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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89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7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89화

089. 부모

 

 

서글서글하고 넉살좋은 주인장의 목소리가 짐짓 무거워졌다.

 

안톤은 예상치 못한 행운에 놀라면서도, 혹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대화를 이어 갔다.

 

“그들에 대해 아시오?”

 

“…….”

 

그리고 내심 경계의 빛을 띠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며, 안톤은 거의 항상 두르고 있던 로브의 두건을 올렸다.

 

가려져 있던 앳된 얼굴이 겉으로 내비치자, 가게 주인은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색 눈의 일족이라……. 암, 알고말고. 근데 좀 이상하군. 넌 아무리 봐도 외지인인 것 같은데…… 어떻게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내 부모를 찾고 있소. 누군가 내 출생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면 그들을 한 번 만나 보라 조언해서 말이오.”

 

“아…… 그러고 보니 자네 눈이 그들과 비슷하군?”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혹시 몰라 그들을 찾아가 보려 합니다.”

 

“음…… 그렇군.”

 

“그럼 알려 주시는 겁니까?”

 

“……사정은 딱하지만, 미안하네. 나는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을 것 같네.”

 

과일 가게 상인은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허나 안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완고한 척했을 뿐, 그의 눈빛에서 묻어나는 한 줌의 망설임을 알아챈 것이다.

 

‘내 얘기가 안쓰럽게는 들리는 듯한데…… 아무래도 합당한 이유만 대면 되겠군.’

 

가던트의 옆에서 함께하며 배운 새로운 진리가 하나 있다.

 

세상 어느 곳을 가서도 돈이 힘을 쓰지 못하는 곳은 없으며,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안톤은 겉옷에서 주섬주섬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내 작은 성의요.”

 

허나 과일 가게의 상인은 주머니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되려 언성을 높였다.

 

“……이 사람이 나를 뭘로 보고!”

 

돈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고 화가 난 듯 보였다.

 

안톤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겨우 잡은 실마리마저 놓쳐 버릴 판이었다.

 

“작은 성의라 했지만, 내 전 재산이오. 부디 노하지 말고 그만큼 절박하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소. 제발 그들에 대해서 작은 단서라도 알려 주시오.”

 

안톤의 진심이 맞닿은 것일까.

 

주인장의 고뇌하던 눈빛이 세차게 흔들린다.

 

‘거의 다 됐군.’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안톤이었으나, 그는 결코 그 기색을 겉으로는 내비치지 않았다. 동정심과 수지 타산. 감성과 이성을 모두 건드렸기에 그가 이토록 고민하는 것이었으니까.

 

“후……. 어쩔 수 없군. 절대 어딜 가서라도 내가 이 이야기를 해 줬다고 하면 안 되네. 알겠는가?”

 

“물론이오.”

 

안톤이 다시 한 번 돈주머니를 건넸지만, 주인장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이를 거절했다. 정말로 돈이 아니라 그저 안톤이 딱해서 입을 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꽤 많은 돈이 들어 있는데 그걸 거절하다니, 대단한 사내군.’

 

아마 주인장은 높은 확률로, 젊어 보이는 안톤의 주머니 속에 몇 푼 들어 있지 않을 거라 예상한 건 아닐까 싶지만…….

 

“이제 슬슬 날도 저무는 시기고, 아무래도 장사는 이쯤에서 접어야겠군. 잠시 저쪽에서 기다려 주겠나?”

 

안톤은 주인장이 가게를 정리할 때까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차분히 기다렸고, 이내 할 일을 모두 마친 그가 안톤의 곁으로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나를 만난 것을 보면 자네는 아주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네. 그 어딜 가더라도 일족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극소수이니까.”

 

“극소수……요?”

 

“그래, 혹여 왕이라면 모를까. 일족에 대한 것은 어지간해선 귀족들도 모르는 비밀이지.”

 

그런 비밀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 거요?

 

이런 질문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안톤은 꾹 참았다. 어차피 그의 얘기를 듣다 보면 자연히 해결될 의문이라 여긴 것이다.

 

“20년 전, 이 도시에서 나는 한 소년을 만난 적 있었네. 열 살쯤 되었을까? 눈이 유난히 초롱초롱하고 도시 아이들답지 않게 옷이 조금 누추했던 아이였지.”

 

그렇게 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조금은 길고 지루하게 들릴지 모르는 옛날이야기였으나, 안톤은 눈을 좁게 뜨고는 주인장의 말에 집중했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보자마자 알았네. 아, 저 아이가 뭔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나 보구나, 라고 말이지.”

 

그리고 그것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그 소년은 보호자와 떨어져 길을 잃은 상태였던 것이다. 마침 그날이 휴일이어서 시간이 남던 그는 곤경에 처한 소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이의 보호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네. 그 아이가 말로 설명해 준 특징을 지닌 건물은 이 도시에서 딱 하나뿐이었으니까.”

 

아이를 한참이나 찾았는지 보호자는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고, 그는 그 시간을 아이와 함께 있어 주었다. 보호자는 답례를 하기 위해 그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했고, 술까지 한 잔 더 하며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회색 눈의 일족이란 비밀스러운 혈족의 일원이란 걸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네.”

 

그들의 인연은 단 하루의 것으로 끝맺음 지어지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난 후, 그는 거리에서 우연히 그들을 다시 만났고, 묘한 인연의 끈을 느끼며 자리를 마련해 친분을 다져 갔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됐다.

 

“그들이 아무리 숨어 산다지만, 아예 바깥과의 접촉이 없을 순 없지 않은가? 내가 만난 그는 일족에서 그런 임무를 도맡아 하던 자였네. 그 소년은 그저 경험차 아버지를 따라다녔던 것이고.”

 

“혹시 그자들을 아직도 만나고 계시오?”

 

안톤의 물음에 주인장이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그의 눈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10년 전인가부터 나도 만나지 못했네. 항상 만나던 때처럼,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

 

“……그럼 어디를 가야 그들을 만나 볼 수 있겠소?”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모르네. 일족에 대해 말해 주기는 했어도, 결코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도 집요하게 묻지 않았네.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거든.”

 

“음…….”

 

안톤이 침음을 삼켰다.

 

이 남자를 통해서도 뭔가 뚜렷한 소득은 없었던 것이다. 침울한 기색을 짓는 것이 너무 한 눈에 보여서였을까. 주인장이 안톤의 등을 크게 두들겼다.

 

“너무 서운해하진 말게. 말해 주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그곳이 어딘지 모르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면…… 안다는 말씀이시오?”

 

“예전에 남쪽에서 왔다고 넌지시 말한 적이 있네. 쯧쯧. 정말 숨기고 싶었으면 아예 단서조차 주지 말 것을…….”

 

“그게 어딘지 말해 줄 수 있겠소?”

 

“하긴, 자넨 이곳 사람이 아니었지? 여기서 남쪽이라 부를 만한 곳은 단 한 곳뿐이지. 볼-메이른과 갠드 사이의 두툼한 경계선, 타를 산맥일세. 물론 그보다 훨씬 아래에서 왔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보통 넓은 지역이 아닌지라, 그들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만…… 뭐, 젊음은 뭐든 가능케 하니까.”

 

“고맙소. 정말 큰 도움이 됐소.”

 

“그나저나 참 생긴 거에 비해 순박한 친구였는데, 지금은 뭘 하고 지내려나? 혹시 그를 만난나면 내 얘기를 전해 주게. 나 제샨드 페논이 아직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야.”

 

“꼭 그러리다.”

 

 

* * *

 

그날 숙소로 돌아온 안톤은, 곧바로 가던트를 찾아갔다. 그리고 오늘부로 용병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원래 그를 고용하며 내건 조건이, 언제든 떠나도 괜찮다는 것이었고, 이마저도 겨울 전까지라고 못을 박아 뒀던 상황.

 

가던트는 못내 크게 아쉬운 내색이었지만, 구차하게 안톤을 붙잡지는 않았다.

 

“만약 할 일을 모두 끝내고 나면 돌아와 줄 수 없겠는가? 내 그대의 자리는 계속 비워 두겠네. 언제든 마음이 내키면 와 주게나.”

 

“그러리다.”

 

“그래도 정말 아쉽군. 아마 이번 상행이 끝나면 나는 상단주가 될 건데, 그 최대 공로자가 그 자리에 없다니 말이야.”

 

가던트의 표정은 안톤이 해린을 떠날 때 핫산이 내짓던 표정과 흡사했다.

 

그렇게 가던트와의 인연을 일단락 지은 안톤은 몇몇 인물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그대로 숙소를 떠났다.

 

이런 일이 생길지 몰라 평소 짐을 만들지 않았던 그였기에 가능한 신속한 행보였다.

 

‘타를 산맥이라…….’

 

알아보니 지금 안톤이 있는 곳으로부터 3일 정도 떨어진 곳이라 한다.

 

‘뛰면 하루면 가겠군.’

 

이미 결정을 마쳤고, 이렇게 짐까지 챙겨서 나왔지만 안톤은 아직까지도 혹시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던트를 이렇게 내버려 두고 가는 것이 옳은가에 관한 의문이었다. 허나 안톤은 금방 망설임을 떨쳐 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야.’

 

마치 운명이 부르는 듯하다고 말하면 적당한 설명이 될까. 안톤은 굉장히 묘한 느낌에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용의 현자가 한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커.’

 

평소 눈동자의 색이 특이하단 말을 자주 듣던 안톤이다. 허나 그는 그럴 때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다. 하지만 용의 현자의 말을 듣고 그 생각은 달라졌다.

 

안톤 역시 그간 대륙을 누비면서도 자신과 비슷한 색의 눈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딱 한 번 있었나?’

 

그러나 그것은 기억도 나지 않는 갓난아기 시절의 일이었다. 사실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조차 긴가민가하다.

 

마법으로 이루어진 정신세계에서 재구성된 기억을, 원래의 기억이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무튼 노예 상인에게 안톤을 팔아넘기던 여인의 눈은 안톤과 똑같은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정말 그녀가 내 부모였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그 사건 속에 있었기를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꽤나 서글퍼질 것만 같으니 말이다.

 

안톤은 문득 고개를 절레절레 도리질 쳤다.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미련 같은 것들은 모두 진즉에 털어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군.’

 

이내 상념을 떨쳐 낸 안톤은 뜀박질에 박차를 가했다.

 

 

* * *

 

그리고 그 시각.

 

가던트는 주인공이 없는 송별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마시자, 마셔!”

 

“에잉,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휙 떠나 버리다니!”

 

다름 아니라 안톤의 송별식이었다.

 

원래 이러한 행사는 가던트의 일정에는 없었던 일이다. 그가 저녁에 모든 일원을 소집한 것은 그저 안톤의 부재를 통보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니까.

 

그런데.

 

안톤이 떠나간 것을 말하자마자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마침 때도 늦은 시간이었고 몇몇씩 모여 술을 마시더니, 그만 이렇게 규모가 커져 버렸다.

 

물론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모든 경비를 대신 지불하겠다는 가던트의 한마디였을 테지만.

 

아무튼 가던트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안톤이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혹시 그가 다시 돌아온다는 말은 없었는지요, 단주님?”

 

가던트는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어온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던트가 새로 꾸린 호위단의 부단장으로, 나름 가던트와 꽤나 친근하게 지내던 자였다.

 

참고로 호위단의 단장은 안톤으로, 가던트 상단의 부단주를 동시에 역임하고 있었다.

 

“글쎄.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 오라고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 하하. 자네에겐 잘됐군. 자네는 그때까지 승진일세.”

 

“그렇군요.”

 

가던트의 농담에도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던 부단장은 처음부터 이 질문만이 목적이었는지, 술 한 잔을 깔끔하게 비워 내고서 옆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붙잡은 것은 가던트였다.

 

“세트반, 잠깐 기다려 보게.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네.”

 

“물어보시지요.”

 

도로 자리에 앉은 호위단의 부단장 세트반을 향해 가던트가 은근슬쩍 질문을 날렸다.

 

“솔직히 칼이 떠난 것을 이렇게까지 자네들이 아쉬워할 줄은 몰랐는데…… 혹시 내가 모르는 어떤 일들이라도 있었던 겐가?”

 

그러자 질문을 받은 세트반이 너무나 쉬운 질문이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지금 여기서 그에게 목숨 한 번 빚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 호위단의 모두가 그를 스승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설마 칼이 자네들에게 무학을 전수해 줬던 겐가?”

 

“전수라는 말을 쓰기엔 거창하기 그지없지만…… 그는 배움을 원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인색하지 않았지요. 우리들이 지금껏 살아가며 어떤 고수에게도 받아 본 적 없던 친절이었습니다.”

 

“음…… 그랬군. 아무튼 호위단인 자네들이 그의 떠남을 아쉬워하는 이유는 알겠네. 그럼 인부들이나 다른 자들은 왜 그런 것이지?”

 

“다들 친했으니까요. 이곳에서 칼 단장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겁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고민이나 사연을 잘 들어줬으니까요.”

 

“허……! 나 역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고수가 따로 있었군.”

 

“상단주님께서도 아주 좋으신 분입니다.”

 

“됐네, 이 사람아.”

 

세트반의 의례적인 칭찬에 가던트가 피식 웃었다.

 

“아, 부하들이 저를 부르는군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즐기시지요.”

 

그가 떠나고 나서도 가던트는 홀로 상념에 잠겨 있었다.

 

‘호위단의 용병들에게 가르침을 베푼 것은 자신이 떠나간 이후를 염려해서였던 걸까?’

 

가던트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비정한 상인의 세계에서 몸 담그고 오랜 시일을 지내다 보니, 솔직히 서서히 머릿속에서 잊혀 가던 그런 따스함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그에게 받았군. 내가 가문으로 돌아가 상단의 주인이 되면, 그땐 가훈을 하나 새로이 남겨야겠어.’

 

훗날 대전쟁이 벌어지고 나서도, 꿋꿋이 지켜져 와 그 유명세를 더한 블루 머챈트의 가훈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 어떤 이익이 발생해도, 우리 블루 머챈트는 결코 노예에 손을 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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