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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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5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91화
091. 운명
회색 눈의 일족.
총인원이 백 명이 되지 않는, 타를 산맥 깊은 골짜기에 사는 소수 민족인 그들은 여타 화전민들과는 조금 다르다.
뭐 사연이 있는 것이야 똑같지만, 그들이 이렇게 외진 산속에서 마을을 일군 것은 타의가 아니라 자의였다.
한 가지의 목적과 오래된 숙원.
일족의 구성원들은 오로지 그것을 위해 일생을 바친다.
마스터 피스의 한 부분인 율법의 조각을 적들에게서 숨기고 지켜 내는 것과, 언젠가 세상에 나올 진정한 계승자를 기다리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 굳게 믿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녀는 일족 내에서도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외부에서 전혀 눈치챌 수 없도록, 율법의 힘을 스스로 몸에 봉인하는 임무도 임무거니와, 일족의 간절한 숙원을 이루어 줄 것은 무녀뿐이었으니까.
“경사구나, 경사야!”
그래서 일족의 무녀인 헤르시가 아이를 가졌을 때, 온 마을이 축제 분위기였다. 원체 숫자가 많지 않은 그들이기에 누군들 자식을 낳으면 관심을 받지만, 무녀의 임신 소식은 특히나 유난스럽기 마련이었다.
무녀의 출산이야말로 일족의 대를 잇는 일과 같았기에.
“수호자의 씨앗이니 이번에는 꼭 사내아이가 나올 거야!”
무녀의 배 속에서 나온 사내아이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대개 백 중 구십구는 여자아이가 나오며, 그 아이가 커서 무녀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보통의 경우였으니까.
헤르시는 마을 어른들의 기대가 못내 부담스러웠다. 별로 큰 기대도 하지 않았고 말이다. 아니, 솔직히 여자아이였으면 좋겠다고 내심 바라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사내아이의 출산이란 계승자의 출현이며, 그것은 동시에 세상에 난세가 닥친다는 말과 동일했으니까.
헤르시는 자신의 아이가 그저 자신처럼 조용하게 일생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렇게 헤르시의 배가 점점 불러 가던 나날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몸 안에 단단히 봉인해 둔 율법의 힘이, 밖으로 서서히 새어 나올 정도로 강해진 것이다. 이대로라면 자칫 적들에게 이 장소가 노출될 수도 있는 상황.
결국 헤르시는 남편이기도 한 마을의 수호자와 함께 록티아로 향했다. 간간이 연락이 닿는 또 다른 일족들에게 이 현상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드디어 율법의 계승자가 탄생했구려. 축하하오. 그나저나 안전한 이곳에서 해산을 마치고 돌아가는 건 어떻겠소?”
헤르시는 그들의 배려를 정중하게 사양하고는,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여정을 꾸렸다.
아직 산달까지는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고, 이곳까지 오며 밖을 겪어 보니 생각보다 그다지 위험하지 않단 걸 알게 된 것이었다.
헛된 자신감이나 오만은 아니었다.
마을 최고의 무력자인 남편이 옆에 있었고, 게다가 헤르시 본인 또한 율법의 힘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마법사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마을 어른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적들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새어 나오는 율법의 힘을 느끼고 찾아온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습격이 시작됐다.
그렇게 지새운 도주의 나날 끝에, 헤르시는 무사히 타를 산맥 근처까지 접어들었다. 허나 그것은 또 다른 고민의 직면과도 같았다.
‘이대로 마을로 돌아갔다간, 모두들 죽고 말 거야.’
수호자와 무녀를 제외한 일족의 인간들은 대부분이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외부 활동을 하는 몇몇 소수는 무술을 익히긴 했지만, 그 수는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그저 여느 화전민들처럼 농사를 지으며 일생을 살아간다.
차라리 싸워야만 한다면, 외려 사로잡혀 약점이 될 여지가 있을 그들이 없는 장소가 나으리라.
그런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하루가 걸렸고, 헤르시는 다음 날이 되면 일단 아이를 낳을 때까지 몸을 숨길 적당한 곳을 찾아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날 밤.
와장창 소리를 내며 창문이 깨지는 순간.
운명이 맞물렸다.
* * *
“젠장, 목표물이 우리를 눈치챘다. 당장 공격한다.”
나타난 복면인들을 보며 안톤은 당황했다. 그 또한 이런 자들이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방 안쪽에서 행해지는 대화를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해, 딱 그 정도만큼만 청각을 예민하게 만든 탓이었다.
콰콰쾅!
뜬금없이 야밤에 시작된 전투.
검사인 사내가 창문을 지키고, 마법사인 여인이 뒤에서 마법을 뿌려 댄다. 그것은 마치 공성전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했다.
복면인들의 목표로 정해진 것은 두 남녀만이 아니었다. 안톤을 향해서도 공격이 가해졌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다니, 이만 죽어라!”
복면인의 쌍수도가 거침없이 안톤의 목을 향해 찔러 온다. 생포할 마음이라곤 단 한 푼도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일검.
허나 그것을 바라보는 안톤의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계획을 방해한 게 누군데. 어이가 없군.”
스윽.
어느새 로브 속에서 출수된 검이 복면인을 향해 휘둘러진다. 육안으로 확인키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툭.
복면인의 목이 아래 수풀가에 떨어졌다. 아마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왜 죽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너무나 빠르게 펼쳐진 일검이라, 검에는 피도 묻지 않았지만 안톤은 습관적으로 검을 한 번 털어 내고는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사태가 한창 벌어지는 여관을 잠시 관망했다. 수십 명의 적을 상대하는 두 남녀는 의외로 아주 선방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실력 있는 마법사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북부에서 흔히 쓰는 말 중에, 마법은 직접 맞아 보기 전까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런 말이 생길 정도로 마법사들의 실력은 직접 겪어 보기 전까진 가늠하는 것이 어려웠다. 단전에 기를 쌓는 무인들과 다르게, 마법사들은 체내에 마나를 축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법사의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는 언제나 경험과 지식이었고, 그것은 암만 신안을 열었다 한들 안톤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었다.
여인의 적절한 지원 마법이 아니었으면, 아무리 오러 유저인 사내라 한들 이렇게 수십 명의 적들을 막아 내지 못했으리라.
“건물을 무너트린다!”
무리 중 수장으로 보이는 복면인이 주변을 향해 외쳤다. 혹여 이 와중에 어디 틀어박혀 있는지 모를 여관 주인이 들으면 기겁했을 명령이었다.
아무튼 다급해진 것은 두 남녀도 마찬가지였다.
온전히 수비에만 집중할 수 있던 유리한 진형이 무너지면 굉장히 힘들어지리란 걸 그들로서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허나 원래 악재란 것은 동시다발적으로 닥쳐오는 법이다.
“으윽!”
조급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마법 주문을 외우던 여인이 갑작스레 바닥에 쓰러졌다.
“부인! 괜찮으시오?”
사내는 그런 여인이 걱정되는 모양이었지만, 적을 막아야 하기에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그저 소리쳐서 어떻게 겨우 안위나 물을 뿐.
“저는 괜찮아요! 지금 몸 상태로 이렇게 마법을 펼치는 건 좀 무리였나 봐요.”
“조금만 참으시오.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소!”
남자가 호언장담하듯 말했으나 그것은 서툰 희망이었다. 신안을 통해 주변을 전부 탐색한 안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실력자들이 복면인들 틈새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겠어.’
원래 안톤은 두 남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계속 주변에서 관찰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일들이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알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으면 저들은 죽는다.’
이제 안톤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럼과 더불어 그것은, 안톤이 이번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망설이게끔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도대체 나는…… 뭐지……?’
이것은 온-누르 때와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물론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지만, 내가 아니면 내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니, 이건 정말 기괴한 일 아닌가.
안톤은 문득 한 철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계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그것에 대한 화두로 평생을 고민에 잠겨 보낸 철학자는, 끝내 신을 통해 정답을 찾았다. 그렇게 신학자가 된 그는 살아생전에 한 가지 이론을 정립했고, 그것이 엔티아네아 성국을 건국한 아넨교의 근본인 그 유명한 운명론이다.
원래 안톤은 운명론을 믿지 않았다. 정말로 신이 존재하며 운명론이 맞는 이야기라면, 노예로 태어나 죽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소리였으니까.
그러나 어린 시절로 회귀하고, 이렇게 또다시 과거로 돌아와 세계의 신비를 느끼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 운명이란 게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고.
무언가 세상을 만들고 조종하는 거대한 존재가 있으리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게 꼭 북부인 중 대다수가 믿는 아넨이 아니더라도.
‘그래, 정말 아넨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혼요종들이 다른 신을 섬길 이유가 없지.’
안톤은 신에 대한 의문은 나중으로 미뤄 두기로 했다. 당장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의문이기도 하거니와, 원래 세계로 돌아가 세로게트에게 물으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테니까.
이렇게 세계의 신비를 직접 경험한 그가, 아넨이 아닌 다른 신을 믿는 이유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마지막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던 망설임을 깔끔하게 지운 안톤이 공중으로 도약했다.
파바밧!
검이 머금은 달빛이 지상으로 흩뿌려진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검무였으나, 이것이 불러온 결과는 참혹했다. 검격에 닿은 이들 중 대다수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휙휙 지면으로 쓰러졌다.
이윽고 땅에 착지한 안톤은 한 복면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딱히 뭔가 다른 실력을 감추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 묘한 분위기군.’
압도적인 무력으로 동료들을 무참히 참격했음에도, 그 복면인은 아주 여유롭게 자리에 서서 안톤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천검술을 쓰는 이를 만날 줄이야. 설마 그쪽에선 제약을 완전히 끊어 낸 건가요?”
뜬금없다는 느낌이 그윽한 질문에, 안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 천검술? 제약? 뭔 소리인지 모르겠군.’
되묻고 싶은 점이 몇몇 생긴 것은 사실이나, 안톤은 침묵을 지켰다.
상대가 자신에 대해 추측할 수 있도록,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평소 그의 버릇이었다.
검을 치켜들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 안톤을 보며, 복면 사내가 실소를 내지었다.
“하긴 그건 말해 줄 수 없는 비밀이겠죠?”
안톤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신안을 통해 적의 무력을 가늠하면,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츳!
안톤의 검이 번뜩이는 그 순간.
복면인의 목이 뎅겅 잘려 공중으로 치솟는다. 안톤은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복면인의 머리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털썩.
‘끝났나?’
이제 안톤도 시선을 떼고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때였다.
“오늘 일은 아무래도 제 실수 같군요. 당신 같은 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걸 상정했어야 했는데.”
바닥을 뒹구는 머리가 입술을 움직이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안톤으로서도 처음 목격하는 기괴한 광경이었다.
“어떻게 알고 방해하러 나타난 건진 모르겠지만, 다시 만날 땐 조금 다를 겁니다. 그럼 금방 뵙지요.”
복면 사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안톤은 실루엣으로 보아 사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음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뭐지?’
안톤은 복면 사내의 시체로 다가가 서슴없이 복면을 벗겼다.
‘이럴 거면 왜 얼굴을 감춘 건지 모르겠군.’
사내의 얼굴은 흉측하단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피부가 녹아내려 있었고, 그것은 머리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자들은 어떨까 궁금하지만……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안톤은 그제야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2층 창가에서, 미처 숨겨지지 않는 두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내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적이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