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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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59화
059. 부두
안톤이 칩거한 별채에 의외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그 방문객이란 바로 다름 아닌 펠샤인 공주였다.
핫산의 왕위 즉위식 때 멀리서나마 한 번 보고서 처음으로 보게 되었기에, 꽤나 오랜만이었다.
‘걸음걸이가 상당히 빠른 편이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제 보니 겉모습도 꽤나 초췌해 보인다.
인사는커녕, 용무도 묻기 전에 그녀는 안톤을 보자마자 대뜸 입을 열었다.
“당장 날 이곳에서 떠나게 해 줘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오?”
“스승님과의 거래, 지금 지켜 주라는 말이에요.”
분명 안톤은 과거에 노파와 한 가지 거래를 했다.
귀족들에게 걸린 세뇌 마법을 풀어 줄 터이니, 펠샤인이 제국에 팔려 가지 않게 도우라는 것이었다.
핫산은 아직도 그 거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죄책감을 갖고 있던 핫산으로서는 그냥 묵인해 줬을 것 같지만, 노파가 그러지 말기를 당부한 탓이다.
아무튼 안톤은 남들 모르게 펠샤인을 해린에서 벗어나게 해 줄 생각이었고, 그 날짜는 그녀가 해린을 떠나가는 날로 정했다.
본격적으로 제국의 사람들에게 신변을 위탁한 이후의 시기로, 핫산의 책임을 최대한 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진즉에 그녀에게 고지해 두었으니, 펠샤인이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일까?
안톤은 자세한 설명을 하라는 눈으로 펠샤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공은 여지껏 목격한 바 없을 정도로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스승님이 죽었어요.”
“…….”
안톤은 침묵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노파가 죽었다.
정말일까?
그렇다면 어째서지?
또 역사가 바뀐 건가?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제 용의 현자는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 걸까?
하지만 생각은 길게 이어 갈 수 없었다.
심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듯한 펠샤인이 무서운 눈초리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공주님의 심정은 알겠지만…… 일주일 뒤면 약속한 날인데,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안 되겠소? 이대로 떠나가면 핫산 왕자의 처지가 난처해질 터인데.”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요. 나는 이제 날 위해서 살 거예요. 그러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니까…… 이 결심이 꺼지기 전에 날 여기서 벗어나게 해 줘요.”
안톤은 곤란하단 얼굴로 한참이나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애원하던 펠샤인이 방식을 달리했다.
“그리고 당신은 나와의 거래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잖아요? 내 부탁을 거절치 말아 줘요.”
그 말에 안톤의 말문이 턱 하고 막힐 수밖에 없었다.
노파와의 거래와는 별개로, 안톤은 펠샤인과도 한 가지 거래를 했었다.
수련을 도와주는 대가로, 훗날 1왕자 페올을 죽일 때 자신이 직접 그 현장에 있게 해 달라는 거래였다.
그리고 이는 1왕자가 불시에 주검으로 발견되며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거래의 당사자인 펠샤인이 조용했기에 안톤은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줄로만 알았었다.
근데 그게 지금에 와서 발목을 잡을 줄이야.
“알겠소. 그럼 방으로 돌아가 떠날 준비나 하면서 기다리고 계시오. 밤에 찾아가겠으니.”
안톤의 승낙이 떨어지자 펠샤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는 지금이라도 됐어요. 그냥 이대로 가면 돼요. 이곳까지 오는데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어요.”
“……내게 시간을 좀 주시오. 나도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니.”
“알았어요. 그럼 여기서 기다릴게요.”
안톤은 그녀를 내버려 두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핫산을 위해 짧게라도 쪽지를 남길 생각이었다.
펠샤인이 실종되면 아마 황제가 의심의 화살을 애꿎은 핫산에게 돌릴 것이 분명하니까.
그러니 적어도 잘 대응할 수 있도록 이 사건의 진상을 그에게 알려 주기라도 해야 했다.
‘그라면 어떻게든 다른 대가를 치러서 잘 무마시킬 거야.’
* * *
‘카르셍까지만 데려다주면 돼요. 그 이후부터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카르셍은 해린 북쪽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현재 이곳 쟝-그리던과는 온종일 말을 타더라도 사흘은 족히 걸릴 만큼의 간격이 있었다.
듣자 하니 길목에 산도 몇 개나 있는 듯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안톤은 말을 타지 않고 그곳까지 뛰어서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이 가능하냐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과연 하루 만에 왕복까지 마칠 수 있겠느냐에 대한 의문이었다.
‘해 볼 수밖에 없나.’
그러지 못한다면, 자리를 비웠던 안톤에게 의심이 뻗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심은 핫산에게 향해지는 것과 동일하다.
안톤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핫산의 최측근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더 이상 피해를 끼칠 순 없지.’
안톤은 과거 온-누르에게 받았던 팔찌를 꺼내었다.
다행히 이 아티팩트가 있어서 적어도 펠샤인을 직접 업고 가는 일은 면했다.
“그럼 준비됐소?”
그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펠샤인은 안톤이 알려 주었던 시동어를 외었다.
“밤 그림자.”
그녀의 신형이 팔찌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갈 곳 잃은 팔찌가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안톤은 공중에서 잽싸게 팔찌를 받아 낸 후 자신의 팔목에 그것을 끼웠다.
“그럼 가 볼까.”
* * *
쿵! 쿵!
일정한 간격으로 둔탁한 굉음이 숲 전역으로 울려 퍼진다.
안톤은 그 소리에 놀라 날아가는 새의 옆모습을 코앞에서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을 당연하다는 듯 행하는 자신을 보며 새삼스러운 기분이 든 것이다.
쿵!
공중에서 천천히 낙하한 그의 발이 다시금 깊은 족적을 남기며 위로 도약한다.
그는 지금 날아가듯 빠른 속도로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안톤이 신체에 의지를 불어 넣는 단계에 돌입했기에 가능했다.
의지를 품은 그의 신체는 초인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수십 미터를 가뿐히 도약했고, 그 높이에서 다시 떨어져도 멀쩡할 만큼 단단했다.
불과 1년 전이었다면, 이렇게 무식하게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작 몇 번만으로 정신력이 바닥나서 탈진해 버렸을 테니 말이다.
허나 지난 1년간 안톤은 펠샤인의 도움으로 정신력이 크게 늘었다.
이제 어떤 방식으로 수련해야 할지조차 감이 안 잡힐 만큼 정신력이 확장된 것이다.
‘도중에 기진맥진해서 쓰러질 걱정은 버려도 되겠어. 그나저나 소리가 너무 큰데…….’
이동 속도만 놓고 보자면 안톤이 지닌 그 어떤 방식보다도 효율이 좋았지만, 소음이 너무 컸다.
이렇게 인적 드문 길로 이동하는 것도 다름 아닌 그 이유에서였다.
만약 최단거리로 목적지까지 달릴 수 있다면, 시간은 훨씬 단축되리라.
안톤은 예전 온-누르에게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천근추라는 수법을 떠올렸다.
천근추란 기를 이용해 몸을 몇 배나 무겁게 만드는 기공술의 응용 기술 중 하나였다.
‘그와 반대로 몸을 가볍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신체에 의지를 불어 넣어 강한 힘을 내는 것은 해 봤지만, 그 무게를 줄이거나 늘리는 것도 가능할까 궁금했다.
안톤은 한 번 해 보았다.
‘되는군.’
착!
물론 아예 소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허나 전에 비하면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은 소리.
‘역시 직접 몸을 움직여야 얻는 게 있는 법이군.’
몸이 가벼워진 만큼, 한 번의 도약으로 뛸 수 있는 거리 또한 더욱 늘어날 터.
안톤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지었다.
“그럼 속도를 좀 올려 봐야겠어.”
* * *
대륙 북부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강을 끼고 만들어진 무역 도시 카르셍.
안톤이 그곳에 도착한 것은 밤이 되어서였다.
‘점심이 지나서 출발했으니, 대충 열 시간쯤 걸린 건가?’
말을 타고 달려도 사흘이 걸리는 거리를 주파하는 데 이것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심지어 이곳까지 향하는 중에 신법에서 소득을 얻었으니, 돌아갈 땐 더 빨리 돌아갈 수 있을 터.
‘그래도 아침까지 돌아가려면 줄기차게 뛰어야겠군.’
안톤은 부둣가로 가서 펠샤인을 꺼냈다.
“약속한 대로 카르셍이오.”
“알아요. 나도 그 안에서 다 보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무식한 이동 방법이군요. 이런 게 가능하다는 건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못했을 거예요.”
“동감이오.”
“아무튼 고마워요.”
“그럴 것 없소. 거래였을 뿐이니.”
어쩜 이렇게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모습일까.
무뚝뚝한 안톤의 대답에 펠샤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굳이 이번 일이 아니라도요, 당신은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에요.”
갑작스러운 칭찬에 멋쩍어진 안톤이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오?”
펠샤인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괜한 질문을 했군. 그럼 이만 가 보시오.”
그렇게 등을 돌리려는 찰나, 펠샤인이 그를 붙잡았다.
“당신은 여자 혼자 먼 길을 떠나는데 걱정도 되지 않나요?”
“글쎄. 게다가 당신은 보통 여자가 아니지 않소?”
마법사.
그것도 보통 마법사가 아니라, 무려 용의 현자의 제자이다.
여행 중에 만나는 어줍잖은 놈팡이쯤이야 별 위협거리도 안 될 터.
“이젠 공주님이 아니라 당신이라 부르네요?”
“그래서 싫소?”
“아뇨. 오히려 정말로 홀가분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썩 나쁘진 않네요. 안톤, 부탁이 하나 있어요. 혹시 마지막으로 얼굴 좀 보여 줄 수 있어요?”
“……그게 그렇게 궁금하오?”
“네. 이대로 떠나면 최소 10년은 궁금해서 제대로 잠도 못 잘 거예요.”
“그럼 그러시오.”
“……정말 끝까지 그럴 거예요?”
밉다는 듯 흘깃 쳐다보는 펠샤인을 보며 안톤은 유쾌해졌다.
“하하! 나중에, 나중에 보여 드리겠소. 그때는 나도 이런 철 뚜껑을 쓰고 다닐 일도 없을 테니 말이오.”
“나중이라니……. 정말 기약 없는 약속인 거 알고는 있어요?”
펠샤인도 안톤도, 오늘 이 자리에서 헤어지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리란 걸 잘 알았다.
이제 그녀는 배를 타고 떠나며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얼굴로 살아갈 테니까.
둘 모두 서로의 얼굴을 모르니 먼 훗날 우연히 만나도, 그저 스쳐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당신도 웃기는 하는군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오. 훨씬 보기 좋군그래.”
“난 원래 자주 웃었다고요. 당신도 처음에 그 미소에 잔뜩 얼었던 거 기억 안 나요?”
“그건 마법 때문이었소. 그리고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고 있지 않소?”
연기가 아닌 진심.
가짜가 아닌 진짜.
그 둘은 비슷하면서도 명확히 달랐다.
“제가 원래 마법 같은 여자죠.”
“그런 당당한 대사는 적어도 얼굴을 보면서 하시오.”
펠샤인은 자기도 모르게 뚫어져라 쏟아지는 안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안톤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이대로 가다간 쓸데없는 말들로 날을 새울 판이었다.
“이제는 정말 가야겠소. 아침까지 왕궁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니 말이오. 아무튼 부디 원하는 삶을 살길 바라겠소.”
안톤은 빠른 걸음으로 부둣가를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 들려오는 외침이 있었다.
“안톤!”
그 부름에 안톤이 등을 다시 돌렸다.
어느새 조금 거리가 벌어진 펠샤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왜 부르는 것이오?”
“나는 이제 여기서 가장 먼저 출발하는 배를 탈 거예요!”
“……?”
갑자기 이게 무슨 얘길 하는 걸까 싶었다.
“그 배! 혹시 나랑 같이 타고 갈 생각 있어요?”
여인들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해린국, 거기서도 가장 미녀였던 여인이 함께 떠나자 한다.
참으로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안톤은 고민치 않았다.
“펠샤인! 나는 아직 당신처럼 자유롭지가 못해서 그렇겐 안 될 것 같소! 그럼 잘 가시오!”
안톤은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도약했다.
* * *
“정말로 가 버렸네요.”
안톤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간 쳐다보던 펠샤인은 대뜸 신발을 벗었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부두 바닥에 몸을 앉혔다.
강물의 표면으로 살짝 닿은 발끝에서 차가운 냉기가 전해져 왔다.
그녀는 한참이나 그곳에 앉아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듬성듬성 있는 불빛이 강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안톤과 나눴던 대화들을 상기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차마 하지 못했던 진솔한 대답들을 듣는 이 하나 없이 혼자 내뱉었다.
-아무튼 부디 원하는 삶을 살길 바라겠소.
“원하는 삶이라……. 근데 어쩌죠? 나는 원하는 게 딱히 없는데.”
게다가 원하는 것이었을지 몰랐던 것 또한 결국 가질 수 없었다.
-나는 아직 당신처럼 자유롭지가 못해서 그렇겐 안 될 것 같소! 그럼 잘 가시오!
“자유롭다라……. 정말로 내가 자유로운 걸까요? 아니, 애초에 그 자유라는 거…… 그것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죠?”
새장에만 갇혀 있던 새에게 강요된 자유란, 결국 가혹한 이념일 뿐이다.
펠샤인은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그 약병엔 그녀의 스승이었던 노파의 유골이 담겨 있었다.
노파는 그녀에게 자신의 고향에 유골을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은 사실 부탁이 아닌 강요이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 있으라는, 그런 강요.
그것이 없었다면 아마 펠샤인은 그냥 강물에 유골을 뿌리고 자신도 뒤따라 몸을 던져 버렸을 것이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아픈 건 싫지만, 이건 마법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전신에 마비 마법을 걸고 물 아래로 한없이 추락하면, 이 차가운 겨울 강물은 아무런 고통 없이 금방 죽음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하지만 스승이 남긴 유언이 발목을 붙잡는다.
“그래, 결정했어.”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살고, 아니면 죽는다.
펠샤인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 맡겼다.
선택의 권한을 누군가에게 대신 맡기는 것은 그녀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조금씩 어둠이 개고 날이 밝기 시작한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지만, 그녀는 초조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어이! 첫새벽부터! 대체 거기서 뭐하고 계쇼?”
선택의 결과가 나왔다.
펠샤인은 살아가기로 했다.
스승이었던 노파의 이름을 대신 짊어진 채로.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해린제일미라던 명성의 여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푸근한 인상의 노파 한 명이 있었을 뿐.
언제나 그랬듯, 자신을 숨기고 다른 누군가를 연기하는 건 그녀에게 쉬운 일이었다.
“배를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