰 이점이었다.
‘대체 그 옛날에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건지…….’
이어진 줄을 따라 암굴 내부를 걸어가며 안톤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타르티안에게 듣기로 이 암굴은 300년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무너지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니, 실로 놀라운 건축물이라 할 수 있었다.
걷는 내내 곁눈질로 암굴의 모습을 구경하던 안톤은 움푹 파인 자국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갑자기 왜 멈춰요?”
“뭔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오.”
벽에 글자를 새겨 놓은 것 같은데, 흙과 먼지 탓에 그 내용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안톤은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조심스레 그것들을 털어 냈다.
예상대로 그것은 글자가 맞았지만, 남부의 것은 아니었다.
“북부어?”
“뭐라고 쓰여 있어요?”
뜻밖의 발견에 린디아스도 꽤나 궁금한 눈치였다. 안톤은 눈가를 찌푸리며 글을 읊어 주었다.
“페로우스 가제리온이라고 쓰여 있소. 이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군. 아무래도 사람 이름인 듯한데…….”
혹시 예전에 누군가 한 낙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전이 벌어지기 전까진 외부인들에겐 노출조차 되지 않았던 지하 암굴이지만, 대륙 순례라는 전통이 있는 조르디가의 직계들 중에 북부어를 익힌 사람은 분명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암굴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장인의 이름이 그거랑 비슷했던 거 같습니다.”
뒤에 있던 타르티안이 대화에 끼어들자, 린디아스도 기억이 났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던 것 같네요. 아무래도 그가 기념 삼아 이름을 새겨 넣어 둔 모양이에요.”
“그런가 보오. 아무튼 계속 갑시다.”
암굴은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니었기에, 마냥 이렇게 멈춰 서서 길을 막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줄을 따라 계속해서 걷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행렬이 멈춰 서 있다.
“아무래도 끝 지점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앞으로 가 보겠습니다.”
안톤과 린디아스는 달리 해야 할 일이 있기에 후열에 위치하지만, 타르티안은 그 둘과 달리 선봉에 서야 한다.
그는 린디아스를 향해 허리를 숙인 후, 여러 감정이 얽힌 눈으로 안톤을 바라보았다.
“그럼 공녀님을 잘 부탁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