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94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94화
094. 기록
온 힘을 다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나 멀리 떨어질 수 있는지가 중요했지, 어디로 가는가는 중요치 않았다.
여관에서의 일이 벌어지고, 그곳을 떠난 후.
불과 몇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숲 한복판에서도 정확하게 위치를 찾아낸 것으로 보아, 그들에겐 그들만의 어떤 추적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전심전력으로 운신술을 펼쳤다.
어딘지 장소를 알아도, 그곳까지 도착하기 위해선 물리적으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곳까지 이동하는 것.
그것만이 헤르시가 출산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각고의 노력 덕택에 날이 밝기도 전에 헤르시가 말했던 카라진에 도착했고, 안톤은 곧장 산파를 찾아갔다. 찾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저 경비에게 돈을 적잖게 쥐여 주며 물으니, 바로 이곳에서 가장 실력 있는 산파라며 위치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과거 세계로 오게 되어 상당한 시간을 가던트와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터득한, 세상 살아가는 여러 지혜들 중 하나였다.
“고마워요.”
헤르시는 분만을 하기 위해 마련된 방으로 들어가며, 희미한 의식으로나마 한마디를 전했다.
분명 그런 말을 할 정도면, 그녀라고 남편이 없어졌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데도.
‘매정하다기보다는…… 음, 잘 모르겠군.’
이건 짐작일 뿐이지만, 헤르시가 감사의 말을 가장 먼저 전한 것은 계산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신의 안위는 물론이거니와 사랑하는 아이의 목숨까지도 위험한 상황이었고, 그녀가 도움을 요청할 인물이라곤 안톤이 유일했으니까.
‘아무튼 강한 여자야.’
안톤은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지금 꽤나 지쳐 있는 상태였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
겨우 한나절도 채 되기 전에 벌어진 여러 일들 때문에 생각을 정리할 틈조차 나지 않았기에 머리가 복잡했다.
“이젠 헤스갈을 욕할 자격도 없게 됐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안톤이 자조 섞인 웃음을 내지었다.
물론 그가 헤스갈처럼 직접적으로 부친의 죽음에 관여한 것은 아니다.
허나, 남아 있던 선택지를 무시하고 죽음을 방관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까 있었던 그 일이, 안톤에게 있어 그렇게까지 거대한 충격으로 와 닿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오랜 시간 전쟁통을 겪다 보니 사람의 죽음이란 것에 감흥이 덜해진 안톤이었고, 거의 평생을 부모를 원망했던 감정이 몸에 남아 있었기에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사실 이건 단순히 수련된 부동심으로 인한 효과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럴 운명이었던 거겠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서 몇 초 후, 안톤은 흠칫했다. 평소에 그리 선호하지 않던 운명이란 단어를 너무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자신을 보고 만 탓이다.
노예로 살아야 하는 인생을 비관하며 신을 저주하고 운명을 거부하던, 아직도 엊그제처럼만 느껴지는 그 당시엔 상상도 하지 못할 행동 아닌가.
“후…….”
부디 머릿속에 가득한 잡념들이 함께 떨쳐 내지길 바라며, 안톤이 한숨을 크게 내리쉬었다.
‘여지껏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자.’
눈을 감고 청각의 범위를 넓게 확장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검 위에 손을 포갰다.
헤르시가 출산을 끝낼 때까지 그 어떤 위험도 이곳에 존재해선 안 됐다.
“으아아아아!”
그러다 보니 문 너머에서의 소리들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사실 굳이 청각을 확대하지 않아도, 헤르시가 내지르는 비명을 듣는 건 무리가 없을 정도였으나, 산파와 조수가 서로 나누는 대화는 꽤나 유익했다.
현재 헤르시의 상태가 어떤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직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으니까.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 듯하군.’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난다.
아직까지 적들의 습격 조짐은 없었다. 분만 과정은 양호했다.
“거의 다 나왔어요. 조금만 더 힘내요.”
응원인지 보채는 것인지 모를 어투인 조수의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잠깐, 이대로 아이가 나오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세상은 모순을 원하지 않는다는 세로게트의 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으애애애애애!”
문 너머로도 선명하게 들리는 세찬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이 어둡게 변했다.
* * *
무의 공간이라면 적당한 설명이 될까.
용의 현자로 인해 가 보았던 정신세계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도대체 뭐가 다른 것일까. 제대로 고민도 하기 전에 대답이 나왔다.
‘시간의 흐름이 달라.’
정신세계가 현실과 비슷하게 흘러갔다면, 이곳은 그 반대였다.
청각을 확장하느라 정신 집중을 하던 중이 아니었다면, 인지하기도 어려웠을 찰나의 간극.
얼핏 어두운 공간을 부유하는 것처럼도 보였지만, 지금 그는 어디론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명백했다.
저 멀리로 보이는,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느낌이 가득한 흰색 빛무리가 이 순간에도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안톤은 직감적으로 지금 자신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중이란 걸 깨달았다.
‘안 돼!’
지난 반년 동안, 어서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걸 바라던 안톤이었지만 그는 이 일을 기뻐할 수 없었다.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이냐!’
아직 그곳에서 할 일이 남았다.
평생을 속에서만 갖고 있던 의문들은 전혀 해소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사라지면 헤르시는 금방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돌아가야 돼.’
거의 지척까지 접근한 그윽했던 빛무리가 광채를 뿌리는 걸 보며, 안톤은 즉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텅 빈 공간을 향해 휘둘렀다.
스르르.
그러자 종잇장이 베어지듯 칠흑의 공간에 틈이 벌어진다. 안톤은 어떤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 틈을 잡고 버텼다.
‘일단은 어떻게든 된 건가……?’
그러나 고비는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드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휘이이이이이!
정적뿐이던 이곳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은 빛무리를 향해서 빨려 들어가고 있었고, 안톤이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뺀다면 그대로 그곳에 빠져들 만큼 거셌다.
안톤은 이곳에 누군가가 있고, 그 존재가 자신을 떨어트려 낼 생각이란 걸 눈치챘다.
어쩌면 그 존재는 신처럼 절대적인 존재일지도 몰랐다.
“웃기지 마…….”
손아귀가 찢어지고 근육이 너덜너덜해졌지만 안톤은 필사적으로 버텨 냈다.
아직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상대로,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 굴복할 순 없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그를 잡아당기던 힘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끝난 건가……?”
그제야 안톤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가장 먼저 그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아까 전에 그의 검이 찢어 낸 공간의 틈새였다.
‘뭐지, 이건?’
찢겨진 공간 너머에는 알 수 없는 그림 같은 것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보고 있으니 그림이 아니라 무슨 글자인 것 같기도 했다.
안톤은 무언가 홀린 인간처럼 그 너머로 손을 움직였다.
“네가 할 일은 끝났다. 그러니 순순히 돌아가라, 율법의 계승자여.”
공간 전체를 울리는 듯한 음성에 안톤은 잠시 호기심을 접어 두었다. 어떤 존재가 그를 향해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음성은 중후했고, 거대한 울림이 있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모습을 드러내시오!”
“어째서 순리를 거부하려 드는가?”
“순리고 뭐고…… 일단 누군지부터 밝히고 모습을 보이지 않겠소?”
“내겐 이름도 형체도 없다. 오로지 한 가지의 임무와 그를 위한 의념만이 존재할 뿐.”
“임무와 의념? 알 수 없는 소리를 해 대는군.”
“나는 세계의 기록자. 더 이상 내 임무를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라, 집행자.”
율법의 계승자니 집행자니 뭐니 하며 이상한 말이나 해 대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다름 아니라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존재가 결코 절대자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제안을 해 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해야 할 일을 끝내기 전까진 돌아갈 수 없소.”
그렇기에 안톤은 배짱을 부리기로 했다.
서로가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아무래도 보다 아쉬운 쪽은 상대인 것 같았으니까.
“이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도 돌아가지 않겠소.”
안톤의 꿋꿋한 태도에 질린 건지, 잠시 말이 없던 그 존재는 다시금 설득하는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그대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해야 할 일도 아니며, 더더욱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걸. 아무리 율법의 힘이라 해도 이미 끝맺음 난 기록을 되돌릴 순 없다.”
“아까부터 율법이니 뭐니 그러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아니 그녀가 어떻게 되는지 알기 전까진 떠날 수 없소.”
“그럼 그것만 알게 된다면 돌아가겠다는 뜻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는 여지가 말에서 느껴진다.
안톤은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리다.”
어차피 더 떼를 써 봤자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고, 일단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다른 수가 생길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허나 그런 안톤을 완전히 신용할 순 없었는지, 스스로를 세계의 기록자라 소개한 그 존재는 뜻밖의 요구를 해 왔다.
“맹세하는가?”
맹세라…….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나, 안톤은 깊이 생각지 않고 대답했다.
사실 이런 맹세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맹세하리다.”
허나 그런 가벼운 마음가짐과는 달리, 이 의문의 존재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듯 보였다.
“좋다. 언약은 맺어졌다. 이는 반드시 이행되리라.”
왠지 모르게 이전보다 강인하게 들리는 음성에 안톤은 불안해졌다.
“아무래도 직접 보는 편이 이해하기 쉽겠지.”
쉬이이이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불가한,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돌풍이 휘몰아친다.
안톤도 이를 항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젠장, 속은 건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뿌리던 흰색의 빛무리가 안톤을 집어삼키는 순간, 굉음을 날리던 돌풍이 잦아들었다.
이윽고 찾아온 완벽한 정적.
그것을 깨트리며 입을 연 것은, 아까는 이곳 어디에도 존재치 않던 한 소년이었다.
“아무래도 당황한 것 같군? 하긴, 자기 손으로 완성된 기록을 비틀었으니 무리도 아닌가?”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인지조차 하지 못했어야 할 세계의 틈을 그가 봐 버리고 말았으니까. 이미 순리가 비틀어졌다면, 그것을 최소화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흥! 핑계는……. 오랜만이군, 기록자.”
“오랜만이란 단어는 내게는 적절하지 않다. 심판하는 자여. 내게 있어 시간이란 결코 순차적인 개념이 아님을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그 답답한 성격이 여전하다는 건 알겠네. 그나저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집행자가 나를 취하는 것도 이미 예지된 일이었나?”
“그렇다.”
“후…… 그럼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이 녀석 안으로 들어와서 정체를 알았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소년이 팔짱을 턱 하고 끼더니 책망하는 눈빛을 짓는다. 영락없이 토라진 아이의 모습이었다.
소년은 별다른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도리질 치더니 눈빛을 바꾸며 은근한 물음을 던졌다.
“그나저나…… 집행자가 내 힘까지 먹어 치우다니, 도대체 이번 적들은 얼마나 강한 거지? 이런 적은 과거에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어떤 대답도 내가 해 주지 못함을 알고 있을 텐데?”
“융통성 없기는……. 이미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이 와중에 그러지 말고……. 응?”
“그렇기에 중심을 잡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참 자기 혼자 잘나셨군그래. 어때? 지금 이 일도 기록에 있었나?”
“…….”
침묵으로 일관하며 말을 아낀다. 소년은 지금 그가 대답하기 곤란해서 대화를 회피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항상 꼿꼿해서 재수 없던 그에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그가 익살맞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거봐, 이미 기록은 틀어졌다고.”
“이 정도는 어떻게든 허용이 가능한…….”
“쯧쯧. 꼭 이런 놈들이 자기한테만 관대하다니까?”
“그, 그건 경우가…….”
“조용히 해. 변명할 것 없어. 우린 그냥 지켜보면 되는 거라고. 이 빌어먹을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