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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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58화
058. 즉위
시녀들의 아침은 보통 사람들보다 빠르다.
윗사람들을 모시기 위해선 일찍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혹시 그 상전이란 자가 예민함이 극에 치달아 있다면 신경 쓸 부분은 배로 늘어난다.
때문에 갈색 머리의 시녀는 행여나 그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눈앞에 벌어져 있는 참혹한 잔상에 크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꺄아아아!”
* * *
시녀의 비명과 함께, 해린의 왕성은 새벽녘부터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페올이 밧줄에 목을 걸고선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여러 사항들을 종합해 우선 사인은 자결이라고 판결 났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시기가 때마침 공식적으로 암계가 시작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차기 왕은 핫산 왕자님이군.”
“하루도 지나기 전에 일을 벌이다니, 대단한 과감함이야!”
그저 그런 말들이 오가며 술렁일 뿐이었다.
허나 정작 그 일의 당사자인 핫산은 아직도 얼떨떨했다.
“설마 그렇게 죽을 줄이야…….”
그의 죽음은 핫산이 지시를 내린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페올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형제의 정이라거나 하는 구차한 이유가 아니다.
그저 그의 입으로 들어야 할 진실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죽음과 함께 여러 의문들은 어둠에 가려지게 되었다.
“허무하군…….”
그가 염원하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나, 그 끝맺음이 여의치 않아 찝찝했다.
“안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말로 그가 자결을 했을 것 같나?”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제 생각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손을 쓴 것 아니겠습니까?”
“음……. 역시 그렇지? 나도 왠지 그럴 것 같네. 거의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들의 정체는 다시 미궁으로 빠지게 되었군.”
그것은 안톤으로서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블라디미르.
도대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다 보니 그들과 크게 휘말리게 되어 버린 안톤은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그렇지만 암만 호기심을 키워 봤자, 그 해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뭐, 큰 상관은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라 저의 목적이니까요. 저는 그들이 어떤 못된 짓을 꾸미건, 그저 조르디가에서 행해지는 수작만 걷어 내면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조르디가만 무사하다면 다른 일은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건가?”
“터놓고 말해서 조르디가 역시 어떻게 되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럼 왜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건가?”
여기 남아서 날 도우며 부귀영화를 즐기지 않고.
안톤은 왠지 뒷말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피식 웃었다.
자신이 그곳으로 돌아가려 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는 결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을 위험에까지 처했다는 데서 오는 복수심 따위의 감정이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받은 은혜는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안톤은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었다.
* * *
조르디가 성 안에 위치한 휘황찬란한 전각.
그 안에서는 둘의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앞에 선 남자가 주로 말을 하고 자리에 앉은 여자는 가만히 듣는 식이었다.
“……이상입니다.”
무언가 구구절절 보고를 읊은 이십 대의 남성은, 은근한 시선으로 백무대주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외모와 젊은 나이에 여인의 몸으로 백무대주란 지위까지 오른 출중한 능력까지.
그녀는 조르디가 내에서 동경의 대상이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서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인간 군상들이 얼마나 널리고 널렸던가?
그런 그들과 다르게 이렇게라도 백무대주를 상관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그는 자신이 참 운이 좋다 생각했다.
“그래. 녀석들이 그런 짓을 꾸미고 있었단 말이지? 알았어. 이제 나가 봐.”
노고의 치하도 없는 무미건조한 축객령.
남자는 한껏 풀 죽은 얼굴로 등을 돌렸다.
백무대주는 그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도리질했다.
“고생했다.”
탁.
문이 닫히고 남자는 이미 사라졌으나, 그의 얼굴이 희희낙락한 표정임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여간 저런 머저리들 때문에 귀찮지 않은 날들이 없어. 왜 내가 이딴 짓을 해야 하는 건지…….”
백무대주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그를 향해 말을 던졌다.
“이제 슬슬 나오지?”
아무것도 없던 평범한 목재 재질의 천장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었다.
평평하던 부분 중 어딘가는 울긋불긋 올라오고 어딘가는 쑥 들어가면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누구든 그것을 본다면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마치 나무에 얼굴이 생겨난 것 같은 기괴한 모습.
허나 이를 목격한 백무대주는 짧게 감상을 내뱉을 뿐이었다.
“변함없이 악취미네.”
천장에 새겨진 얼굴 형상의 입꼬리 부분이 움직이며 살짝 올라갔다.
“악취미라니 너무하십니다. 그나저나 오랜만이군요, 카트락시아 님.”
“그래, 오랜만이네.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한 가지 알려 드릴 정보가 있어서 말입니다. 아마 굉장히 궁금해하실 것 같군요.”
“그래서 뭔데?”
“첫 번째 조각을 입수한 곳이 있다고 합니다.”
서슴없이 대화를 나누던 중, 처음으로 그녀의 입이 닫혔다.
“흐음……. 우리가 가장 빠를 줄 알았는데, 누구지? 가르톤인가?”
“그렇습니다.”
“바다의 조각이라……. 용케 심해 속에서 그걸 찾아냈네? 운도 좋지.”
“모든 전력을 그쪽에 쏟아부은 듯하더군요.”
이를 들은 그녀는 혀를 찼다.
“쯧쯧. 무식한 그 녀석답네. 아니, 오히려 똑똑하다고 해야 하나?”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해린국은 조르디가와는 다르니까요.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랄까.”
“하여간, 그것도 결과를 냈으니 망정이지. 그래서 이걸로 용건은 끝?”
“일단 공식적인 용건은 끝입니다만…….”
“뭐?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해.”
“해린에 철가면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인이 하나 있습니다. 조금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제가 개인적으로 좀 알아보니, 아무래도 예전에 카트락시아 님이 찾던 그 남자 같더군요.”
“그 남자라니?”
“안톤. 암검의 제자인 그 노예 말입니다. 기억이 안 나십니까?”
“아아, 그 녀석 말이지?”
그녀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손을 마주쳤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내버려 둬. 근처라면 모를까. 옆 나라까지 가서 잡아 와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사실 그녀에게 안톤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온-누르를 잡기 위한 희생양이었을 뿐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랄까.
헤스갈이 하도 귀찮게 해서 찾는 시늉이나 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 녀석 귀에는 안 들어가게 잘 부탁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알겠습니다. 헤스갈 사위님에게는 정보를 차단해 놓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별말씀을……. 그나저나 꽤나 강해진 모양이더군요.”
두서없는 말에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의아한 낯빛을 띠었다.
“안톤이라는 그 아이 말입니다. 굳이 인간 중에서라는 전제를 달지 않아도, 그 나이대에선 유례없는 실력이더군요.”
“흐음……. 어느 정도인데 그래?”
“아마 마지막 벽 하나만 부수면 금방 명인급 반열에 오를 것 같습니다.”
그녀는 온-누르와는 붙어 봤으나, 실제로 그 제자인 안톤은 직접 대면해 본 일이 없었다.
그저 말로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을 뿐이다.
듣기로는 일반적인 무예와 방식을 달리하지만, 실력치로 따지면 오러 유저급이라 했던가?
물론 인간 내에서는 매우 빠른 편에 속하는 성취일 터지만, 기준을 달리한다면 언제든 만들어 쓰고 버릴 수 있는 오위보다도 못한 실력이었다.
근데 언제 그렇게 실력이 는 것일까?
“명인급이라……. 그 녀석의 나이가 몇이랬지?”
“아직 스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겨우 열아홉이지요.”
“확실히 인간치곤 빠르네.”
“인류 역사로 비교하자면 대영웅과도 비교될 만한 성장 속도입니다.”
대영웅 제트론.
고대 시절의 인물이며, 블라디미르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 그 이름.
잠시 몸이 굳었던 은발의 여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영웅이라……. 나는 안 믿어. 그래 봤자 겨우 인간이잖아.”
“무례한 충고이나, 인간을 얕보지 마십시오. 그 마음가짐이 지난 패배를 만들어 냈으니 말입니다. 물론 그 아이가 명인급 반열에 오른다고 해도, 카트락시아 님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근데? 그럼 됐잖아?”
화가 난 듯한 여인의 음성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
그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을 하였을 것이다.
언젠가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그때는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허나 소귀에 경 읽기라던가?
더 이상 어떤 말을 해 봤자 그녀를 더 자극시킬 뿐이란 걸 그는 깨달았다.
“그래. 이제 용건은 다 끝난 것 같으니 이만 가 주겠어? 물론 자론, 당신에 비할 바 아니지만, 나도 엄청 바쁘거든 나름.”
“알겠습니다.”
카트락시아의 축객령이 떨어지자, 그는 군말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천장에 새겨져 있던 열굴 형상의 조각은 사라지고, 다시 매끈한 표면이 자리하게 됐다.
이윽고 그가 완전히 떠난 것을 확신한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불쌍한 자론, 당신은 이제 그저 모든 영광을 잃은 과거의 망령에 불과한데, 도대체 그 사실을 언제쯤 깨달을까?”
그녀는 비로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걸치고 휴식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 * *
사방이 어둠뿐인 캄캄한 지하 감옥.
누군가의 한숨 소리가 그윽하게 들린다.
조르디가와 접선을 끝마친 자론의 한숨이었다.
원래 자론은 그녀를 이용해 혹시 모를 변수가 될 여지가 있는 안톤을 미리 제거해 두려 했었다.
“예상대로 카트락시아는 너무 오만해. 아니, 단지 내가 예민할 뿐인가?”
어쩌면 과거 대영웅에 손에 의해 모든 걸 잃었던 경험에서 오는 트라우마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왠지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허나 이곳에 갇혀 있는 그로서는 실질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라도…… 그 녀석을 계속 주시해야겠어.”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지하 감옥.
그 안에 정자세로 앉아 있던 자론이 눈을 감았다.
그의 눈은 이제 어두운 감옥 내부가 아니라, 다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가진 것은 왕자라는 지위뿐이던 핫산은 이제 어엿한 일국의 왕이 되었다.
안톤은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핫산의 호위를 그만뒀다.
적왕선이 완전히 끝난 이상, 이제 그를 위협할 적은 딱히 없었다. 게다가 이제 핫산은 예전처럼 홀몸이 아니기도 했고.
레버르트 남작이 친히 수장을 맡은 친위대가 안톤 대신 철통처럼 그를 지켜 주고 있었다.
아무튼 호위를 그만두니 시간적인 여유가 많이 생겼다.
그렇게 안톤은 별채에 틀어박혀 매일같이 수련의 나날을 보냈다.
사실 그를 찾는 이들은 무척이나 많았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핫산을 왕으로 내세우는 일등 공신인 그와 줄을 대기 위해서 말이다.
귀족들을 비롯해서 상인들, 심지어 귀족 영애를 시녀로 위장해서 접촉하려는 이까지 있을 정도였다.
허나 안톤은 철저하게 외부와의 접촉을 막았다.
권력과 명예 따위의 것들은 그에게 있어서 방해에 불과할 뿐이었다.
칩거한 안톤은 겨우 몇몇 사람만을 만나며 지냈다.
계속 협력하다 친분이 쌓인 레버르트 남작이나, 조르디가에서부터 함께한 클린턴 제오르나, 앞으로도 같이 할 일이 남아 있는 핫산이 그 몇몇 사람 중 하나였다.
새로운 왕으로서 바쁜 업무에 시달리는 중에도 핫산은, 거의 매일같이 안톤을 찾았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펠이 해린을 떠나 제국으로 향할 기일이 잡혔다네.”
허나 평소완 다르게,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다가 떠나던 그가 간만에 왕실 행사에 관한 일을 얘기해 왔다.
“언젭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40일 후쯤 되겠군. 시일이 상당히 촉박해서 말이네. 정확한 일정은 그때가 되어서야 나올 걸세.”
대략 한 달 반 후.
펠샤인은 이제 제국 기사들과 함께 휘황찬란한 행렬을 이끌고 제국으로 향하게 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안톤은 문득 핫산의 눈을 피했다.
일전에 있었던 노파와의 거래가 떠오른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