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6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62화
062. 제의
“정말 갔군.”
핫산은 안톤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원래 항상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기분이랄까. 속에서 뭐라 규정하기 힘든 상실감이 크게 느껴진다.
“아쉽군, 아쉬워. 그가 이곳에 정착했다면, 참 힘이 되었을 것을…….”
안톤은 강하다.
무력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외적인 부분까지 포함해서.
그는 핫산에게 있어 정신적으로 의지가 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자리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는 걸 핫산은 깨달았다.
“아, 자네 앞에서 내가 못 할 말을 했군.”
옆에 서 있는 레버르트 남작이야말로 계속 해린에 남아 그를 섬길 충신이다.
자칫 자신의 말에 박탈감을 느끼진 않았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레버르트 남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아니 그는 오히려 핫산의 말에 긍정하고 나섰다.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그가 남았다면 정말 해린의 복이었을 겁니다.”
“그랬겠지.”
“근데 왜 더 잡지 않았습니까?”
다만 레버르트 남작은 이것이 궁금했다.
물론 안톤과 핫산이 처음부터 주종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그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 시원시원하게 보내 준 것은 조금 의외였다.
농담식으로라도 속의 미련을 겉으로 내비친 적조차 없었으니까.
“남작도 알지 않은가? 그는 내가 품기엔 너무 큰 사람일세.”
“…….”
레버르트 남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 수긍을 하면 자신의 군주를 깎아내리는 격이었으니, 그로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던 것이다.
핫산이 은근한 미소를 얼굴에 띠며 재차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완전히 그를 포기한 건 아니라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내 국민들을 위해, 반드시 이 나라를 대륙의 어느 열강들에 밀리지 않을 만큼 부강하게 만들 걸세.”
대화의 맥락에서 벗어난 말이었으나, 레버르트 남작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천히 읊듯이 내뱉는 말에서 그의 뜨거운 의지가 느껴졌다.
“그래서 내 나라와 함께, 나 또한 그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큰 사람이 된다면. 그때는…….”
핫산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깨끗한 창공을 비상하는 한 마리의 독수리.
왠지 그것을 보니 다시금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잘 가게나, 내 유일한 친우여.’
핫산은 언젠가 다시금 만나게 될 날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약속한 돈을 만들려면 지금부터 뼈 빠지게 일해야겠군. 자, 어서 가세! 할 일이 많네!”
* * *
집 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카린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으……. 도대체 누구야?”
간만에 주어진 휴식 시간.
웬만해선 무시하고 계속 자려 했지만, 집요한 노크 소리에 카린은 결국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단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표정은 무언가 뾰로통했다.
급하지 않은 일이라거나, 잡상인 따위의 판촉 행위라면 반드시 쓴맛을 보여 주리란 마음으로 그녀는 문을 활짝 열었다.
“아우, 깜짝이야!”
카린은 화들짝 놀란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철투구를 뒤집어쓴 괴한을 향해 따가운 시선을 날려 보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특이 사항이 그녀의 눈에 잡혔다.
평소와 달리 등에 메고 있는 커다란 배낭이었다.
“뭐예요, 그 짐은? 설마 어디 떠나는 건가요?”
“상인이라 그런가? 관찰력이 좋군. 일단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소?”
“집 안이 상당히 어수선한데…….”
“그건 나도 알고 있소. 별 특별한 일도 아니잖소?”
과거 안톤은 카린과 일주일이 넘게 한집에서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왜 그런 무의미한 질문을 날리냐는 눈으로 카린을 바라보자, 그녀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우, 진짜. 알았어요. 들어와요.”
문을 열어 둔 채로 몸을 비켜 준 카린은 작게 읊조렸다.
“이 답답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음성이었으나, 안톤의 예민한 청각에는 똑똑히 잡혔다.
허나 그는 천연덕스럽게 모른 척했다.
“뭐라 그랬소?”
“아니요. 빨리 들어오라고요. 찬 공기가 집에 들어오잖아요.”
안톤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카린은 재빨리 문을 닫았다.
난로를 때 두었는지, 집 내부엔 훈훈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당신 말대로 어수선하긴 하군.”
집 안은 상당히 어질러져 있었다.
안톤이 이곳에 있을 때보다도 훨씬 심한 것 같았다.
카린이 부끄러운 듯 안톤의 시선을 피했다.
“……조금 그렇긴 하죠?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어쩔 수 없었어요.”
“한가하던 때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당신…… 그냥 내쫓기고 싶어요? 어서 앉기나 해요.”
안톤이 식탁에 앉자, 카린도 그 맞은편에 턱을 괴고 앉았다.
“그래서, 이런 아침 댓바람부터 웬일이에요? 그동안 한 번 찾아온 적도 없더니.”
정오가 지나간 지가 언젠데, 아침이라니.
안톤은 입이 근질거렸지만 참았다.
한 번 더 깐죽거렸다간 정말로 내쫓길 수도 있을 판이었다.
“떠나기 전에 들렀소. 물론 용건도 있긴 하고.”
“용건을 듣기 전에 한 가지만 물을게요. 잠깐,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아니면 완전히 이 나라를 떠나려는 거예요?”
“후자요.”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건데요? 당신은 여기서 완전 영웅이나 다름없잖아요?”
카린은 떠나려는 안톤이 이해되지 않았다.
철가면 칼.
힘없던 2왕자를 왕으로 세운, 해린의 명실상부 최강의 무사.
귀족들 사이에서도, 백성들 사이에서도 그는 유명 인사였다.
물론 그녀는 그의 출신지가 이곳이 아님을 알고 있다.
허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대로 왕궁에 정착한다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텐데.
이는 그녀가 안톤의 자세한 속사정을 모르기에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의문이었다.
“나는 조르디가로 갈 거요.”
“조르디? 그 소우든에 있는 십이검주 중 하나인 가문 맞죠?”
“그렇소.”
“근데 거기는 왜요? 혹시 뭐, 검술 유학 같은 건가?”
카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던 중 소우든이 워낙 검으로 유명하다 보니, 전 대륙적으로 검객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 인간들이 가끔 있지 않은가?
부와 명예보다는 오로지 무만을 추구하는 골수 무인들이 말이다.
안톤 또한 검사이니 그런 부류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
나름 일리 있는 추측이었으나 안톤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건 아니오.”
“그렇다면 조금 시기를 미뤄요. 그곳은 지금 내전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렇기에 가려는 거요.”
“……?”
이쯤 되니 안톤의 과거에 조르디가가 연관되어 있음을 카린이 눈치 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과거가 궁금한 듯했지만, 그 의문은 끝내 해결되지 못했다.
대화가 길어지는 것 같자 안톤이 내용을 끊고 본론을 꺼낸 것이다.
“아무튼 용건이나 말하겠소.”
“그러고 싶으면 그래요. 나도 아까부터 궁금했던 차였으니까. 그래서 왜 온 건데요? 떠나기 전까지 얼굴 한 번 안 비치다가.”
왠지 모르게 마지막 말에서 서러움 비슷한 감정이 느껴졌지만, 착각이라 여기며 안톤은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당신도 슬슬 가문으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소?”
“아무래도 그렇죠? 지금도 그때를 준비하자니 이렇게 바쁜 거고. 이제 거의 막바지예요. 동 대륙에 한 번만 더 다녀오면 목표액은 다 모을 것 같네요.”
안톤이 카린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떠나기 전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왜 하나 싶은 눈치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나한테 투자를 받아 볼 생각 없소?”
“투자요?”
카린은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그동안 안톤은 이러한 것들과는 연관이 먼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일단 계속 들어 보기로 했는지, 어서 마저 설명하라는 눈빛을 안톤에게 쏘아보냈다.
“내가 갑자기 돈이 많이 생겼는데, 사실 이 돈을 쓸 일이 없어서 말이오. 당신이라면 이 돈을 나보다 훨씬 유용하게 써 줄 수 있을 것 같소.”
딱히 안톤이 강조해서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카린은 ‘유능한’이라는 부분이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다.
카린은 왠지 콧등이 간질간질했지만 내색치 않고 새침하게 말했다.
“얼마나 많기에요?”
“1만…….”
“1만 골드라니, 확실히 큰 금액이네요. 좋아요. 유능한 제가 당신의 재산을 불려 드리죠.”
호기롭게 말하는 카린을 보고 있자니.
안톤은 그녀의 모습이 누군가와 겹쳐 보이는 생경한 경험을 했다.
왜 다들 말을 끝까지 듣지를 않는 걸까.
“미안하지만, 1만 골드가 아니오. 리듐이지.”
“리듐……이라고요?”
카린의 머릿속이 잠시 굳었다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보았던 제국의 리듐 환전 비율은 금 대비 71 대 1이었다.
비록 반년도 전에 확인한 것이 마지막이었으나, 리듐이라는 금속의 재질 특성상 언제나 그 정도의 비율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즉, 안톤이 대략 70만 골드가량을 자신에게 투자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농담이죠?”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오?”
“그건 절대 아니죠.”
즉각적인 카린의 대답에 안톤은 씁쓸해졌다.
그런 그의 모습은 추호도 신경 쓰지 않고 잔뜩 흥분한 카린이 큰 소리로 질문을 날렸다.
“아니, 도대체 그런 큰돈이 어디서 났어요?”
“국왕 전하에게 받았소.”
“…….”
카린은 가슴을 짓누르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꼈다.
그녀는 한 해 동안 내륙에 있던 시간보다 파도에 흔들리는 배 위에 있던 시간이 더욱 길었다.
그 정도로 고생해서 동대륙을 두 번이나 더 왕복했고,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이 2만 골드가 좀 되지 않았다.
비록 아직은 세상을 움직이기에는 작은 돈이었으나, 본격적인 시작을 하기엔 충분한 금액.
그런데 무려 30배가 넘는 돈이라니!
카린은 처음으로 자신이 장사가 아니라, 검을 배웠어야 했다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아무튼 돈은 직접 그대에게 전달해 주라 말했으니, 조만간 연락이 올 거요. 그럼 그때 그레일시아 왕국으로 가서 내가 말해 준 물품들을 매입하면 되오. 아주 간단한 일이지.”
“나는 일만 하라는 거군요.”
“너무 비꼬아서 듣지 마시오. 거액의 투자자니 투자 품목 정도는 정해도 되지 않겠소?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카린의 말문이 막혔다.
안톤의 말대로 투자자가 품목에 대해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동종 업계의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른다.
사실 투자라는 단어도 상인이 아닌 사람에겐 꽤나 생소한 단어였다.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예전에 이런 일을 하기라도 했던 거예요?”
“그런 건 아니오. 그저 그런 일을 했던 사람을 하나 알고 있소.”
안톤은 전생에 자신의 부대에 있었던 병사 하나를 떠올렸다.
그는 몰락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전투에는 별 소질이 없었으나, 말재간이 워낙 좋아서 부대 내에서 인기가 좋았다.
야영을 할 때마다 항상 그를 중심으로 무리가 짜일 정도였다.
안톤은 가끔 울적할 때면, 수련을 멈추고 그들 무리에서 멀리 떨어져 몰래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었다.
이야기는 별거 없다.
그냥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허나 안톤은 그러한 부분들이 좋았다.
그저 하염없이 듣고 있으면,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된 기분이랄까.
검술 수련을 제외하면 그의 유일한 취미이자 낙이었다.
‘그땐 그게 도움이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굳이 이번 일뿐만 아니라도 그렇다.
안톤은 현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부분에서 그들의 영향이 묻어난다는 걸 깨달았다.
검을 제외하면 모든 상식과 역사들은 그들에게 배운 것이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그들을 찾아서 도와주는 것도 재밌겠어.’
물론 조르디가의 일이 끝나고 완전히 자유롭게 된 이후의 일이었다.
의도치 않게 상념이 길어졌다.
안톤은 카린의 쩌렁한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차렸다.
“이봐요! 듣고 있어요?”
“아, 미안하오. 뭐라고 그랬소?”
“……으으! 진짜 나 혼자만 진지한 것 같다니까요? 이렇게 큰돈을 맡기면서 걱정도 안 돼요? 품목만 정하면 끝이란 건가? 수익금 분배는? 기일은? 보고서는?”
“화내지 마시오. 수익금 분배는 그냥 당신이 알아서 책정해 주시오. 많이 바라지도 않거니와, 게다가 그건 그리 중요치도 않으니.”
“뭐가 중요치 않다는 거예요!”
안톤은 카린이 이렇게 성을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황급히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진심을 내비쳤다.
“나는 단지 당신과 인연을 좀 더 이어 가고 싶을 뿐이오.”
언젠가 필요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비록 워낙 급하게 말하는 탓에 뒷말이 생략되긴 했지만 말이다.
“어, 어…… 이, 인연이라고요?”
평소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던 카린이 말을 더듬는 것이 낯설기는 했다.
허나 안톤은 이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화가 잠재워졌다는 것에 안도만 했지.
카린의 얼굴이 빨갛게 익은 이유를, 안톤은 정말로 몰랐던 것이다.
“그렇소. 인연. 그게 가장 중요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