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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69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5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69화

069. 해우

 

 

가우스트가 떠나고, 안톤은 온-누르를 바라보며 최후의 질문을 날렸다.

 

“스승님한테 조르디가는 무엇입니까?”

 

“끌끌. 기껏 무게 잡으면서 하는 소리가 겨우 그런 것이냐?”

 

“대답이나 하십시오.”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웃는 온-누르였지만, 안톤의 눈빛을 확인한 후 표정이 달라졌다.

 

창문 너머를 보는 등, 딴청을 피우던 온-누르가 이내 진중한 얼굴로 솔직함 감상을 털어놓았다.

 

“내게 있어 조르디가란 지나간 삶이며, 흔적이다. 아무리 미워도 떼어 낼 수 없는 그런 존재이지.”

 

온-누르는 그렇게 말을 해 놓고도 뭔가 부끄러워졌는지, 겸연쩍은 얼굴로 안톤의 시선을 피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됐습니다.”

 

원래 안톤은 같이 떠나자고 말할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 됐다. 검성에게 이용당하건 말건,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런 안톤의 속내를 알아챈 것일까. 온-누르가 고맙다는 시선을 그에게 보낸다.

 

장내를 감도는 훈훈하면서도 어색한 공기.

 

창가 쪽으로 다가간 온-누르는 털썩 소리를 내며 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래, 한바탕 폭풍도 지나갔겠다, 이제 밀린 이야기나 나눠 보자꾸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더냐?”

 

안톤은 천천히 지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핫산과 맺은 언약부터 시작해서, 그를 왕으로 즉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일어났던 사건, 또 만나게 된 사람들까지.

 

안톤은 자신의 시점에서 느꼈던 솔직한 감상들을 편하게 늘어놓았다.

 

허나 역시나 천생이 무인이라는 것인지, 온-누르가 가장 흥미롭게 들었던 것은 레버르트 남작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안톤이 해린을 떠나기 전 그가 보여 주었던 마지막 일검에 대한 것을 말해 주었을 때, 온-누르는 아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하! 검혼과 오러, 그리고 의검까지 뒤섞인 검이라니?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거늘.”

 

온-누르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이제 더 이상 무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음에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이런 얘기에 더욱 즐거워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순간 피어났던 애잔한 마음이 문득 눈가에 묻어 나온 것일까. 온-누르가 야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 눈은 말거라.”

 

“죄송합니다.”

 

안톤은 금방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고갤 숙였다.

 

그러자 언제 굳었냐는 듯 온-누르의 표정이 다시 온화해졌다.

 

늘어지는 주름 때문일까. 안톤은 왠지 그의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참! 듣자 하니 그년을 궁지까지 몰았다지?”

 

안톤이 들었을 때, 온-누르가 그년이라 칭할 만한 자는 하나뿐이었다. 백무대주.

 

다만 안톤은 궁지에 몰았다는 말이 상당히 과장됐다 여겼다. 오히려 구사일생한 쪽은 자신이었다.

 

때마침 가우스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분명 뭣 하나 시작해 보지 못한 채 명을 달리했을 테니까.

 

“그냥 죽지 않으려고 버텼을 뿐입니다. 그녀는 정말 괴물이더군요.”

 

“아무튼 그게 아니더라도, 타르티안 녀석에게 다 들었다. 이검단을 혼자 궤멸시켰다면서? 언제 실력이 그렇게 는 게냐?”

 

“타르티안이 누굽니까? 아, 혹시…….”

 

안톤은 자신이 극적으로 구해 낸 후, 공녀의 행방을 들려주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를 칭하는 것 같아 그의 인상착의를 알려 주었더니, 온-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놈아. 녀석은 너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던데, 정작 너는 이름조차 모르고 있던 게냐? 끌끌끌.”

 

온-누르는 유쾌한 얼굴이었다.

 

안톤은 이제 이검단이 그곳에 있던 복면인들을 지칭함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집단 전부가 검기를 뽑아낼 수 있던 강력한 집단을 단신으로 상대했으니, 온-누르로서는 상당히 궁금하긴 할 터.

 

“그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고작 그 한 문장으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는 눈빛에, 안톤은 정신 마법을 이용한 수련법을 얘기해 주었다.

 

그러자 온-누르가 옳다구나 하는 표정으로 무릎을 탁 친다.

 

“아! 마법이라니, 그런 방법이 있었군! 내가 그걸 왜 진작 생각지 못했지? 흠흠,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럼 이제 적어도 탈진해 쓰러질 일은 없겠구나.”

 

“그렇지요.”

 

예전의 안톤은 의검발현을 이루었음에도, 정신력이 부족해서 이를 마치 필살기처럼 사용했었다. 전투 내내 검기를 사용해 싸우는 여타 검사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큰 약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안톤은 불과 1년 사이 그 약점을 완벽하게 극복해 낸 것이다.

 

“음……. 암만 그래도 신안을 개방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강해질 줄이야…….”

 

온-누르는 감탄과 의문 섞인 모호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신력이 증가했다는 것은, 더 이상 지쳐 쓰러질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지, 검력 자체가 강해진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원래 검기 정도는 가뿐히 베어 내던 안톤이었지만, 타르티안에게 들었던 것처럼 검과 사람을 통째로 베어 낼 정도는 아니었다.

 

무언가 더 성과가 있었던 것일까 싶어 한층 귀를 기울인 온-누르였으나, 안톤의 입에선 의외의 말이 나왔다.

 

“그자들은 경지에 비해 약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안톤은 해린에 있을 때, 암살자를 심문해 알게 된 사실들을 말해 주었다.

 

“일반인을 단숨에 화경의 무인으로 만든다고?”

 

크게 경악하며 입을 쩍 벌린 온-누르였으나, 속에서 짚이던 것이 몇 있었는지 금세 납득하는 눈치였다.

 

“음, 과연…… 그런 능력이 있었다니, 이제야 그동안의 의문이 풀리는구나. 헌데, 정상적으로 경지에 오른 이들보다는 약하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오히려 강했으면 강했지.”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만.”

 

“그것참 이상하구나. 이검단에 속해 있는 녀석들은 모두 원래부터 무인이었으니, 네가 말한 것처럼 정신 상태가 글러빠져 있지는 않았을 게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선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혹시 그년과의 전투 과정을 내게 설명해 줄 수 있느냐?”

 

안톤은 그날 있었던 전투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뭐 하나 놓칠까 싶어 주의 깊게 귀 기울이던 온-누르는 백무대주의 팔이 재생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뭔지는 몰라도 너는 그들과 상극인 것 같다.”

 

안톤도 그 말에 동의했다.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점점 생각이 그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정신검을 익히고 꽤나 숙달하긴 하였으나, 워낙 알고 있는 것이 적었다. 그러니 자신이 알지 못할 뿐, 검술 안에 그런 효용이 숨겨져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스승님과의 약속이 아니라도 꼭 그 남자를 찾아봐야겠군.’

 

짧게 사념에 사로잡힌 안톤이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그래도 그녀는 이길 수 없더군요.”

 

어떻게 전투가 유리하게 흘러가는 듯했으나, 백무대주가 단환을 삼키며 전세가 바뀌었다.

 

당시 보았던 그 짐승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안톤은 한참이나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하지만 말로 전해지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온-누르는 그 모습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 모양이다.

 

다만 그 무지막지한 파괴력만큼은 와 닿았는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 갈수록 태산이구나. 그래도 가우스트 님이 나타나자 도망친 걸로 보아 뭔가 제한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일단 좀 더 연구해 봐야 할 것 같다.”

 

 

* * *

 

달빛을 머금은 은빛 머리카락이 열린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에 나부낀다.

 

문득 잠에서 깨어난 헤스갈은 눈을 비비적거렸다.

 

그의 앞엔 고혹적인 분위기의 여인이 서 있었다.

 

“배, 백무대주?”

 

반쯤 수면에 잠겨 있던 의식이 확 깨어난다.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리깔아 보고 있었다.

 

“이 중요한 때에 잠이나 자고 있다니, 멍청한 새끼.”

 

“갑자기 그게 무슨 말…….”

 

헤스갈은 말을 하던 도중에서야 카트락시아의 한쪽 팔이 사라졌음을 알아챘다.

 

이제야 조금이나마 사태가 파악되기 시작한다.

 

“혹시 계획이 실패한 거요?”

 

“그래. 넬-린디아스 조르디를 붙잡겠단 계획은 실패했다.”

 

침울한 얘기를 하였건만, 헤스갈은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대꾸할 뿐이었다.

 

“그렇군. 그럼 다음엔 잘해 보시오.”

 

한심하단 듯 경멸 어린 눈초리를 쏘아 내던 카트락시아의 눈빛이 변했다.

 

그 살벌한 기세에 헤스갈도 잠깐 주춤할 정도였다.

 

“뭐, 뭐요, 그 눈빛은?”

 

사실 계획이 실패한 걸 듣고서도, 헤스갈이 이런 태도를 보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정통을 내세울 수 있는 에스닌이라면 모를까.

 

사실상 린디아스를 생포하는 작전은 헤스갈에겐 그렇게까지 가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검의 제단을 원하는 건 그들이지, 헤스갈이 아니다.

 

헤스갈은 조르디가의 가주가 되겠다는 목적을 이미 이루었다.

 

물론 가주가 되면서 제단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돼 탐은 좀 난다마는, 어차피 저치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줘야 하지 않은가.

 

헤스갈로서는 딱히 열과 성을 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까드득.

 

마치 뼈가 깎이는 듯한 소리에, 헤스갈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당차게 말했으나, 사실 그는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억지로 힘을 짜내는 중이었다.

 

별말 없이 한참이나 노려보던 카트락시아가 침묵 속에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우리가 제단을 목적으로 네게 접근한 것은 네가 제단을 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야 당신들이 멋대로 생각한 거 아니오?”

 

“가진 게 피뿐인 너였는데, 설마 그 피마저도 쓸모없을지는 몰랐지.”

 

“…….”

 

쓰레기 취급하는 듯한 말에 헤스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수치심과 모멸감이 전신을 뒤덮었지만, 그는 더 이상 카트락시아를 자극해선 안 되겠다 생각했다.

 

헤스갈은 변명이라도 하듯 구차한 목소리로 급히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검의 제단을 넘기겠단 거래를 지켰소. 비록 조금 일이 이상하게 됐다만, 그래도 이렇게 여전히 당신들을 돕고 있지 않소? 그리고 넬에게 그런 비밀이 있다는 건 나도 가주가 되기 전엔 몰랐단 말이오.”

 

“명심해라. 널 그 자리에 앉힌 게 나인 만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끌어내릴 수 있다는 걸.”

 

분노를 어떻게든 억누르는 듯한 음성에, 헤스갈이 기겁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그래. 이건 협박이다. 우리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너도 끝이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말 테니까.”

 

진심이 절로 묻어나는 말에, 헤스갈이 꼬리를 내렸다.

 

“……알겠소. 나도 최대한 노력하겠소. 그래서 내게 바라는 게 뭐요?”

 

“너까짓 거한테 바라는 게 있을 것 같으냐? 단지 버릇이 나빠진 개새끼에게 지 주제를 각인시켜 줬을 뿐이다. 그럼 마저 잠이나 처자고 있어라.”

 

아무래도 이대로 카트락시아가 가 버리려는 것 같자, 헤스갈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오?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 팔로는 검성을 당해 낼 수 없을 텐데?”

 

“다급해지니 이제 그게 궁금하더냐? 그를 대신 상대해 줄 자를 불렀으니 곧 도착할 거다.”

 

카트락시아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내려놓고 왔을 때처럼 귀신같이 사라졌다.

 

“이 쓸모없는 놈.”

 

헤스갈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달에 비친 그의 눈에는 광기가 살짝 감돌고 있었고, 분노로 인해 손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퍽.

 

헤스갈은 자신의 침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큰 힘을 실었으나, 푹신한 이불 위에선 당연히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으으…….”

 

그는 어떻게든 터져 나오려는 괴성을 참아 내며 분을 삭였다.

 

헤스갈은 일가의 가주인 자신이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처음 그들이 접근했을 때, 둘은 동등한 관계였다.

 

카트락시아 또한, 사근사근 존댓말을 쓰며 그를 존중해 주었다.

 

하지만 가주가 되고, 헤스갈로는 검의 제단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후 상황은 변했다.

 

“젠장! 지들이 착각해 놓고서! 그딴 사생아 년에게 그런 비밀이 있는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헤스갈이 조르디가에 숨어 있던 비사를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그저 린디아스는 슐츠의 사생아인 줄로만 알았다. 그 사실을 의심해 본 적조차 없었다.

 

헤스갈은 가문의 중대사를 함께하는 장로들이 한 말을 그대로 믿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잘 가두어 놓거나 했어야 했는데.”

 

린디아스의 가치를 미리 알았더라면, 혼사니 뭐니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그냥 마땅한 핑계 거리를 하나 찾아서 실종으로 처리한 후, 그대로 그들에게 내주었겠지.

 

린디아스가 가문에서 도망쳐 나간 후, 헤스갈은 깨진 장독대를 이어 붙이는 심정으로 대체자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15년 전의 혈사에서 생존한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아버지, 당신은 끝까지 제 발목을 잡는군요.”

 

원망의 말을 내뱉은 헤스갈이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렇게 된 이상 린디아스를 빨리 되찾아와야겠어.’

 

목적을 이루고 나면, 그들은 미련 없이 조르디가를 떠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제 헤스갈도 가주로서의 위치를 제대로 누릴 수 있을 터.

 

헌데 문득 이런 생각이 피어난다.

 

‘정말 약속대로 그들이 그냥 떠날까?’

 

헤스갈은 얼굴을 휘저으며 불길한 마음을 애써 떨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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