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86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86화
086. 은공
목에서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가던트 포우 레이왈츠는 눈을 떴다. 그의 목에는 날카로운 검이 맞닿아 있었다.
가던트는 자신의 목을 겨눈 검의 주인을 노려봤다.
칼런 무클란.
도적 떼를 만나 가문의 호위들을 몽땅 잃어버린 이후에, 어쩔 수 없이 고용한 용병단의 단장.
그의 얼굴을 확인함과 동시에, 가던트는 현재 자신의 상황을 곧장 이해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내 운은 여기까진가 보군.’
관록 있는 상인들은 용병단을 고용하는 것을 꺼린다. 안 그래도 다루기 어려운 것이 용병이란 작자들인데, 우두머리까지 있으면 여정 내내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잡힌 상단의 경우, 돈은 좀 더 많이 들더라도 괜찮은 용병단과 전속으로 계약을 하든가, 그게 아니라면 직접 한 사람씩 골라 사병을 만들기도 한다.
가던트 또한 그런 상인들 중 하나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는 호위대를 꾸릴 때 구성원의 인성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 그리고 그들과 쌓인 유대감을 바탕으로 수많은 고난을 헤쳐 가며 승승장구했다.
허나 그것은 딱 한 달 전까지의 일이었다.
한 달 전, 츠레이바로 가던 중에 도적 떼들에게 습격을 당했고, 공을 들여 꾸린 호위대가 전멸했다.
단신으로 사막의 도시에 남겨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가던트는 어쩔 수 없이 용병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도시 내에서 가장 믿을 만한 용병단을 골라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그는 상인이다.
상인이란 모름지기 만일의 상황을 상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그는 용병단 외에도, 개인 용병들을 열 명 정도 더 고용을 했고 그들에게 자신의 호위를 맡겼다.
혹시나 자신이 지닌 물품들의 가치를 눈치채면 그들의 욕심이 동할까 봐, 물품의 정체를 평범해 보이는 것으로 감췄고, 이내 어리숙한 신참 상인을 연기했다.
자신을 노려 봤자, 위험을 무릅쓸 만큼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허나 그의 그런 노력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그의 주변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고, 따로 고용한 용병들도 저항 한 번 못 하고 당했는지 싸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완벽한 준비 끝에, 단 한순간에 모든 걸 끝내 버린 것이다. 저들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과연 내가 협상을 할 수 있을까?’
상인이란 모름지기 입으로 먹고사는 직종이고, 그는 그쪽 분야의 전문가다. 대화를 통해서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은 그에게 가장 익숙한 일이며, 또 자신 있는 일이다.
헌데, 이번만큼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부터 치밀어 오른다.
10년이나 된 오래된 용병단이 이런 짓을 하는데, 아직까지 소문이 나지 않았다는 건 딱 하나를 뜻했으니까.
살인멸구.
일을 처리함에 있어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용납하지 않았고, 철저히 용병들의 입단속을 해 왔기에, 그들의 평판이 그렇게 좋았으리라.
‘어설프게 진행해선 안 된다. 10년간 비밀을 지켰던 노력에 버금갈 만한 당근을 제시해야 해. 아예 이쪽에서 발을 떼고 평생을 놀고먹고 살 수 있을 당근을!’
침을 한 번 크게 삼킨 가던트가 입을 열었다.
“날 죽이지 않는 쪽이 이득이다.”
“항상 상인들은 그렇게 말하더군.”
여전히 목에 칼을 겨눈 채로 칼런이 코웃음 쳤다.
여기까지는 가던트의 예상대로였다. 허나 중요한 것은 적어도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것이다.
그는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말을 이어 붙였다.
“내 이름은 가던트 포우 레이왈츠. 블루 머챈트의 직계 혈족들 중 하나다.”
그 말을 들은 칼런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닌 양측 업계다 보니, 그 역시 블루 머챈트가 어떤 단체인지 잘 알고 있었다.
“블루 머챈트라고? 이거 더 살려 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군.”
“내 가문에 몸값을 요구해라. 얼마를 원하든, 내가 반드시 그 금액의 열 배를 지불하도록 만들겠다. 어떤가?”
용병과 도적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인생 역전의 한탕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가던트는 그 점을 노렸고,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듯했다.
“블루 머챈트의 직계라더니, 정말 가진 돈이 많은가 보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화를 듣고 있던 부하 용병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시작된다.
허나 이를 들으며 샘솟던 가던트의 희망은 금세 무참히 짓밟혀 버렸다.
“죽인다. 어차피 이놈의 물건이면 10년은 이 짓을 안 해도 먹고살 수 있을 돈인데, 그런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지.”
“알겠습니다.”
주변의 용병들은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가던트는 문득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클란 용병단은 생각 이상으로 우두머리의 의사 결정력이 훨씬 더 강한 모양이었다.
“그럼, 잘 가시게.”
칼런이 역수로 쥔 검을 허리까지 치켜들었다.
‘아아, 끝인가…….’
그리고 그때였다.
구원자가 나타난 것은.
* * *
‘이거 참…….’
벌판에 벌어진 참극을 멀리서 보며, 안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길을 묻기 위해 왔을 뿐인데, 한창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어째 단 하루도 편하게 가는 날이 없는 것 같군.’
안톤은 허리춤에 묶어 놨던 검을 꺼내 들었다. 전에 사용하던 대검과는 규격의 차이가 상당해서 약간의 위화감을 들지만, 충분히 좋은 검이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일단 빌려 오긴 했지만, 어지간해선 최대한 검을 사용하지 않고 세로게트에게 돌려주고 싶었던 안톤이다.
헌데, 아무래도 벌써 이 검에 피를 묻혀야만 할 것 같았다.
‘근데 과거의 인간을 내가 죽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의문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갔지만, 안톤은 고개를 저었다.
세로게트가 말하길,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고 했다.
게다가 아직 생존자가 하나 남아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파란 머리라니, 좀 신경이 쓰이는군.’
설마 그런 우연이 있을까 싶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톤의 발걸음이 이전보다 더 빨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바람을 가르는 독수리처럼 질주하던 안톤이 이내 자리에 당도했다.
푸른 머리의 사내의 목을 향해서 검이 매섭게 찔러 가고 있던, 바로 기가 막힌 그 순간이었다.
챙!
내려치던 검의 궤도가 비틀어지다 못해, 손에서 검을 놓쳐 버린 갈색 머리의 사내가 안톤을 보며 당황했다.
“누, 누구냐!”
하기야, 비밀스럽게 일을 벌이던 와중에 기다란 로브로 모습을 꽁꽁 감춘 괴한이 귀신처럼 나타났으니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도적으로 돌변한 용병들인가?’
대강 상황을 이해한 안톤은 신안을 개방해 적들의 무위를 가늠했다.
신안을 열어야만 하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수준이 궁금했을 뿐이다.
적들의 숫자는 대략 서른 명 안팎으로, 거의 대부분이 마나 유저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눈앞의 남성은 거의 마나 유저의 끝에 도달한 듯해 보였다.
안톤이 계속해서 싸워 왔던 적들에 비하면 잔챙이라고 하기도 뭣한 수준.
‘하긴 이게 정상이지.’
원래 화경의 무인은 거의 기사들부터이고, 그 외의 자들 중에서는 상당히 드문드문 존재하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오러 유저의 문턱에 있는 저 남성의 수준은 꽤나 독보적인 셈이다.
“로브를 벗고 정체를 밝혀라.”
“거절하지.”
안톤의 즉각적인 거절에, 남자가 부하들을 향해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용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안톤을 원형으로 포위했다.
‘군대에 있던 자인가? 지휘가 능숙한데…….’
딱히 감탄한 것은 아니다.
그냥 짧은 감상이었을 뿐.
안톤은 이 상황을 대화로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원래 예전부터 안톤은 도적놈들을 싫어했다.
노예로 지내던 전생에 알던 노예들 중 거의 대부분이 도적놈들에게 당해 노예로 전락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한 어린 시절에 박혀 버린 사고방식은 커서까지도 이어졌다. 그래서일까? 기사가 되고, 전쟁터를 오가던 중에도 안톤은 유독 도적놈들에게만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절대 일어나지 마시오.”
아직 땅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를 향해 경고를 날린 안톤은, 한 점의 자비도 없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쉬이잉!
한차례의 파공음이 지나간 후.
한층 혈향이 진해진 벌판에는 뜻밖의 고요함이 찾아왔다.
정체를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광경에, 가던트는 한참이나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계속해서 눈을 크게 뜬 채, 경악하고 있을 뿐.
“이거, 너무 놀라서 경황이 없었군요. 구해 줘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아직도 미친 듯 요동치는 가슴이었지만, 가던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나 안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나는 가던트 포우 레이왈츠라는 상인이온데,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은공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은혜는 내 반드시 갚겠습니다.”
레이왈츠라는 성을 듣고 신비한 인연의 끈에 놀라기도 잠시, 안톤은 세로게트의 말이 떠올라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안톤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는지, 가던트가 황급히 말을 붙였다.
“이거, 방금 제 질문을 잊어 주시지요. 결코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으니.”
“고맙소.”
“아니 아니, 고맙다는 말은 삼가 주시지요! 감당키 어렵습니다.”
“알겠소.”
뭔가 계속 안톤의 대답이 단답이어서 그런지, 가던트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강에서 건져 냈는데 보따리 내놓으란 듯해 정말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만…… 혹시 근처의 마을까지만 절 데려다주실 순 없겠는지요?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길만 물어보려고 왔던 참인데, 돈 문제까지 단박에 해결이 되다니.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다는 생각에 안톤의 표정이 밝아졌다. 물론 로브로 얼굴이 거의 가려졌기에, 가던트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대답이 없는 걸 거절이라 여겼는지, 가던트의 낯빛은 그와 반대로 어두워졌다.
“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어디까지 가시오?”
“아쟈스탄이 원래 목적지였지만, 근처에 아무 마을까지만 가면 됩니다. 거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소. 아쟈스탄이라. 잘됐군. 나도 그곳으로 가던 중인데, 같이 갑시다.”
가던트가 정말 새삼 기쁜 얼굴로 쾌재를 외쳤다.
“아, 고맙습니다! 그럼 죄송한데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실 수 있겠는지요? 벨푸르들을 몰던 인부들이 모두 죽어서…… 아무래도 끈으로 다 이어서 직접 몰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벨푸르는 츠레이바에서 말처럼 사용되는 짐승으로, 인간에게 온화하고 사막에서 장거리 이동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그러시오.”
안톤의 허락이 떨어지자, 혹시나 안톤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가던트는 그 어떤 때보다 날렵한 몸짓으로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였다. 그가 길을 떠날 준비를 모두 끝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 그럼 갑시다.”
안톤이 먼저 발을 떼자, 조금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따라가던 가던트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길은 저쪽입니다만……?”
“아, 그랬군.”
안톤이 능청스럽게 등을 돌려 다시 걸음을 내뻗기 시작했다.
어째선지 원래부터 길을 몰랐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는 그였다.
* * *
안톤이란 든든한 동행을 얻게 된 가던트였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쳤다.
검문소를 지나기 직전에, 안톤이 신분패가 없다는 걸 고백한 것이다.
“탈주 노예라고 속이고 들어가서 새 신분을 만들 생각이었소만…….”
탈주 노예!
그 단어를 듣자 가던트는 뭔가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무지막지한 무력 때문에 생각도 못 해 봤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가만 보면 아쟈스탄으로 간다면서 길도 모르는 것하며, 모습을 감추는 것까지…….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는 것 같군.’
설사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는다 하여도, 가던트는 안톤을 노예라고 무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노예고 귀족이고, 신분이라는 것은 어차피 인간이 만든 사회적 구분이며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안톤이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아무래도 그 사실을 알리고 싶은 건 아닌 듯하니…….’
가던트는 조심스럽게 안톤에게 제의했다.
“탈주 노예라고 하기보다, 차라리 제 용병으로 위장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레노테이르가 탈주 노예를 다 받아 주긴 하지만, 그냥 받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5년은 도시에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지요.”
“몰랐소.”
“자기랑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기에, 꽤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레노테이르인들조차도요.”
“그렇군. 그럼 그렇게 합시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꽤나 곤란해질 뻔했구려.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상인이란 무릇 진심을 숨긴 빈말에 익숙해야 하며, 평소 칭찬에도 결코 인색하지 않는 족속들이다.
허나 가던트가 방금 행한 말은 순전히 진심이었다.
그는 안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고, 어떻게든 그를 돕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