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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88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5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88화

088. 단서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온-누르가 가장 먼저 행한 질문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미행한 것인지, 또 이제 자신을 이겼으니 죽일 생각인지. 기타 등등의 여러 중요한 의문들이 산더미처럼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먼저 한다는 질문이 검에 대해 묻는 것이라니.

 

솔직히 말해, 안톤은 그 모습을 보며 약간 기가 질렸다.

 

‘누가 검에 미친 인간 아니랄까 봐…….’

 

온-누르는 대답을 기다리며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그가 쏘아 내는 눈빛이 매섭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사막을 헤매다 우연히 물을 만난 방랑자 같달까.

 

그 강렬한 욕망이 어린 눈빛을 받으며, 안톤은 한껏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아니, 혹시 이게 바로 내가 이 세계에서 해야만 하는 일이었던 건가?’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도대체 뭘까.

 

무심코 던져진 새로운 화두에, 마음이 한껏 흐트러지고 어지러워진다.

 

‘만약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떠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모른다.

 

세로게트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 말했지만, 혹여 미래가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그게 아니면 세계에 모순이 생겨 영영 이곳을 나가지 못할 수도 있고 말이다.

 

‘애초에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일까?’

 

안톤은 지금 이 세계가 모두 환상 마법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기에 이르렀다.

 

솔직히 안톤도 이렇게 실감 나면서도 광활한 환상 세계를 만드는 건 불가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 차라리 그게 세계의 법칙이라는 뜬구름 잡는 소리보단 말이 되지.’

 

현재의 육신을 갖고 과거로 돌아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정연한 가능성이리란 건 틀림없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해도, 너무 쉽게 결정한 건가?’

 

안톤이 대뜸 호수에 몸을 들이민 것은, 상황에 대한 무지와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세로게트가 내건 보상이 가장 컸다.

 

게다가 세로게트는 이렇게 맹세했다.

 

‘절대 해를 끼칠 일은 없다고 했지.’

 

인간의 맹세는 신뢰의 증거가 되기에 부족함이 있으나, 혼요종의 맹세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의 맹세는 신뢰할 만하지. 거짓을 섞거나, 맹세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죽어서 그들의 신에게 갈 수 없게 된다고 믿으니까.’

 

혼요종의 종교관은 거의 세뇌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고의 흐름이 이곳까지 도달하자 안톤은 슬슬 이것이 진짜 과거의 세계든, 마법으로 이루어진 세계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마법보단 실제 과거의 세계라는 쪽일 것 같지만…….’

 

아무튼, 세로게트는 이렇게도 말했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 빼고는,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된다고. 그래 봤자 그 어느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길었던 침묵을 끊고 안톤이 입을 열었다.

 

“기를 버렸기에, 검을 완성할 수 있었소.”

 

그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그자는 어떠한 이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온-누르는 달랐다. 그는 애초부터 무술에 대한 연구 끝에, 이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던 상태였으니까.

 

“……그렇군. 역시 내 가설이 옳았어. 그런데 검의 극의란 것이 기와의 조화가 아니었을 줄이야. 그건 몰랐군.”

 

온-누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직 그가 안톤의 정체조차 알지 못한다는 걸 떠올리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안톤이 무심코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자, 그제야 온-누르가 정신을 차렸다.

 

“날 죽일 목적이라면 그래도 좋소. 다만, 당신의 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려 주지 않겠소?”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검에 대한 호기심을 조금이나마 풀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안톤은 스승의 외골수적인 태도에 고개를 도리질 쳤다.

 

“죽일 생각은 없으니 일단 안심하시오. 그리고 검에 대한 건 차차 얘기하도록 합시다.”

 

 

* * *

 

히힝!

 

익숙한 솜씨로 말을 몰며 안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금 정비를 끝마친 가던트의 마차 행렬을 앞장서서 이끌고 레노테이르의 수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안톤이 한숨을 내쉰 이유였다.

 

‘설마 그것도 아니었을 줄이야…….’

 

안톤은 가던트의 상단이 떠나기 전까지 남은 모든 시간을 온-누르와 보냈다. 매일 아침 정해 둔 시간에 광장 앞에서 만났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그곳에서 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온-누르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는 것이, 이 세계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 여긴 것이다.

 

사실 그에게 이 검술에 대한 지식을 알려 주는 것은 쉬웠다. 그냥 안톤이 그에게 배웠던 대로 알려 주면 되는 일이었으니.

 

파-의-안.

 

온-누르에게 배운 이 수련법을 토대로, 안톤은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그는 대체로 안톤의 말을 잘 이해하는 눈치였지만, 안톤이 가장 애를 먹었던 마지막 경지만큼은 달랐다.

 

“본다는 것을 부정해야 한다니, 이것만큼은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구려.”

 

하기야, 만약 온-누르가 안의 경지에 대해 더 정확히 이해를 했다면 과거의 안톤이 마지막 경지를 뚫는 것이 보다 쉬웠으리라.

 

참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이것이 세계의 흐름이란 생각에 안톤은 혹시나 하던 기대를 접었다.

 

그리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가던트의 상단이 출발하는 날과 맞물려 모든 설명이 끝마쳐졌다.

 

“왜 나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 주는 것이오?”

 

“당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오.”

 

“그렇군. 혹시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세로게트 알-바흐르.”

 

마지막 날 그 대화를 끝으로 둘은 헤어졌다.

 

그러나 안톤은 아직도 과거의 세계에 남아 있었다. 때문에 안톤은 원래의 계획대로 일단 가던트의 호위로 그를 따라다니기로 결정했다.

 

‘일단 계속해서 돌아다니다 보면 되겠지.’

 

 

* * *

 

어느덧 때가 9월에 접어들고도 중순에 다다랐다. 안톤이 과거의 세계로 돌아오고 대략 다섯 달가량이 지나간 셈이다.

 

이제는 누가 봐도 완연한 가을이었다.

 

어디를 가든 바닥엔 낙엽이 수북했고,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는 잔잔하게 식은 지 오래.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처음 임계선이라 여겼던 반년이란 기한까지도 어느덧 고작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안톤은 아직도 가던트의 호위로 지내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 거지?’

 

아예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애써 떨쳐 내며, 안톤은 지난날에 있었던 사건들을 회상했다.

 

그동안은 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상인인 가던트를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게 됐고, 무수한 사건들에 휘말려야 했으니까.

 

뜬금없이 도적 떼를 만나는 것은 기본이고, 느닷없이 정치판에 휘둘려 난처한 상황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 꽤나 유명한 인물들을 직접 만나 보기도 했고, 온-누르처럼 원래 알던 사람을 마주친 적도 있었다.

 

‘유년기 시절의 카린을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지.’

 

펭 제국에 도착했을 때, 가던트는 그곳에서 이주일 정도를 머물렀고 안톤은 그곳에서 극빈처럼 대우를 받았다. 카린을 보게 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똘망똘망한 눈의 카린은 상당히 귀여웠다.

 

아무튼 안톤이 가던트의 본가에서 제일로 놀란 것은 자식과 부인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는 점이다.

 

딱히 이유가 있냐고 은근슬쩍 물어봤더니, 그동안 많이 친해져서인지 가던트는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믿고 일을 맡길 사람 없는 이쪽 세계에선 핏줄이 최고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보아도 가던트라는 사내는 정말 여러모로 다산다난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 번의 상행을 마치고 휴식 목적으로 갔던 본가에서도 치열한 여러 사건들에 휘말렸다.

 

그 혼란스럽던 상황을 떠올리면, 안톤은 아직도 치가 떨렸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그를 블루 머챈트의 상단주로 만든 격인가?’

 

안톤이란 행운이 없었다면 가던트는 그저 비운의 인물로 역사서에서 사라졌으리라. 그리고 가던트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듯 싶다.

 

여러 사건들에서 안톤의 조력이 크게 작용하다 보니, 가던트는 이제 그 어느 누구보다 안톤을 믿고 의지했다.

 

그러나 안톤은 평생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처지이기에, 너무 자신에게 의지하지 말라고 그에게 여러 번 충고하며 겨울이 되기 전에 떠날 것이라 말했다.

 

그렇게 안톤과 가던트 사이에서 마지막 상행이 시작됐고, 그 목적지는 갠드 왕국이었다.

 

‘마치 뭔가가 나를 이끌고 있는 것 같군.’

 

갠드 왕국은 과거 펠샤인의 스승이었던 용의 현자가 안톤에게 일러 준 적이 있던 나라였다.

 

혹시 안톤의 출생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을지 모르는 회색 눈의 일족.

 

그들이 그곳에서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 했으니까.

 

‘아무래도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그러한 예감이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치켜든 것은, 안톤이 갠드 왕국에 도착하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가을날이었다.

 

 

* * *

 

“잠깐 주변 좀 둘러보고 오지.”

 

“예. 다녀오시지요, 부단주님!”

 

안톤의 통보에 허리에 검을 찬 남자가 허리를 크게 숙인다. 그의 눈에는 존경심이 물씬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제 안톤은 예전처럼 평범한 용병의 신분이 아니었다. 뭐, 하는 일이야 여전하지만, 가던트가 아예 그를 자신의 바로 아래 위치에 임명해 버린 것이다.

 

안톤은 대기 중이던 숙소에서 나와 발길이 이끄는 대로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의 주 임무는 상단의 안전이었으나, 이미 안전한 도시에 도착한 후라 그가 할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안톤은 근방을 돌아다니며 회색 눈의 일족에 대한 정보를 탐문해 볼 생각이었다. 아마 예전의 안톤이었다면 이 시도 자체가 막막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간 상인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본 것이 있었기에, 안톤은 무작정 길을 걸으면서도 아무에게나 물어보진 않았다.

 

안톤은 여러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종업원이나 사장들에게 물건을 사는 척하며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대개 지역의 토박이일 확률이 높고, 주변에서 듣는 것이 많다는 가던트의 말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질문을 받은 주민들은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다. 다들 한결같이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반응. 아무래도 일족에 관한 정보는 가던트의 말로 따지면 고급 정보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던트는 길거리에서 얻기 힘든 고급 정보는 대개 귀족들의 입이 아니고선 얻기 힘들다고도 했다.

 

‘귀족들을 만나는 건 아무래도 귀찮은데…….’

 

게다가 귀족들이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자들도 아니었다.

 

안톤의 신분으로는 어림도 없었고, 가던트가 직접 나서야지만 어떻게 얼굴이나 한 번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다.

 

‘일단 오늘은 나 혼자 해 볼 수 있는 만큼 하자.’

 

안톤은 열심히 도시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아직 가 보지 못한 가게는 많았고, 말을 나눠 보지 못한 이들도 많았으니까. 제대로 노력해 보지도 않고서 다른 길을 찾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원래였으면 지루하고 수고스러웠을 탐문 과정.

 

허나 안톤은 결코 이 과정이 지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세상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하니 나름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군.’

 

어느덧 해가 빨갛게 물들어 산등성이 사이로 가라앉았다. 안톤은 이제 슬슬 하루를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가고자 마음을 먹었고, 실제로 그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이었다.

 

길목에 있는 과일 가게에서 안톤은 탐스러운 사과 하나를 구입했고, 습관적으로 예의 질문을 날렸다.

 

“혹시 회색 눈의 일족을 아시오?”

 

솔직히 말해서 크게 기대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헌데 그 과일 가게 주인의 반응은, 오늘 처음 보는 종류의 그것이었다.

 

“그 이름을 도대체 어디서 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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