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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55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8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55화

055. 기억

 

 

평화롭고 느긋하던 상황이 급박하게 변하는 건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감지한 안톤은 곧장 손을 허리춤으로 옮겼다.

 

하지만 행동은 거기까지였다.

 

조용히 서 있다가 일이 터지자 순식간에 목전에 칼을 들이민 페르트라는 이름의 무사 때문이 아니었다.

 

“…….”

 

노파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순간,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던 것이다.

 

“괜한 소란 부리려 하지 말거라. 그리고 별로 긴장할 것 없다. 내 제자의 소망을 이뤄 주기 위해선 네가 필요하니, 해를 입힐 생각은 없다. 단지, 오늘 있었던 일을 달리 기억할 뿐이다.”

 

몸은 구속되었으나, 사고는 자유로웠다.

 

안톤은 몸의 속박을 풀어내려 노력하기보다, 노파의 말뜻을 이해하느라 바빴다.

 

‘제자의 소망이라고 한 걸 보면, 완전히 1왕자의 편은 아니다.’

 

안톤은 마법의 신체 구속을 풀고 초인적인 의지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그 상태로 입을 열다니 놀랍구나. 아무래도 선천적으로 마법에 대한 저항 능력이 뛰어난 것 같은데, 과연 펠의 마법이 네게 통하지 않을 만하다.”

 

노파는 한 번 더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천 근의 무게가 몸에 실린 듯, 구속력이 강해졌다.

 

이제는 숨도 쉬기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안톤은 눈에 실핏줄을 터트려 가면서까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내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허! 이제 보니 항마력의 문제가 아니라 고강한 정신력을 가진 것뿐이었구나!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정신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 정말 놀랍다.”

 

“대답……해 달란…….”

 

“끈질기구나. 그래, 네 생각대로 난 언젠가 1왕자를 없애 치울 거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가 아니지. 그래서 네가 경거망동하기 전에, 기억을 없애려는 것이다. 이해가 됐다면 반항은 그만하거라.”

 

노파의 말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자꾸만 반항의 의지가 꺾여 갔다.

 

완전히 세뇌시키는 것도 아니고, 오늘 일을 다르게 기억할 뿐이라지 않는가?

 

노파의 말대로 그냥 가만히 쉬고 싶었다.

 

허나 의지가 꺾여 갈수록, 바위에 파묻혀 있던 원석처럼 빛을 발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 의지는 마치 초원의 어느 야수처럼 흉폭했다.

 

안톤은 회귀하고서 행했던 맹세를 떠올렸다.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아.’

 

안톤은 이를 악물며 한쪽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근육이 찢어지면서 새 나온 고통의 비명이 뇌까지 전해진다.

 

안톤은 그 신호를 무시하고 팔을 움직여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때였다.

 

다급해진 노파가 마지막 주문을 외웠다.

 

“카르안 델타 데로트.”

 

안톤의 시야가 순백색의 빛으로 물들었다.

 

 

* * *

 

“자, 너도 이제 그만 앉거라. 다 설명해 줄 테니 말이다.”

 

펠샤인은 스승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노파는 입을 열기보단 먼저 차를 한 잔 따라서 그녀에게 주었다.

 

펠샤인은 차에 입도 대지 않고 스승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노파는 한층 마음이 무거워진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말해 주려고 했었다. 그게 오늘이었던 거지. 1왕자를 돕고 있다는 걸 미리 말해 주지 않아서 미안하다.”

 

펠샤인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사과를 받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

 

아까 안톤에게 하였던 대답들은 모두 다 펠샤인을 향한 고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승님, 그에게는 말해 주어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요?”

 

펠샤인은 바닥에 뻗어서 죽은 듯 숨을 내쉬는 안톤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가 깨어났을 땐 지금 있었던 일은 전부 다 까맣게 잊은 후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을 돕고 싶은 거라면,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힘을 합치면 되는 것 아닌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다. 적왕선이 빨리 끝나면 끝날수록, 너와 헤어질 날도 빨리 온다는 뜻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

 

“내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이 내 몸을 기어올라 목을 옥죄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제자의 복수보다 자신의 염원을 우선하는 이기적인 스승이라 비난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죽기 전에 내 모든 걸 네게 전해 주고 갈 생각이다. 그리고 내 마법의 정수를 모두 얻어 낸 후에는 그들이 아니래도 네 스스로 복수를 이룰 수 있을 터이니, 그때까지만 조금 기다려 주거라. 그럴 수 있겠느냐?”

 

“……알겠어요.”

 

스승의 뜻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내린 대답이란 내색이 물씬 풍겼으나, 노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한결 가벼워진 안색이었다.

 

“그래, 날 이해해 줘서 정말 고맙구나.”

 

펠샤인을 향해 정이 가득한 시선을 보내던 노파는 처음 펠샤인을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첫 만남 당시 그녀는 형제를 잃은 슬픔으로 세상과 단절해 살아가던 소녀였다.

 

둘의 인연은 여행 중이던 노파가 친분이 있던 당대 국왕의 부탁으로 한 소녀를 치료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 시초였다.

 

노파는 소녀가 지닌 자질에 놀라 덜컥 사제의 연을 맺었다.

 

성급한 결정이었으나 후회하진 않았다.

 

재능 충만하던 펠샤인은 노파의 마법을 물 빨아들이듯 습득했었으니까.

 

스승과 제자.

 

처음에는 그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제자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 가르쳐 주면서 펠샤인은 단순한 제자로 치부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내게 아이가 있었다면…… 분명 이랬겠지.’

 

사실 노파의 힘이라면 제자를 대신해 1왕자를 상대로 복수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렇지만 노파는 그러지 않았다.

 

펠샤인은 노파에게 마치 자식 같은 존재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복수는 결말보다는 결말 이후가 중요해.’

 

모든 것이 끝난 후, 복수의 허망함을 깨달으며 다시 마음을 죽이고 살아갈 제자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게다가 노파가 죽으면 이제 펠샤인은 혼자가 된다.

 

의지할 한구석조차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노파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었다.

 

본인이 기어코 삶에 절망해 체념하고 살아간다면 어쩔 수 없지만, 보다 많은 선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노파가 앞으로 전해 줄 힘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제자리에서 꿋꿋이 자신을 지켜 나갈 힘이 되어 줄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노파는 눈을 반짝이는 펠샤인을 보며 실미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어여쁘고 착한 아이였다.

 

“별거 아니다. 그나저나 깨어날 시기가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있구나.”

 

제자의 질문에 대답을 회피한 노파는 방 한쪽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 끝에는 아직도 죽은 듯 잠을 자는 안톤이 있었다.

 

 

* * *

 

금이 간 창문처럼 공간 전체가 균열이 져 있다.

 

사고의 흐름조차 미미한 이곳.

 

안톤은 철저한 방관자였다. 그는 문득 일그러진 균열 너머를 쳐다보았다.

 

실재하는 육신은 없었으나, 그러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니 이는 손쉽게 행해졌다.

 

균열 너머엔 사람이 있었다.

 

품속에 안긴 아기를 울며 바라보는 젊은 여인이었다.

 

-아이야, 너는 살아야 한단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 여인 앞에는 배불뚝이 남성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눈물을 쓱 닦은 여인이 그 남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명심해요. 이 아이는 대역죄인이에요. 어떤 일이 벌어지건 절대 죽게 해선 안 돼요. 알겠어요?

 

남자는 무언가에 홀린 눈빛으로 아기를 건네받았고, 남자의 손이 낯선지 아기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허공 너머를 바라보는 듯한 짙은 회색의 눈동자.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호수에 돌을 던진 듯 공간에 파문이 일렁이며, 세상이 변한다.

 

그곳은 어두컴컴한 철창 안이었다.

 

거렁뱅이와 다름없는 몇몇 아이들이 그 안에 갇혀 있었다. 옷은 잔뜩 해지고, 해진 옷 사이로는 상처 자국이 자욱하다.

 

배고픔에 찌들어 낡은 거적때기 한 장으로 추위와 싸우는 아이들 중, 붉은 머리의 아이 하나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 공허한 회색 눈이 자신을 책망하듯 노려보며, 다시금 균열 너머의 모습이 또 다른 풍경으로 바뀐다.

 

이번엔 평화로운 분위기의 농장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소년의 나이가 된 회색 눈의 아기는 열심히 농사일을 돕고 있었다.

 

주변 아이들에 비하면 몇 배나 큰 체구다.

 

‘저 아이는…….’

 

이제는 안톤이라도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보아 왔던 회색 눈의 아이는 기억도 희미한 오랜 날의 자신이라는 걸.

 

괭이질을 하다 웅크린 몸을 기지개 펴던 아이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땀을 닦는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다시 풍경은 변했다.

 

붉게 일그러진 하늘엔 잿빛의 연기가 가득하다.

 

좀 전의 평화롭던 농장이 불에 타오르고 있었다.

 

농장만이 아니다. 중심에 위치한 성마저 불타고 있다.

 

간간이 수레나 지나다니던 대로에는 군마를 탄 병사들이 점령하고, 마을 곳곳에선 약탈이 벌어진다.

 

포승줄에 매인 채 포로들과 함께 있는 그 아이는 문득, 영지의 마지막 하늘이라도 기억하기 위해선지 고개를 치켜든다.

 

이제 균열 너머의 광경은 단편적인 기억들만으로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한다.

 

새롭게 팔려 간 검투사 양성소의 생활.

 

피가 가실 날이 없는 콜로세움에서의 생존기.

 

경기 중 그를 맘에 들어 한 코르보 백작 부인에게 팔려 가 성노예 생활을 하며 겪은 수많은 굴욕들.

 

그리고 암살 사건을 막아 영주의 눈에 띄며 기사가 됐던 일과, 여타 기사들에게 배척받으면서도 꿋꿋이 수련해 가던 나날과.

 

소영주의 명에 따라 저질렀던 수많은 인면수심의 악행들과, 때마침 터진 유례없는 대전쟁.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나고 이별했던 수많은 전우들과, 모든 걸 삼킨 전란 속에서 억척같이 살아남은 자신까지.

 

이제 그 종장이 다가온다.

 

“마지막 일검, 당신의 최선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

 

클린턴 제오르.

 

그의 검에서 피어난 붉은 오러가 광활한 파도처럼 그를 덮친다.

 

모든 걸 끝내 버릴 듯한 기세.

 

하지만 그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뒤로도 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오늘도 조용히 해 줄 수 있지?

 

다시 훈련생이 되어 보낸 3년간의 수련.

 

-당신들이 그렇게 말했었지. 검 끝에 힘이 없다고.

 

팔려 간 콜로세움에서의 필사적인 도주극.

 

-누르 공! 구경만 말고 좀 도와주세요. 이제! 놓치겠어요!

 

사막에서 맞닥뜨린 온-누르와 린디아스와의 일전.

 

-네 검은 참 보잘것없구나.

 

그리고 시험.

 

-에잉. 참 꼬인 놈이로고. 그러니까…… 내 제자가 되어 보지 않겠냐고. 이 말이다.

 

그의 제자가 되고서의 나날들과,

 

-그대와 한 번 검을 나눠 보고 싶네.

 

다시 만나게 된 클린턴.

 

-절대로 마지막 경지에 오르기 전까진 이곳에 돌아오지 마라.

 

가주 암살의 누명과 탈출극과 그 과정에 있었던 스승의 희생.

 

-언젠가 반드시 내가 왕이 되어 그대를 위해 블라디미르를 찌르는 검이 되어 줄 테니.

 

핫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하였던 많은 노력.

 

-흐음……. 칼의 본명이 안톤인가 보네요?

 

펠샤인과의 만남과,

 

-어…… 생각보다 잘생…… 아니, 멀쩡하게 생겼잖아요? 그나저나 당신 도대체 몇 살이에요?

 

카린과의 만남.

 

계속 이어진 기억들은 이윽고 의문의 노파를 만나러 향하는 곳까지 도달한다.

 

노파는 평범한 마법사였다.

 

“아니야.”

 

정확한 실력은 모르겠지만 제자인 펠샤인을 무척이나 아꼈다.

 

“아니야.”

 

딱히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노파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온화한 모습에 호감마저 느꼈다.

 

“아니야.”

 

노파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아니야!”

 

괴성을 내지르며, 안톤은 눈을 떴다.

 

 

* * *

 

“아이야, 많이 피곤했나 보더구나. 그렇게 곤히 자는 걸 보면. 일부러 깨우지 않았단다.”

 

노파의 말대로 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찌뿌둥했다.

 

“그렇게 화들짝 놀라면서 깨다니, 무슨 악몽이라도 꾼 것이더냐?”

 

아직도 정신이 멍했다.

 

잠이 덜 깬 아이처럼 말이다.

 

정말로 그것들은 꿈이었던 걸까?

 

혹시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야.”

 

“아까부터 뭐가 자꾸 아니라는 것이더냐?”

 

안톤은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소름이 끼쳤다.

 

“노파께선 혹시 볼-메이르에서 왔습니까?”

 

그의 상식선에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용의 현자가 아니고선 불가능했다.

 

실낱같던 의심은 어느새 확신으로 번졌다.

 

내내 다정한 시선과 말투였던 노파의 눈빛이 세차게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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