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65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65화
065. 재회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게 낫다고 여긴 안톤은 얼굴을 가리던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타르티안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
그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나타난 얼굴이 무척이나 어렸기에 당황한 것이다.
게다가.
‘북부인이라고? 아! 잠깐만…….’
안톤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던 타르티안이 무언가 깨닫고 검지를 들어 올렸다.
“설마, 당신은!”
암검과 린디아스의 신변을 묻는 것부터, 북부인이라는 것까지.
모두 종합하여 짚어 봤을 때,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타르티안은 그의 이름이 쉽사리 기억나지 않아 잠깐 주춤했다.
그러던 중, 과거 린디아스와 대화를 나누던 중 스쳐 들었던 그의 이름이 생각났다.
“안톤?”
“알고 있다니 얘기가 빠르겠군.”
안톤은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필시 얘기가 길어져야만 했을 테니, 그로선 귀찮은 일을 던 셈이다.
“잠깐,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강해진 거요?”
타르티안은 황급히 질문을 쏘아 냈지만, 안톤은 그저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그냥 이런저런 일이 있었소.”
굳이 대답해 주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 지금 안톤에게 중요한 건 그의 호기심을 채워 주는 게 아니었다.
“그럼 이제 스승님과 린디아스 공녀가 어디 있는지 말해 주시겠소?”
“으음…….”
그제야 원점으로 돌아온 타르티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안톤이 그를 부추겼다.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해 왔소. 아무래도 상황이 긴박한 것 같은데, 더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하긴…… 당신이 그들에게 해를 입힐 리는 없겠지. 우선 당신의 질문에 답하자면, 암검께선 은신처에서 병상을 치료하고 계시오.”
안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노예각인 마법의 끈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짐작은 했지만, 정말로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럼 린디아스 공녀는?”
“2공녀님께선 흩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나와 같이 있었소. 허나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기에 정확한 위치는 나도 알 수 없소. 추격을 무사히 뿌리쳤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쯤 나만큼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겠지.”
어째서 도주 중인지 이유는 몰랐으나, 안톤은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그럼 시간이 없군.”
서둘러야 했다.
타르티안의 경우처럼, 안톤이 시기적절하게 등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니까.
최악의 상황이라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다.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위치라도 알려 주겠소? 그쪽만 가면 내가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뭔가 방법이 있는 거요? 아니지……. 일단은 갑시다. 내가 안내하겠소. 크흑!”
타르티안이 땅을 짚고 일어나던 중 어깨를 부여잡으며 도로 무릎을 꿇었다.
안톤은 다가가 상처 부위의 천을 잡아 뜯었다.
촥!
무언가에 베인 듯한 자상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으나, 그 주변의 피부들이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독이군.”
“아무래도 아까 스친 화살에 독이 묻어 있었나 보오. 아무래도 같이 가지는 못하겠군.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 줄 터이니 그리로 가 보시오.”
“당신은?”
“괜찮소. 이 정도는 앉아서 운기를 하면 잠재울 수 있을 것이오.”
“알겠소.”
안톤은 타르티안이 알려 준 방향으로 급히 신형을 옮겼다.
지점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잘못 찾아온 것 같지는 않군.’
안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형식의 사당이 산속에 또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이미 주변은 처참한 전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지 않은가.
다만 아쉬운 점은, 피가 살짝 굳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전투가 벌어지고서 꽤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10미터, 100미터, 200미터…….
안톤은 타르티안을 찾아냈던 것처럼, 청각을 확장했다.
산 하나를 덮을 만큼 영역의 크기를 키웠으나, 아직까지 그의 귀에 들리는 특이점은 없었다.
‘더…….’
안톤은 멈추지 않고 한계까지 힘을 끌어 올렸다.
이렇게까지 출력을 높여 본 적은 없었기에 조금은 불안했지만, 지금은 무리를 해야 할 때였다.
근처 벌레의 날갯짓 소리, 짐승들의 울음소리,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까지.
온갖 소리가 그의 귀에 천둥처럼 크게 들린다.
어느 순간부터 귀에서 검게 물든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안톤은 개의치 않고 계속 귀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였다.
챙!
비록 그 소리는 무척이나 희미했지만, 안톤은 여타 소음 속에서도 그 소리를 잡아챘다.
귀에 익을 대로 익은 병장기 소리를 그가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찾았다.’
안톤은 온 힘을 다해 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 * *
린디아스는 자신을 한 손으로 안아 든 안톤을 올려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수차례 눈을 깜빡였다.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안톤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는 1년 전 어느 때처럼 평범하게 인사말을 건네 왔다.
“오랜만이오.”
얼굴에서 앳됨이 옅어진 것 외에도 목소리가 꽤나 굵어졌다.
그러고 보니 키도 조금 더 큰 것 같다.
아차, 이게 중요한 게 아닌데.
린디아스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
“여길 왜 돌아왔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약하게 울분이 섞여 있었다.
물론 린디아스 또한 다시 만난 안톤이 반갑다.
그녀 또한 안전한 은신처에서 만난 것이었다면, 이처럼 타박하지는 않았을 거다.
허나 지금은 위기에 몰린 상황이다.
적들은 하나하나가 고강했고, 그녀가 알던 안톤의 무위로는 타개할 길이 보이지 않는 강자들이다.
이래선 그의 등장은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다.
“당신을 돕기 위해 왔소. 헌데 조금 늦은 것 같군.”
린디아스에게서 시선을 뗀 안톤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도 그의 고갯짓을 따라 전투의 현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흔이 넘던 검사들 중에 이제 단 두 명만이 남아 서로 등을 의지한 채 결사적으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빨리 당신이라도 도망가요! 방어선이 무너지면 당신도 죽고 말 거예요!”
사투를 벌이는 검사 둘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린디아스에겐 안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자신들과 다르게, 그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지 않은가.
상관없는 일에 휘말려 덧없는 죽음을 맞게 할 순 없었다.
허나 그런 그녀의 심정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안톤은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도망가는 건 그때 한 번이면 충분하오.”
“그게 무슨! 아…… 이제 끝났어요…….”
린디아스는 끝까지 항쟁하던 검사 둘이 기어코 쓰러지는 것을 보며 체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장애물이 사라지자 적들의 관심이 모두 이쪽으로 향했다.
적들 무리 사이에서 적의를 걸쳐 입은 사내 하나가 한 걸음 다가왔다.
“공녀, 이리 오시오. 순순히 따라 온다면 안위에는 문제가 없을 거요. 당신을 멀쩡하게 데려오라는 명령이 있었소.”
완전히 막다른 길에 몰아넣었다는 데서 오는 여유인지, 그는 상당히 느긋해 보였다.
‘원래 저런 녀석이 있었던가?’
사내는 안톤을 보며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호위이겠거니 했는데, 보면 볼수록 이상한 것이었다.
그는 기억을 되살렸다.
‘아니, 확실히 저런 놈은 없었어.’
북부의 기사들이나 입는 갑주이며, 하얀 피부와 저 튀는 머리색까지.
그저 스쳐 지나가며 봤다고 해도, 잊어버릴 리 없는 외모였다.
‘그럼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어느샌가 나타난 정체불명의 인물에 경계감이 들었으나, 사내는 금방 다시 차분해졌다.
안톤의 몸에서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군.’
그런 생각으로 사내는 계속 걸음을 내디뎠다.
슬슬 가깝다 여겨질 만큼 다가왔을 때, 안톤이 세차게 검을 뽑아 들었다.
앞을 가로막은 안톤을 노려보던 사내가 물음을 던졌다.
“너는 누구냐?”
“글쎄.”
“그래? 그럼 이만 죽어라.”
사내가 안톤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린디아스가 덜컥 튀어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녀는 아주 다급하고 절박한 표정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잠깐만요! 그를 죽이지 마세요! 당신이 원하는 건 저잖아요? 그를 죽이면 저도 여기서 뛰어내리겠어요.”
악에 받친 자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다.
사내는 정말 그녀가 자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주춤했다.
“저자가 무슨 숨겨 둔 애인이라도 되는 것이오? 뭐, 아무래도 좋소.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제안을 받아들이리다.”
사실 그의 속내에는 일단 붙잡고 나서 몰래 저 안톤까지 죽이겠다는 악독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허나 그것을 모르는 린디아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서 이리로 오시겠소?”
“알겠어요.”
그렇게 그쪽을 향해 걸어가려는 찰나.
린디아스의 가는 팔목을 잡는 자가 있었다.
“그럴 필요 없소, 공녀.”
안톤이었다.
린디아스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도 몰라주는 그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손을 뿌리치려 힘을 줘 봤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안톤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서 이것 놔요!”
“아까 말했지 않소? 난 당신을 돕기 위해 왔다고.”
“그러니까 이게 날 돕는 거라고요!”
잔뜩 흥분한 린디아스와 다르게, 안톤의 어조는 내내 굴곡 없이 조용했다.
안톤은 린디아스의 떨리는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저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러자 신비하게도 잔뜩 긴장한 육신이 순식간에 진정된다.
그렇게 일순간이나마 린디아스가 마음을 내려놓았던 때.
“저놈들은 아무것도 아니오. 과분한 힘만을 목표로 인간이길 포기한 잡종들일 뿐이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도발까지 해서야 어쩌잔 말인가!
린디아스는 고개를 돌려 서둘러 적들의 눈치를 살폈다.
“하하하!”
의외로 그는 아주 재미난 듯 큰 소리로 웃어 젖히고 있었다.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도 잠시, 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었군. 미안하게 됐소이다, 공녀. 그냥 내 식대로 해야겠소. 떨어질 테면 떨어져 보시오. 우리가 그것 하나 못 낚아챌까 봐? 당신은 이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소. 하려면 진즉에 했어야지.”
“아아……!”
이제 끝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린디아스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말이 많군.”
여전히 안톤은 적을 도발할 말들을 던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녀에겐 이를 중재할 마음도 생겨나지 않았다.
빠득.
이가 맞물리며 섬뜩한 소리를 낸다.
적의 사내의 입에서 새어 나온 소리였다.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서로의 검이 휘둘러진다.
하나는 화경의 증거라는 검기를 가득 품은 검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떤 기운도 실리지 않은 평범한 철검이었다.
혹여 안톤이 보영전에서 얻은 대검을 지니고 있었다면 모를까.
둘이 마주쳤을 때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안 돼…….’
두 개의 날이 서로 교차하는 순간.
린디아스는 그 이후의 끔찍한 참상이 두려워 질끈 눈을 감았다.
서걱.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 마치 나뭇잎을 베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툭.
무언가 둔탁한 물체가 땅에 닿는 소리에 린디아스는 귀를 막았다.
눈을 뜨지 않더라도, 방금 난 소리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린디아스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이나 조용했다.
겨우 손으로 귀를 막았다고 이렇게까지 정적이 이어질 리는 없다.
게다가 자신을 만지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지 않은가.
이상함을 느낀 린디아스가 조심스럽게 눈을 떠 주변을 바라보았다.
“……!”
눈앞에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심정인 것은 린디아스뿐만 아니라, 다른 흑의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중의 모두가 놀란 얼굴로 한곳을 바라본다.
그 중심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주변을 쓱 훑어보는 안톤이 있었다.
뚝.
매끄러운 검신을 타고 흘러내려온 핏방울 하나가 지면을 적신다.
“설마 도망가지는 않겠지?”
흑의 사내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톤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덤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