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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57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3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57화

057. 변화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는 것을 끝마친 안톤이 펠샤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또 안톤이 어떤 기괴한 짓을 시킬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고맙소. 덕분에 정말 많은 성취가 있었소.”

 

이것 역시 빈말이 아니다.

 

인간의 정신을 건드리는 그녀의 마법은, 그간 안톤이 행했던 어떤 정신력 수련 방법보다 효과가 남달랐다.

 

아니, 남다른 정도란 말로도 부족하다.

 

평소대로 수련을 했다면, 족히 수십 년은 걸렸을 성과를 겨우 1년 만에 이루어 냈으니.

 

허나 그 반칙 같던 수련법도 이제는 끝이 났다.

 

더 이상 마법으로 정신을 건드려 봤자 아무런 효과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한계점에 이른 것이다.

 

“아마 이제는 더 귀찮게 할 일 없을 거요.”

 

“정말인가요……?”

 

“정말이오. 이제는 나 스스로 해내야 할 문제니, 앞으로는 매일 이렇게 나와서 도와줄 필요가 없소.”

 

“알았어요. 조금 아쉽기도 하면서 분하네요. 사실 나도 조금 도움이 됐거든요.”

 

그렇다면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안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펠샤인이 떠나가고 텅 빈 공터에는 이제 안톤만이 남았다.

 

그는 손에 쥔 검을 지그시 내려 봤다.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할 때였다.

 

사실 조금 까마득하다.

 

마법으로도 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지금,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힘을 키워야 할지 짐작조차 잡히지 않고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마저 든다.

 

‘너무 정신력을 늘리는 데만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안톤은 혼잣말을 넋두리처럼 내뱉었다.

 

“본다라…….”

 

신안.

 

온-누르는 그에게 그것을 보는 경지라고 말했다.

 

뭐, 온-누르 본인도 직접 몸으로 체득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런 설명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만, 빈약하기 짝이 없는 그 설명은 현 상황에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안톤은 그 경지에 대해 원리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안.

 

본다, 라는 것은 명칭적인 부분일 뿐, 결국 사물이 아닌 신체에 의지를 담는 경지를 뜻했으니,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탐구한다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절반쯤 옳았다.

 

많은 노력 끝에 안톤은 검이 아니라 손, 혹은 다른 신체에 의지를 담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안톤은 검이 아니라 맨손으로도 바위를 부수고 검을 조각낼 수 있다.

 

허나, 여전히 본다, 라는 경지는 뜬구름 같았다.

 

‘내 생각이 틀렸던 걸까?’

 

그것은 결코 누군가에게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군…….’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안톤이 눈을 떴다.

 

그리고 광활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또 다른 상념에 잠겼다.

 

‘그나저나…… 벌써 1년이나 지났나.’

 

 

* * *

 

한 해가 지나가고, 신년이 밝은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1년 동안, 안톤이 나이를 한 살 더 먹어 열아홉이 된 것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선 적왕선의 네 가지 시험 중 세 가지가 결과 지어졌다.

 

시간 순으로 정리하자면, 우선 첫 번째 시험이었던 상계에서 씁쓸한 결과를 맞이했다.

 

카린은 본인이 점쳤던 것보다도 무역에서 훨씬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쉽게도 근소한 차로 1왕자에게 패배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시험, 군계.

 

시험의 내용은 라트만 군도 주변을 활보하는 해적들을 소탕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황제의 지원을 얻게 되었기에, 한층 수월했다.

 

제국의 군함 수십 척과, 안톤 및 레버르트 남작의 활약으로 군도 내 해적들의 씨를 말려 버리며 과도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과도적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 승리로 인해 해린의 정치판이 크게 뒤흔들어졌기 때문이다.

 

약세였던 핫산이 상계에선 엇비슷한 성과를 내고, 군계에선 압도적으로 이겨 버렸다.

 

게다가 제국의 도움마저 받고 있지 않은가?

 

혹시 이러다 핫산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건 아닐지, 힘의 역학 관계에 민감한 귀족들로서는 그런 가정을 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과 관계없이 엄연한 내정간섭이라며 큰 소리 내는 귀족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공주의 혼사로 인한 거래였다는 해명에 다들 입을 꾹 닫았다.

 

이 부분에서 안톤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여인을 물건처럼 여기는 것을 당연시하는 해린의 국민성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던 까닭이다.

 

아무튼 첫 승리가 귀족들로 하여금 핫산 왕자를 다시금 재평가하는 계기를 갖게 한 것은 사실이었고, 이는 세 번째 시험인 정계에서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정계가 시작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1왕자를 지지하던 귀족들의 이탈이 대거 있었다.

 

노파와의 거래로 세뇌 마법에서 풀려난 귀족들이 즉각 큰 반감을 드러내며 떠나자, 그동안 시류에 따라 어쩔 수 없이 1왕자 측에 가담했었던 귀족들까지 우후죽순 딸려 나온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일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핫산은 정계에서 승리를 거두며 두 번째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 말은 즉, 나머지 시험인 암계에서 굳이 승리하지 못해도, 살아남기만 하여도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 정계가 맨 처음 시작되었다면 필시 압도적인 패배를 맞이했을 테니.

 

그러고 나서 만약 연이어 상계가 시작되고, 또 패배했다면, 암계에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쪽은 이쪽이었을 것이다.

 

안톤은 암만 생각해도 중립 기관인 대법관에서 핫산의 편의를 봐준 것 같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적왕선의 역사만 살펴보아도 그렇다.

 

많은 경쟁자들을 얼른 가려내기 위한 암계는, 거의 항상 처음 아니면 두 번째 시험으로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암계가 미뤄졌던 것은 몇 번을 찾아봐도 전례가 없었다.

 

아무튼 그 세 번의 시험 도중에 핫산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다.

 

이미 그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레버르트 남작이나 다른 귀족들처럼 일찍 그에게 가세했어야 한다며 아쉬워하는 이도 있었다.

 

소박하게 혼자서 쟝-그리던의 거리를 거닐던 핫산은 이제 어디를 가든 수십의 무사들에게 호위를 받는 권력자였다.

 

그리고 그런 그와는 반대로, 페올은 몰락해 가고 있었다.

 

 

* * *

 

“으아아아아!”

 

페올의 손에서 잔이 날아가 벽에 부딪힌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하인들은 얼른 달려가 그 잔해들을 치울 생각은커녕, 숨을 내쉬는 것조차 조심했다.

 

그들은 이런 때, 그의 눈에 잘못 띄었다간 썩 좋은 꼴을 보긴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광분 넘치는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변 모든 것들이 그의 손에 의해 망가지고 부서졌다.

 

그러던 중 피부가 상하고 핏방울이 맺히기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체력적으로 지친 것인지, 잠깐의 소요 상태가 있었다.

 

페올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왜!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냐고!”

 

그는 조용히 지난 과정들을 재차 되짚었다.

 

분명 상계까지만 해도 괜찮았었다.

 

아슬아슬하긴 했어도 결국 이겼으니까.

 

다만 조금 방심해 있던 것 같다며, 스스로 자책하고 각오를 되새겼을 뿐이다.

 

그러나 두 번째 시험, 군계 때부터 상황이 변했다.

 

솔직히 아차 싶었다.

 

펠샤인을 이용해 황제의 힘을 빌리는 것은 그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까.

 

페올은 문득 펠샤인의 그 조소 어린 눈빛이 기억나 소리를 질렀다.

 

“젠장, 그 망할 년!”

 

뒤늦게나마 어떻게든 펠샤인을 잘 구슬려 회유해 보려 했을 때 지었던 펠샤인의 그 눈빛.

 

페올은 그 눈빛이 도무지 잊히지가 않았다.

 

그만큼 그의 인생에서 몇 번 없을 치욕스러운 경험이었다.

 

결국 그 또한 매일같이 검은 늑대단을 이끌고 해적단을 몰살시키며,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 꽤 괜찮은 성적을 냈지만…… 수십 척의 군함을 앞세워 아예 군도 전역을 토벌해 버린 핫산의 업적 앞에선 초라할 뿐이었다.

 

결국 군계에선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 번째 시험인, 가장 자신 있어 하던 정계에서까지 져 버릴 줄은 정말 몰랐다.

 

“감히 날 배신해?”

 

그러고 보면, 원만한 관계라 생각했던 펠샤인이 덜컥 감춰 온 비수를 꺼내 들었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협력 관계였던 노파 역시 등을 돌릴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어…….”

 

마지막 시험인 암계가 남았으나,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안 그래도 군계에서 패한 이후부터, 앞뒤 가릴 것 없이 계속해서 동생에게 암살자들을 보내고 있던 중이니까.

 

허나 몇 번을 시도해도 소용없었다.

 

그저 보내는 족족 그 남자의 손에 의해 덧없이 목숨만 잃을 뿐, 동생의 몸엔 털끝 하나도 손대지 못한 실정이었으니까.

 

“그 새끼…….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철가면 칼.

 

가히 무서운 놈이었다.

 

개개인의 무력이 레몽드 백작과 비견됐던 실력의 검은 늑대단의 절반이 넘게 그의 손에 죽음을 면치 못했다.

 

배 한 척을 통째로 갈랐다던가?

 

해적 소탕에서 선보였다던 그 믿기 어려운 신위 또한 아마 사실일 것이다.

 

페올은 두려워졌다.

 

시험이 끝나고 주어지는 한 달의 시간이 이제 곧 끝난다.

 

그럼 정말로 암계가 시작된다.

 

그렇게 된다면 항상 핫산을 지켜 왔던 그의 검 끝이, 자신을 향할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그 검 앞에서 목숨을 지킬 수 있을까?

 

“죽을 거야…… 난…….”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바들 떨던 페올이 어느덧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끝날 순 없어. 그들, 그들의 힘을 더 빌려야 해. 반드시 살아남아 주겠어……. 설령 그 어떤 대가를 바쳐서라도!”

 

그렇게 페올은 독기 어린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며, 한참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 * *

 

어두컴컴한 밤. 파도가 거칠게 일렁인다.

 

인적 없이 황량하게 텅 빈 항구에는 두 명의 인형이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떨어져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카르티온 왕자가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무슨 제안이든 따르겠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꼿꼿하던 그 녀석이 그런 소릴 했다니, 어지간히 궁지에 몰렸나 보군. 근데 처음에 오위 일개 대대를 붙여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걸론 부족했나?”

 

“이미 절반도 남지 않은 모양입니다. 대주만 하여도 벌써 세 번이 넘게 교체됐습니다.”

 

“뭐?”

 

오위들이란 결국 소모품에 가까운 존재들이었기에 그들의 죽음이 딱히 아깝지는 않았다.

 

다만 도대체 어떤 짓을 했기에 그 짧은 시간에 절반이 넘게 당한 것인지, 그 경위는 궁금했다.

 

미천한 존재들이지만, 해린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하나가 충분한 강자였기 때문이다.

 

처음 보고를 올린 은발의 남자가 상세히 지난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흰색 가면의 남자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안 돼. 황제의 손이 뻗쳤다니. 바로 철수하게나. 아직은 그와 대적할 때가 아니니 말일세. 게다가 이미 해린에 온 목적은 이뤘으니 말이네.”

 

“아! 설마 바다의 조각을 찾아내신 겁니까?”

 

“그래. 그러니 미련 갖지 말고 손 떼도록 하게나. 원래 처음부터 이깟 시골 왕국 따위는 겨우 부수입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네.”

 

“알겠습니다. 그 말대로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뒤처리는 확실히 하도록 하게나. 괜한 소리가 황제의 귀까지 들어가면 괜히 그쪽에서의 일에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 말이네.”

 

“베놀라의 뜻대로…….”

 

은발의 남자가 어둠에 섞여 사라졌다.

 

이내 혼자 남은 가면의 남자는 주머니에서 보석 하나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 보석은 빛이 없는 야심한 밤에도 아주 영롱한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 빛에 홀리기라도 한 듯, 가면의 남자는 한참이나 보석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았어. 이제 곧 우리들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질 때다.”

 

촤아아!

 

다시 한 번 파도가 흩뿌려질 때, 항구에는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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