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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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84화
084. 호수
마법의 충돌로 인해 큰 굉음이 지상을 덮는다.
생뚱맞게 이게 무슨 일인가 싶던 것도 잠시, 탈티온은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냈다.
정면에서 등장한 혼요종 무리들의 공격을, 때마침 등장한 부관 오르메넨이 마법으로 막아 낸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행위가 또 다른 오해를 부른 모양이었다.
“이렇게 쉽게 내 마법을 막다니, 과연 보초대가 당할 만도 하다.”
혼요종 무리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탈티온을 향해 적개심 어린 눈빛을 보낸다. 이마에 박혀 있는 정령석의 색이 보라색인 것으로 보아, 탈티온은 그가 에반하임 내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가진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뭔가 오해가 있소이다!”
탈티온은 황급히 검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미 생겨 버린 오해의 골은 겨우 그 한마디로 풀리긴 어려웠나 보다.
“망할 인간 놈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런 짓을 저지르려 하다니. 우리가 우습게 보이더냐?”
쿵!
혼요종 사내가 지팡이를 바닥에 찍었다.
그러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한 번 크게 출렁인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뒤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무리도 일제히 활의 시위를 걸어 당겼다.
“잠깐! 제 말 좀 들어 보시오! 나는 이런 사람이란 말이오!”
탈티온은 재빨리 품속에서 은패 하나를 꺼냈다. 레노테이르의 정식 사절임을 증명하는 패였다.
이것을 보여 주면 일단 상대방이 좀 진정할 것이라 여긴 탈티온이었으나, 왜인지 혼요종 사내는 더욱 격분했다.
“사절단? 사절단이 우릴 공격하다니, 이건 선전포고인가?”
아, 원래 혼요종들이란, 인간 말을 귓등으로만 들어 먹는 족속들이었지.
탈티온은 순간 머리가 아파 왔지만,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 되도 않는 오해를 서둘러 풀어야 했다.
“그러니까 그게 오해란 말이오! 공격을 한 것은 저자이고, 나는 그걸 막으려는 쪽이었소!”
억울함이 절로 묻어나는 토로에 혼요종 사내가 긴가민가한다. 그리고 그때였다.
“사실이에요, 장로님! 저 인간은 절 구해 주려 했어요! 절 공격한 건 바로 저 남자예요!”
푸트안의 외침에 모든 군중의 시선이 안톤에게로 향했다.
피부가 따가울 만큼 살벌한 눈빛들.
안톤은 탈티온의 공격을 막느라 꺼내 들었던 검을 도로 거두었다.
“당장 인질을 풀어라.”
“물론 그러리다.”
그리고 명령조의 요구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안톤은 그들과 싸울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앞서 만난 혼요종이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었기에 상황이 이리되었을 뿐.
부디 새로 나타난 자들은 적어도 말이 통하길 빌며, 안톤은 푸트안의 혈도를 짚었다.
몸이 자유로워진 푸트안은 표독스러운 눈으로 안톤을 한 번 째려보고는, 그대로 곧장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다친 덴 없느냐?”
“예, 장로님.”
푸트안의 안위를 우선시하여 확인한 혼요종 사내는 다시 안톤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꽤나 얼떨떨해 보였는데, 아무래도 안톤이 이렇게 쉽게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안톤이 재빨리 외쳤다.
“나는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오. 당신들을 해칠 생각도 없고!”
“그럼 왜 우리 일족의 아이를 겁박한 것이냐?”
이것에 대해선 할 말이 딱히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대화는 고사하고 다짜고짜 화살만 날리는 탓에 그만 열이 받았다고 할 순 없지 않은가.
안톤은 먼저 사과의 말을 던졌다.
“그 부분은 미안하게 생각하오. 헌데 대화를 하려면 이런 방법밖에는 없더군.”
“대화를 하려 했다고? 그렇다면 방법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그래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정말 나쁜 마음으로 온 것 같지는 않으니 이번만큼은 멀쩡히 보내 주마. 돌아가라.”
마치 큰 아량을 베푼다는 듯한 말투에 안톤의 미간이 그만 일그러졌다.
‘혹시 윗놈들은 다를까 싶었는데, 역시 하나같이 말이 통하지 않는군.’
솔직히 속에서 열화가 확 하고 치밀어 오르지만, 안톤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부탁이 있는 쪽은 자신이었으니까.
“사람을 찾고 있소. 이름은 세로게…….”
세로게트 알-바흐르.
혹시 이 이름을 들으면 좀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미처 그 말조차 끝마쳐지지 못했다.
혼요종 사내가 노성을 내지르며 말을 도중에 끊은 것이다.
“그만! 이제 더는 말하지 않으마. 인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냉큼 물러가라!”
그 고압적인 어조에 결국 참고 있던 둑이 무너졌다.
입술을 질겅 씹은 안톤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혼요종 사내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힘으로 내쫓을 수밖에. 그 과정에서 다치는 것은 책임지지 않겠다.”
그래, 그렇게 힘에 자신이 있단 말이지?
어떻게든 대화를 시도하려 했던 것이 어리석은 행동처럼 느껴져 안톤은 자조 섞인 웃음을 내지었다.
“그럼 어서 한번 해 보시지.”
“오냐.”
아래로 내렸던 대검을 다시 치켜들고 안톤이 한 걸음 내딛자, 혼요종 사내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지팡이를 겨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일단 사태를 지켜보던 탈티온이 황급하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보게, 안톤이라고 했나? 자네에게 무슨 사정이 있다는 건 이제 알겠네. 허나 일단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는 게 어떻겠는가? 이러다가 크게 경을 칠 것이네!”
그리고 또 뭐가 생각났는지,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 아까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지? 내게 귀띔을 해 준다면 내가 반드시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네. 어떤가?”
탈티온의 중재는 효과가 있었다.
딱히 그의 약속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저 어떻게든 한번 노기를 사그라지게 할 만큼의 시간이 생겼던 것이다.
안톤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는 혼요종 사내를 노려보았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겠소. 대신, 내가 찾는 사람에게 말만이라도 전해 주지 않겠소? 온-누르의 제자가 찾아왔다고, 이 한마디만 전해 주면 되오.”
“누굴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절한다.”
얄미울 정도로 뻣뻣한 말투에 다시금 화기가 끓어오른다.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 봐야 하는 건가?’
이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렇게 막나가다 보면, 어쩌면 자신이 찾는 그 남자가 딱 하고 나타날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갈수록 마음이 동했지만, 안톤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으며 유혹을 떨쳐 냈다.
결코 이 자리에서 그렇게 깽판을 칠 만큼의 능력이 부족하다 여겨서는 아니었다.
‘그 사람을 만나서 부탁해야 하는 입장인데, 그랬다간 엄청나게 밉보이고 말겠지.’
“내일 다시 오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안톤이 등을 휙 하고 돌렸다.
그러자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내내 눈동자만 굴리고 있던 아렛이 잽싸게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일단 아쟈스탄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차였다.
“내일 다시 올 것 없다, 아이야.”
정체 모를 인형이 안톤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수도승 같은 복장을 한 혼요종이었다. 혼요종답지 않게 피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검을 차고 있었다.
“수호자께서 여긴 어쩐 일로……!”
그 뻣뻣하던 사내가 저렇게 놀라는 걸 보니, 아무래도 에반하임에서 한 위치 하는 자인 듯하다.
“바깥이 웬일로 어수선하길래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해서 와 봤네.”
“아, 침입자가 있어서 잠깐 소란스러웠습니다. 이제 내쫓는 중이니 걱정하실 것은…….”
“근데 이제 보니 내 손님이었구만.”
“소, 손님 말씀이십니까?”
어느새 표정이 잔뜩 얼어붙은 혼요종 사내가 목소리를 떨며 되묻는다.
권위적이고 옹색하던 그 사내가 이렇게까지 기합이 들어갈 수 있다니, 안톤은 정말 놀라웠다.
“그래,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손님. 근데 내쫓는 중이었다니, 하마터면 이거 영영 만나지 못할 뻔했구먼.”
“아, 아 그럴 수가……! 저는 맹세코 몰랐습니다! 수호자님의 손님인 줄 알았다면 결코 이렇게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쯧쯧. 보나 마나 제대로 얘기를 들어 보려 하지도 않았겠지. 그러게 내가 평소에도 말하지 않았나. 인간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고. 아무튼 이자는 내가 데려가겠네.”
“그, 그러시지요!”
불현듯 등장해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시킨 남성이 웃으며 안톤에게 다가왔다.
“자, 그럼 따라오겠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세로게트 알-바흐르. 아마도 자네가 찾던 사람이 나일 것 같은데. 맞나?”
안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유쾌한 웃음을 내지었다.
“그래, 자네만큼이나 나도 자네를 찾고 있었다네. 어서 가세.”
* * *
세로게트는 안톤을 자신의 거처로 안내했다.
사건이 있었던 곳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자그마한 호수 옆에 위치한 오두막이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안톤에게 양해를 구하며 일행을 물려 달라고 부탁했다.
“아렛, 잠깐만 밖에서 기다려 줄 수 있겠소?”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경치가 참 좋군요. 여기서 바람이나 쐬고 있을 테니 편히 대화 나누시지요.”
그렇게 안톤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세로게트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그 팔찌에 있는 그 친구도 갑갑할 것 같은데, 같이 바람이나 쐬고 있으라고 하는 게 어떤가?”
안톤은 군말 없이 팔찌의 마법을 해제했다.
밖으로 나온 카린은 안톤을 살짝 흘겨보고는 아렛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따가 나와서 다 얘기해 줘야 해요?”
“그러리다.”
안톤은 세로게트를 따라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 내부는 여러 잡다한 물건들이 많았지만, 잘 정리가 되어 있어 난잡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세로게트는 부엌에서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안톤에게 내어 주고 자기는 거실에 있는 천 의자에 앉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데, 인내심이 깊은 친구군.”
그의 칭찬에 안톤은 조금 겸연쩍어졌다. 인내심이 깊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안톤은 신안을 열고 세로게트를 곳곳이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이름이 안톤이라고 했었나?”
느닷없이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안톤이 살짝 놀랐다.
기억을 되짚어 봐도, 이름을 알려 주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물론 이름을 알게 된 건, 좀 전에 대화를 엿들어서지만. 아무튼 언제쯤 오는가 하고 기다리고 있었네. 그땐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이어진 세로게트의 말에는 위화감이 잔뜩 머금어져 있었다.
이건 마치 서로가 구면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자연스레 안톤의 얼굴에 의문기가 가득 어렸다.
“……?”
“자네를 기다린 것이 햇수로 20년째네. 자네가 내게 묻고 싶은 것만큼이나, 나 역시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쌓여 있어.”
대화가 이어질수록 헤어날 수 없는 미궁에 갇힌 기분이다.
안톤은 솔직한 물음을 그에게 던졌다.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하기야 그럴 테지. 혹시 자네의 궁금증을 풀기 전에, 일단 내가 먼저 질문을 몇 가지 해도 괜찮겠는가?”
“그러시지요.”
“이것부터 물어봐야겠군. 그 검술은 어떻게 배웠나?”
“제 스승님에게 배웠습니다. 성함은 온-누르라고, 예전에 그쪽에게 가르침을 받아 이러한 검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안톤의 설명에 세로게트는 약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눈살을 살짝 찌푸린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것참 이상하군. 나는 지난 몇백 년간 이곳에서 나간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이 검술에 대해 알려 준 적도 없네. 그리고 온-누르라니?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일세.”
“……?”
“뿐만 아니라, 이 검술은 알려 준다고 해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지.”
“하지만…… 저는 분명 그렇게 해서 배웠습니다.”
“자네 말을 의심하는 게 아니네. 짚이는 게 하나 있기는 하니까. 그런데 만약 그 예측이 맞다면 이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군.”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세로게트가 안톤의 의문점을 해결해 주기 위해 입을 열던 찰나였다.
쿠우우우웅!
밖에서부터 거대한 폭발음이 피어났다. 뿐만 아니라 바닥도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세로게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오두막은 호수 둔치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호수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이런! 이렇게 빨리? 하긴 이랬으니까 그때의 자네가 아무것도 몰랐겠지. 아,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어서 나가세!”
“도대체 저게 뭡니까?”
“세계의 법칙. 나는 저걸 그렇게 부르고 있네. 자네는 서둘러 저곳에 들어가야 하네!”
설명도 제대로 해 주지 않고서, 대뜸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져 있는 곳에 들어가라니.
이거 너무 사건이 급작스럽지 않은가.
안톤의 얼굴에는 당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
“이것저것 설명할 시간조차 없네! 자네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절대 아니니, 한 번만 나를 믿어 주겠나?”
초면인 상대를 뭘 보고 믿는단 말인가.
세로게트는 자기가 말을 해 놓고도 좀 이상하다 싶었는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내 말을 따라 준다면, 자네가 하는 부탁은 그게 뭐든지 간에 들어주겠네. 자네도 뭔가 목적이 있기에 나를 찾아왔을 테지 않은가?”
확실히 이건 혹한다.
뭔가 범상치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겉보기로는 그렇게 위험해 보이진 않는다.
땅이 흔들리고 호수 위로 물기둥이 막 치솟고 있긴 하지만…… 뭐,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몸뚱이의 소유자인 것이다. 안톤은.
“결코 자네를 이용하려거나 뭔가를 꾸미려고 하는 게 아니란 걸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네.”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혼요종의 맹세까지 들으며 안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고맙네. 한 가지 조언을 해 주자면, 부디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하게. 절대 후회할 일은 벌이지 말고. 하긴, 이래 봤자 별 도움은 되지 못하겠군.”
“무슨 소리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호수에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 아무튼 나를 다시 만나면 꼭 이렇게 말하게나.”
안톤은 호수 아래로 발을 담갔다.
그러자 물이 맞닿은 발목에서부터 은은한 떨림과 함께 기묘한 감각이 전해진다.
“미래에서 왔다고.”
마지막까지 영문 모를 소리만 던지는 세로게트의 목소리를 끝으로, 안톤은 호수 아래로 몸을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