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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87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9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87화

087. 진실

 

 

안톤이 가던트를 만난 것은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생각 이상으로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가던트는 돈이 가진 힘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것을 잘 활용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안톤은 가던트가 능력을 한껏 발휘한 덕택에, 아쟈스탄에 도착하고서 불과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신분을 획득했다.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칼. 칼로 해 주시오. 성은 굳이 필요 없소.”

 

어차피 써야 하는 가명이라면 전에 쓰던 것이 익숙하리란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칼이란 이름이 적힌 용병패와 더불어 구해 준 것에 대한 두둑한 사례금까지 받은 안톤은 가던트를 마주 보고 섰다.

 

이제 서로의 용건이 끝났으니, 작별을 고할 시간이었다.

 

“덕분에 일이 잘 풀렸구려.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목숨을 구해 준 것에 비하면 너무 작은 일들이라 그런지, 오히려 아직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소. 당신은 충분히 내게 도움을 주었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가던트가 말꼬리를 길게 흐렸다. 그의 눈에는 뭔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겨우 눈에서 망설임을 거두고선 은근한 말투로 이렇게 물어 왔다.

 

“그런데 은공,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시려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용병 일이나 하면서 일단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녀 볼 생각이오.”

 

안톤의 솔직한 대답에 잘됐다는 듯 가던트는 활짝 핀 얼굴로 한 가지 제의를 해 왔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혹시 저와 함께 다녀 볼 생각은 없으신지요?”

 

가던트는 안톤이 대답할 틈도 없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쉴 새 없이 말을 이어 가며 여러 이점들을 설명했다.

 

어차피 용병 일을 하려는 것이라면, 그나마 자신이랑 다니는 것이 편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상인이라 대륙 곳곳을 돌아다닌다. 그 어떤 고용주보다 돈을 많이 줄 것이며, 자신이 고용주라고 무시하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등등.

 

‘역시 상인은 상인이군.’

 

침만 튀기지 않았지, 조곤하단 느낌은 전혀 없는 그 모습에 안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됐소. 그만 얘기하시오. 당신 말대로 하리다.”

 

“아, 정말입니까? 고맙습니다!”

 

그렇게 안톤은 앞으로 가던트와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일단 적당한 숙소를 잡는 일이었다.

 

“적어도 일주일가량은 이곳에 머물러야 할 듯싶습니다. 원래 목적지까지 다시 출발하려면 아무래도 재정비가 필수이기에…….”

 

하기야, 어찌 보면 이것은 당연한 말이었다.

 

호위야 안톤이면 충분하고도 넘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그것만으로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막을 건넜으니 벨푸르들을 처분하고 마차로 바꿔야 하며, 그게 아니더라도 짐을 나르고, 여러 잡다한 일을 도맡아 처리해 줄 인부들은 필요했다.

 

“굳이 내게 이것저것 양해를 구하려 들지 않아도 되오. 편한 대로 움직이시오.”

 

안톤의 대답에 한층 마음이 놓였는지, 한결 좋아진 표정으로 가던트는 일을 보러 여관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 안톤에게 드디어 혼자서 편하게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이게 잘한 결정인지는 잘 모르겠군.’

 

세로게트는 안톤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려면 이곳에서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끝마쳐야만 한다고 했다. 그래서 안톤은 가던트를 구하고, 그의 정체까지 알게 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겼었다.

 

가던트 포우 레이왈츠.

 

그는 카린의 아버지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그는 분명 죽었다. 하지만 내가 있던 세계에선 카린은 고아가 아니었지.’

 

가던트가 권한 제의를 쉽게 승낙한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이번 한 번이 아니라, 계속 그를 지켜 줘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 거지?’

 

예상을 해 보자면, 아마 올해가 지나가기 전이리라. 세로게트가 말하길, 세계는 모순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넉넉히 잡아도 반년 안에는 돌아갈 수 있겠군.’

 

안톤은 가을 끝 무렵에 태어났다. 정확한 시기는 모른다. 그저 유년기 시절, 주인이었던 노예 상인의 말을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그가 말하길, 안톤이 팔려 왔을 땐 정말 갓난아기였고 시기는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안톤이 있는 세계는 4월 중순이다.

 

‘검술을 배우는 대가로 반년의 노동이라면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닌가.’

 

안톤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세로게트에게 검술의 정수까지 쪽쪽 빨아먹으리라 결심을 다잡았다.

 

‘그나저나 일주일간 마땅히 할 일이 없군.’

 

이대로 내내 여관에 틀어박혀 있기도 뭐하다는 생각에 안톤은 밖으로 나왔다. 사실 안톤이 검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그냥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세상 구경을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자꾸 돌아다녀야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지.’

 

아직 에반하임의 봉쇄가 벌어지기 한참이나 이전이기에, 아쟈스탄 성은 인파가 북적북적했고, 활기가 넘쳤다. 몇 걸음마다 마주칠 정도로 혼요종들도 자주 보였고 말이다.

 

그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인간 사회에 적응한 모습이었다.

 

‘돈도 넉넉하겠다. 이것저것 먹어 봐야겠군.’

 

안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입맛이 당기는 것이 있으면 하나씩 꼭 입에 물었다.

 

그러던 중에 느낀 것인데, 여러 종류의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 이것이 안톤이 세 번째로 좋아하는 것이었다.

 

“허허, 그런 보자기를 쓰고 있으면 안 갑갑한가?”

 

그런데 문득 음식을 팔던 상인이 이렇게 물어 왔다.

 

곤색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이는 듯싶었다.

 

‘그래도 한여름은 아니라 다행이군.’

 

사람들의 옷이 한 꺼풀 얇아지는 뜨거운 여름에도 이런 칙칙한 로브를 입고 다니면 훨씬 눈에 띌 것이다.

 

‘그 전에 모든 일들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것은 굳이 여름이 아니라도 가장 1순위의 바람 사항이다.

 

아무튼 그래도 이 로브에는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

 

바로 검을 차고 밖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이다. 안톤이 전에 쓰던 대검이야 어떻게 하든지 간에 가리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이 정도 크기의 장검은 로브 안쪽에 잘 메고 다니면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니, 안톤은 중간에 가던트를 만나기도 했다.

 

상당히 바쁜 와중인 것 같기에 그저 멀리서 봤을 뿐, 다가가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그는 열성적인 얼굴로 누군가와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튼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지.’

 

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는 카린의 말과 달리, 그는 안톤이 딱히 별말 하지 않아도 배려해 주려고 극성을 부렸다.

 

‘이렇게 밖을 나돌아 다니면서 어떻게 자식이 그렇게 많은 건지……. 신기할 노릇이군.’

 

가던트에게 듣기로, 그가 본가로 돌아가 지내는 것은 고작 1년에 두어 번, 기간은 결코 한 달을 채 넘기지 않는다고 들었다. 후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쉴 틈도 아깝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나저나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할 건 다 하는군.’

 

딱히 색을 밝히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혹시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툭.

 

안톤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치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딱히 별난 일은 아니었다. 대로변에는 인파들이 바글바글했고 걷다 보면 어깨가 부딪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으니까.

 

그런데.

 

살짝 부딪치고는 스쳐 가듯 빠르게 걸어가는 남자의 옆모습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진다.

 

안톤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재차 확인했다.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긴가민가하는 마음은 더욱 커졌다.

 

‘설마…… 그런 우연이 또 있으려고.’

 

안톤은 신안을 개방했다.

 

그러자 일반인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의 신비들이 그의 눈에 가득 찼다. 처음에는 멀미가 날 정도로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느덧 완전히 익숙해진 세상이다.

 

안톤은 사내의 뒷모습을 집중해서 살폈다.

 

‘오러 마스터……!’

 

무의 끝이라 불리기도 하는 마스터의 경지.

 

그러나 그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기운이 움직이는 경로와 형태 같은 것들이 자신이 아는 무공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는 것이었다.

 

암혼경.

 

그것은 그가 지닌 무공의 정수를 담아 직접 엮어낸 책이었다 .

 

근데 남자의 체내에서 순환되는 기의 형태가 그 책에서 보았던 것과 같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또 외웠던 안톤이기에 착각했을 확률은 극히 미미했다.

 

‘정말로 스승님이라고……?’

 

이미 거의 확신의 수준에 도달했지만, 기왕지사 확실히 알아보자는 생각에 안톤은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톤이 발걸음을 빨리 옮기면 옮길수록, 쫓던 사내 역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쓱 빠진 사내는 본격적으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안톤도 더욱 속도를 올려 그를 뒤쫓았다.

 

‘아무래도 나를 눈치챈 듯한데…….’

 

그렇다면 참으로 놀랍다.

 

그것은 하루 24시간 내내, 기공술을 발휘해 자신의 영역 내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다닌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걸렸다는 생각에 안톤은 전력을 발휘해서 운신술을 펼쳤다. 그러자 양측의 간격이 서서히 좁혀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사내가 휙 하고 갈림길 사이로 들어갔다. 안톤은 그가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따라 방향을 꺾었지만,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모습을 숨겼을 뿐.

 

‘뒤다!’

 

챙!

 

안톤은 급하게 등을 돌리며, 느닷없이 행해진 기습을 손으로 반사적으로 막아 냈다. 그러며 사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공을 잃고서 폭삭 늙었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봐서인지 좀처럼 어색하게만 느껴지지만, 사내의 정체는 온-누르가 맞았다. 다만, 처음 봤을 때보다도 훨씬 젊은 모습이었다.

 

“잠깐만……!”

 

안톤이 입을 열며 뭐라 소리치려 했지만, 그것은 이어질 수 없었다.

 

첫 수가 가로막히자, 온-누르가 검에 형형한 오러를 피워 낸 것이다.

 

‘문답무용이라 이건가? 아무리 뒤를 따라왔다 해도 다짜고짜 검부터 날리고 보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온-누르의 눈에는 살기가 풀풀 넘쳐흘렀다.

 

마치 피부를 만지면 만진 손이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분위기.

 

그가 기억하는 온-누르는 거칠긴 해도, 이렇게까지 공격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하긴…… 20년이면 강산도 두 번이나 변하는 시간이니.’

 

이대로 당장 대화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리라.

 

그렇게 판단을 내린 안톤은 일단 로브를 들추고, 허리춤에 매어진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쏜살같은 속도로 온-누르가 안톤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왔다.

 

‘정말 죽일 생각이군.’

 

마스터의 경지, 현경에 오른 무인이 진심으로 살의를 담아 쏘아 내는 일검이다. 아무리 안톤이라고 해도, 진심을 다하지 않으면 막을 수 없다.

 

안톤은 집중력을 한껏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 언젠가 한 번 하였던 경험처럼 모든 사물들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톤은 그 찰나의 간극 속에서 온-누르의 검에 새겨진 결을 찾았다.

 

‘이제야 검기와 검강의 진정한 차이를 알겠군.’

 

보통 남부 지역이서는 화경과 현경 사이의 구분을 검강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했다. 그러나 무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남부와는 다르게, 북부에서는 그 두 가지를 몽땅 뭉뚱그려 오러라고 칭한다.

 

물론 마스터의 오러라는 뜻에서, 마스터 오러라고 수식어를 붙여 주긴 하지만, 결국 궤를 같이한다.

 

그것은 북부인들이 오러 유저의 오러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았다.

 

‘검기와 다르게, 검강은 좀처럼 결을 찾아볼 수가 없어.’

 

말 그대로 흠을 찾아보기 어려운 완성된 오러.

 

그렇지만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어도, 완전에 가까울 뿐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일까. 온-누르의 오러에도 결은 존재했다.

 

물론 안톤으로서도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보이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만약 정말로 어떤 흠도 없을 만큼 완벽한 오러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공의 끝이라 할 수 있겠군.’

 

그리고 그런 검을 휘두르는 무인이 존재한다면, 지금의 안톤으로서는 이길 수 없으리라.

 

과거의 스승을 상대로, 이렇게 또 깨달음을 얻게 되니 뭔가 세상사가 묘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것은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휙!

 

검을 휘두르는 도중에야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세로게트가 스승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군.’

 

겉보기로 평범한 철검에 의해 온-누르의 검이 두 조각으로 분리되어 지면에 닿는다. 금속 특유의 마찰음이 인적 없는 골목길에 울려 퍼지고, 온-누르가 당황한 얼굴로 반쪽만 남은 자신의 검을 바라본다.

 

‘설마 스승님을 패배시키고 이 검술을 알려 줬다는 그 사내가, 바로 나였을 줄이야…….’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은 안톤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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