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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85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2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85화

085. 과거

 

 

거칠게 요동치던 호수의 표면과는 다르게, 수면 아래는 꽤나 잔잔했다.

 

물론 미미하게 떨림이 존재했으나 그 떨림은 이내 금방 잦아들었다.

 

‘이제 됐나?’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다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안톤은 호수 아래로 향하던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헤엄쳤다.

 

“푸하!”

 

안톤은 물 바깥으로 머리를 끄집어내고서야, 이변을 눈치챘다.

 

‘왜 이렇게 어둡지?’

 

하늘을 바라보니, 중천에 떠 있어야 할 태양 대신 큼직한 보름달 하나가 떠 있다.

 

이 무슨 기이한 현상일까 싶었지만, 일단 안톤은 호수 바깥으로 나왔다.

 

바로 좀 전에 세로게트와 대화를 나누었던 오두막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앞에 있던 아렛과 카린, 세로게트는 온데간데없었다.

 

안톤은 일단 혹시 일행들이 오두막 안에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그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목 뒤에서 서늘한 감각이 피어난다.

 

그리고 안톤은 목에 닿은 이 차가운 물체가 검이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뭔가가 이상해 가뜩이나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뒤까지 접근을 하고, 검까지 들이밀다니.

 

‘엄청난 고수로군.’

 

안톤은 천천히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있을 의문의 인물을 향해 말했다.

 

“내가 뒤를 돌아봐도 괜찮겠소?”

 

“허락하지.”

 

승낙이 떨어졌다. 안톤은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그런데 자꾸만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뭔가 목소리가 익숙한데……?’

 

이내 완전히 몸을 돌려 정체를 확인한 안톤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불과 몇 분 전에 대화를 나눴던 그가 자신에게 검을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세로게트?”

 

다만 아까의 온화한 얼굴이 아니라, 매정하고도 싸늘한 얼굴이었다.

 

“넌 누구냐. 어떻게 내 이름을 알며, 어떻게 이곳까지 침입했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오? 장난이라면 그만두시오. 기분이 썩 좋진 않으니…….”

 

그러나 이 상황은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듯, 세로게트는 검을 조금 더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검 끝이 피부를 살짝 파고들며 핏방울이 맺혀 흐른다.

 

“내 말이 우습게 들리던가?”

 

뭔가 이자는 다르다.

 

세로게트 알-바흐르, 분명 그가 맞지만 분위기가 아예 딴판이다.

 

안톤은 호수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뭔가 잡힐 듯 말 듯 머리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설마…….’

 

아니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안톤은 만에 하나라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날 이곳에 보내면서 이렇게 말하라더군.”

 

“그게 무슨 소리지?”

 

“미래에서 왔다고.”

 

“…….”

 

그런데 당장이라도 자신을 향해 검을 내찌를 것 같던 세로게트가 입을 꾹 다문다.

 

안톤은 괜히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랬군.”

 

무언가 납득이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세로게트가 안톤의 목젖에 대고 있던 검을 내렸다. 그리고 오두막으로 걸어가 문을 덜컥 열었다.

 

“일단 들어오게나.”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자, 세로게트는 부엌으로 가서 의자를 하나 꺼내서 안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거실에 있는 천 의자 위에 몸을 앉혔다.

 

아까 호수에서 폭발음이 생기기 전과 똑같은 구도였다.

 

“정말로 내가 과거로 온 것이오?”

 

“자네, 설마 아무것도 모르고 온 겐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의 말에, 안톤이 발끈했다.

 

“그야 당신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만!”

 

세로게트가 소리를 지르며 안톤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는 어딘가 모르게 흥분한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화가 난 눈치는 아니었다.

 

“그 어떤 미래의 일도 내게 얘기하지 말아 주겠나? 그리고 웬만하면 이곳에서 만나는 그 어느 누구한테도 말이네.”

 

세로게트의 부탁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딱히 그의 말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다만 안톤은 그 이유가 매우 궁금했다.

 

“왜 그래야 하오?”

 

“그게 자네한테도, 그 다른 누군가한테도 좋을 테니까 말일세. 자세한 건 나중에 미래로 돌아간 뒤에 내게 물어보게나. 그땐 나도 모든 걸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야.”

 

“……알겠소. 근데 아무래도 난 정말로 과거로 온 모양이군.”

 

“아직도 그걸 의심하고 있었나? 슬슬 본인도 느끼고 있을 텐데?”

 

그의 말대로 이게 세로게트가 꾸민 장난이라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지금 벌어진 일이 안톤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거나, 믿지 못할 형태의 일은 아니었으니까.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지만, 안톤은 과거로 돌아왔던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 현상에 대해서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물론 안톤이 경험한 것은 죽음을 맞이하고 어린 시절로 회귀한 것이지, 이렇게 현재의 육신을 갖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일단 지금 이 순간이 과거의 세계라는 걸 인정한 안톤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뒤늦게 날렸다.

 

“……지금이 몇 연도요?”

 

“인간인 자네에겐 제국력이 보다 계산하기 쉽겠지? 지금은 395년이라네.”

 

“395년이라……. 딱 내가 태어난 연도요.”

 

“아마 아직 자네가 어미의 배 속에 있을 때일 걸세. 이 세계는 모순을 원하지 않으니까.”

 

마치 세계에 의지라도 있다는 듯 말한다.

 

뭔가 거대한 비밀이 저 짧은 한마디에 담겨 있는 것 같지만, 안톤은 그에 대해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봤자 미래의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대답만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그냥 다시 호수로 들어가면 되나?”

 

안톤의 천연덕스러운 질문에 세로게트가 처음으로 웃음을 내지었다.

 

“껄껄. 그게 그렇게 쉬울 리가 있겠나.”

 

근데 왠지 그 모습이 너무 얄궂게만 느껴지는 건, 아무런 정보도 없이 과거로 끌려와서일까.

 

‘돌아가면 그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준다고 했지…….’

 

적어도 무대가의 노동은 아니라는 것에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건, 아직도 남아 있는 노예근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내 잡생각을 정리한 안톤은 이어지는 세로게트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자네가 이곳에 왔다는 건, 이곳에서 자네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세계가 판단한 것일세. 그리고 그것을 모두 마치면 자네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네.”

 

“해야만 하는 일이라니? 그게 뭐요?”

 

“그야 나도 모르네. 그렇다고 어렵게 생각하진 말게나. 그냥 되는대로 행동하다 보면, 언젠가 그렇게 될 테니 말이야.”

 

걱정 말라는 듯 말하는 세로게트였지만, 안톤은 왠지 일이 굉장히 어렵게 흘러갈 것 같다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지금 말하는 게 혹시 교단에서 말하는 그 운명론 같은 거요?”

 

“뭐, 정확히 말해서는 다르지만…… 비슷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군. 아무튼 그럼 이제 대충 설명이 된 것 같으니, 이만 떠나 주겠나?”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안톤이 짐짓 당황했다.

 

“아니, 이런 경우 없는 일이 어디 있소? 멋대로 과거로 보냈으면 적어도 조금은 더 자세히 알려 줘야 하는 것 아니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네만…… 알려 줘야만 하는 것은 이미 다 알려 줬네. 나 역시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단 말일세. 허나 자네와 나 사이에서 대화가 더 오래 지속되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네.”

 

“……알겠소. 당신 말대로 일단 어디든 왔다 갔다 하면 되겠지.”

 

해 보고 나서도 혼자 힘으로 못 하겠다는 판단이 들면, 그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면 되리라.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안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수에 들어가기 전에 무기를 두고 왔기에, 원래 대검이 있어야 할 등 부분이 허전했다.

 

“그나저나 혹시 검 한 자루만 빌릴 수 있겠소?”

 

이것은 그렇게까지 과한 요구는 아니었는지, 세로게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주지. 나름 아끼는 것이니, 나중에 나를 보면 꼭 돌려주도록 하고……. 아 참,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게나.”

 

세로게트는 상당히 귀해 보이는 장검과 함께 머리 부분이 유독 넉넉한 로브 하나를 건넸다.

 

“어지간해선 모습을 숨기고 다니는 게 좋을 것이네. 이 조언은 듣든 말든 상관없네. 어차피 내가 어떤 말들을 해 봤자, 역사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

 

“아무튼 고맙소. 그럼 나중에 뵙겠소이다.”

 

“그래.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천계를 열었느냐에 대한 의문도 그때 풀도록 하겠네. 부디 몸조심하게나.”

 

안톤은 오두막을 떠나며, 그 세월이 무려 20년이 된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 * *

 

안톤은 산 중턱에 위치한 세로게트의 오두막에서부터, 대충 위치를 익히며 산을 내려갔다. 괜한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 싶어 기척을 숨기고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도중에 에반하임의 파수꾼들과 마주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어느 정도 에반하임의 권역을 벗어나자, 안톤은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처음 입고 온 덜 마른 옷과 그 위에 걸쳐 입은 넉넉한 로브 하나. 그리고 세로게트에게 받은 장검 하나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이거, 먹고살기도 퍽퍽하겠는데…….’

 

갖고 있던 돈은 모조리 아공간 가방에 넣고 다녔고, 그 가방도 이곳에 오기 전에 두고 왔기에 현재 안톤은 무일푼의 신세였다.

 

‘그나저나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니…….’

 

과연 그게 어떤 것일지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안톤은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저냥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이다 보면 될 것이라고, 아까 분명 세로게트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음…… 제대로 온 건가?’

 

산을 완전히 내려왔는데도, 목표인 아쟈스탄 성은 보이지 않고 허허벌판만이 안톤을 반긴다.

 

우선 안톤은 사람이 나올 때까지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다행히 사람이 나다니는 길이 나왔다.

 

다만 문제는 한밤중이기에 길을 물어볼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일단 안톤의 목표는 다시 아쟈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르디가의 신분패가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 그에겐 신분을 증명할 수단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아예 사람이 없는 곳에서 지낸다면 괜찮겠지만, 사람들 틈에서 섞여 살려면 신분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었다.

 

고작 평민임을 증명해 주는 신분패.

 

그 작은 신분패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안톤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에반하임과 레노테이르가 붙어 있다는 것은 안톤에겐 행운인 점이었다.

 

한 해에도 수백 명이 넘는 츠레이바의 탈주 노예가 레노테이르에 정착하곤 하니까 말이다.

 

안톤 또한 그들처럼 위장해 신분을 얻어 낼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서 용병이 되면 좀 더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편해지겠지.’

 

안톤은 의념을 불어 넣어 청각을 키웠다. 아침이 될 때까지 길에 있기엔 시간이 아까우니, 혹시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기하급수적으로 청각의 범위가 확장된다. 그러자 바람 소리가 마치 폭풍 같고, 짐승의 작은 움직임이 거인의 발걸음처럼 묵직하게 들린다.

 

그리고 그건 도대체 얼마나 멀리에서부터 들려온 소리였을까.

 

안톤의 귓가에 인간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타닥타닥. 바로 옆에서 천둥처럼 치는 모닥불 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야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군. 덕분에 아침까진 성에 도착할 수 있겠어.’

 

안톤은 곧장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 * *

 

무클란 용병단.

 

츠레이바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들이 주로 맡는 의뢰는 대개 도적들에게서 상인을 호위하는 일이다.

 

단지 수도군으로부터 공격을 받냐, 그렇지 않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사실 이 세계에서는 용병이나 도적이나 한 끗 차이다.

 

호위하던 용병들이 돌변해 상인을 죽이고 물품을 빼앗는 사건들은 매년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그렇기에 상인들은 목숨을 지켜 줄 용병을 아주 신중히 고른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무클란 용병단은 믿을 만한 용병단들 중 하나였다.

 

일단 츠레이바에서 활동한 지 10년이 넘었고,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차례도 이상한 소문조차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허나 그것은 오로지 무클란 용병단의 단장, 칼런 무클란이 아주 똑똑하게 일을 벌였기 때문이지, 결코 그가 믿을 만한 선인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총 열한 번의 약탈을 벌인 그는 자신만의 규칙이 있었다.

 

츠레이바가 초행인 외부의 상인만을 노릴 것.

 

반드시 목적지 근처까지 호위를 해 주고 죽일 것.

 

죽인 후에는 확실하게 증거를 인멸하고, 며칠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올 것.

 

마지막으로 약탈한 물품은 최소 3년 있다가 처분할 것.

 

그리고 오늘 밤.

 

칼런 무클란은 보호하던 타 지역의 신참 상인을 죽이고 물품들을 빼앗기로 결정했다.

 

타닥타닥.

 

불침번을 서며 평소처럼 수다를 떨던 용병들의 눈빛이 어느 순간 세차게 변한다.

 

“시간이다.”

 

누군가의 아주 작은 읊조림.

 

그 신호에 침낭에 몸을 파묻고 곤히 잠든 척했던 용병들이, 하나씩 조용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자마자 무기를 꺼내 들고는 저마다 한 사람씩, 자고 있던 인부들의 목에 무기를 겨눴다.

 

이제 슬슬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한 것일까.

 

칼런 무클란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외쳤다.

 

“죽여!”

 

푹!

 

풀냄새 가득하던 벌판이 진득한 혈향으로 가득 차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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