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8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82화
082. 첫발
“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군.”
페르트와의 짧았던 만남 이후, 안톤은 적당한 숙소를 잡아 그곳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식사까지 숙소에서 해결하고, 도시 알서스를 떠나 카린이 있는 아쟈스탄으로 향했다.
도보를 이용했을 때 대략 이주일가량 소요된다고 하길래 말까지 구입한 안톤이었지만, 이내 그는 그 결정을 후회했다.
‘이래서야 그곳까지 가는 데 한세월이 걸리겠군.’
기동력의 고유명사처럼 표현되는 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안톤은 말보다 빠르다. 그것도 훨씬 더.
그럼에도 안톤이 비싼 돈을 주고 말을 구입한 것은 기사로 지내던 옛 추억도 추억이었지만, 그냥 한 번 평범하게 거리를 다녀 보고 싶어서였다.
그때는 꽤나 낭만적이고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 내 성미에 안 맞아.’
말을 타고 질주하던 안톤은 돌연 말을 멈춰 세웠다. 숲 언저리 부분에서였다. 안톤은 말을 데리고 숲 안까지 데리고 가 고삐를 풀어 주었다.
“너도 자유롭게 살아라, 앤서니.”
그런데 얻은 자유를 기뻐하며 단숨에 뜀박질을 시작할 거라 여겼던 말은 계속해서 안톤의 곁을 서성거렸다.
둘의 유대가 깊어서라는 가당찮은 이유는 아니었다. 애초에 만난 지 겨우 서너 시간도 지나지 않은 짐승과 인간 사이에 그런 게 벌써 생길 리 없잖은가. 그저, 인간에게 길들여진 이 말에겐 야생으로 나갈 욕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생존에 대한 짐승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이런 숲에 풀어놔 봤자, 혼자 힘으론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하니까. 결국 어느 운 좋은 사람 손에 의해 다시 인간의 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멍청한 짓을 했군.’
아무도 이 장면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한 안톤은, 다시 말에게 고삐를 채우고 그 위에 올라탔다.
‘그냥 좀 더 천천히 가지, 뭐.’
그리고 그게 또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 * *
결국 안톤은 사흘 정도 걸려서 아쟈스탄에 도착했다.
일단 곧바로 말을 처분한 안톤은 카린과 만나기로 한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아, 안톤! 여기예요!”
광장에 도착하니 먼저 기다리고 있던 카린이 멀리서 손을 흔든다.
카린의 옆에는 갈색 머리의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함께 있었다. 아렛이란 이름의 사내로, 카린과 함께 해린으로 좌천된 인물이기도 했다.
“둘 다 오랜만이오. 그나저나, 오기 전까지만 해도 혼자인 줄 알았는데 같이 있었군?”
“아, 내가 말하지 않았나요? 그레일시아로 가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닐 텐데 일을 도와줄 사람이 하나 필요했어요. 늘 뺀질거리는 게 문제긴 하지만…… 믿을 사람도 딱히 없으니까. 뭐, 일도 그럭저럭 하는 편이고요.”
“아휴! 이 먼 길을 따라온 충신에게 고작 그런 소리라니, 섭섭합니다.”
아렛이 서운한 한탄을 퍼부었지만 카린과 안톤, 둘 중 어느 누구도 이를 신경 쓰지 않으며 둘만의 대화를 이어 갔다.
“자신만만하게 일단 온다 하더니, 그래서 뭔가 방법이라도 있는 거예요?”
“글쎄. 일단 몸으로 부딪쳐 볼 생각이오만?”
“아휴! 내가 그럴 줄 알았죠. 일단 자리부터 좀 옮길까요?”
“그럽시다.”
셋 모두 아직 식전이었기에, 간단하게 아침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잔류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이 도시에 완전히 익숙해진 카린이 앞장서 가게로 안내했다.
“여기서 좀만 더 걸으면 나올 거예요. 그나저나 거리가 좀 한적하죠?”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는 것 같기도 하오.”
“푸훗!”
카린은 뜬금없이 튀어나온 웃음을 급하게 손으로 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안톤이 흠칫했다.
그냥 입으로 나오는 대로 대답했을 뿐인데, 도대체 왜 그러지?
“아, 정말 미안해요! 그냥 그 말투가 너무 우리 아버지와 닮아 가지고…….”
“그렇소?”
“네! 말뜻이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어서 절대 확답은 안 하는 게, 완전 꼭 닮았어요!”
초롱초롱한 눈빛의 카린을 보며 안톤은 그냥 입을 닫았다.
이게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명색이 상인이라고, 얼굴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는지 카린이 말을 덧붙였다.
“칭찬이에요. 아, 당신은 상인이 아니니까 칭찬이 아닌가? 아무튼 나쁜 뜻은 아니니까 맘 상하지 말아요.”
아, 애매모호하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단어의 참의미를 몸소 깨달은 안톤은 왠지 카린의 아버지를 만나면 굉장히 피곤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 일단 음식부터 시키고 얘기를 시작할까요?”
가게에 들어선 일행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자고로 음식점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창가였는데, 다행히 비어 있었다. 아니, 애초에 손님이 거의 있지도 않았다.
우선 종업원에게 음식을 주문한 카린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도시가 좀 휑해요, 요즘. 상인들의 발길은 아예 끊긴 지 오래고, 이곳의 거주하던 혼요종들도 모조리 에반하임으로 돌아간 탓에 분위기가 말이 아니죠.”
“그렇군. 어쩐지 듣던 거랑은 다르게, 왜 인간밖에 없나 싶었소.”
“일단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것부터 물어볼게요. 당신은 얼마나 강해요?”
직설적인 물음에 안톤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무인에게 이러한 물음은 굉장히 민감한 질문이란 것은 둘째 치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였던 것이다.
“음…… 왜 그런 걸 묻는 것이오?”
“당연히 먼저 물어봐야죠.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데. 듣고 나서 만약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차라리 그냥 사태가 진정되길 기다릴 생각이에요. 아니면 아예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든가.”
“그렇게 위험하다고 보는 거요?”
“당신이 지금 잘 몰라서 그러는데, 도적단의 악명이 엄청나요. 게다가 그 두목은 거의 명인급에 도달한 무인이라는 소문도 자자하구요. 운이 좋으면 마주치지 않고도 목적지에 갈 수 있겠지만…… 전 제 목숨을 운에 맡기고 싶진 않아요. 살아서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명인급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북부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다.
최소 오러 마스터나 왕급 마법사, 혹은 그에 준하는 무력을 지녔지만 전당에서 공인을 받지 못한 자들을 설명할 때 주로 쓰인다.
그런데 도적 주제에 명인급이라니, 잠시나마 놀라움을 내비친 안톤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원래 그런 자가 있었던가?’
모르겠다. 이맘때쯤 자신은 콜로세움에서 혈전을 벌이느라 세상일과 담쌓고 살았다. 코르보 백작 부인에게 팔려 그레일시아로 오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 뒤의 일이다.
생각을 멈춘 안톤은 일단 그녀가 잘못 알고 있는 점부터 정정해 주었다.
“근데 왜 우리가 사막으로 갈 거라고만 생각하시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에반하임이 문을 걸어 잠그고는 아예 모든 대화를 거부하는데, 방법이 없잖아요. 설마 에반하임 전체와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일단 닥치는 대로 들어가고 보면 대화가 시작되지 않겠소?”
“당신…… 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죠? 놀랍네요.”
카린은 어지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그때 내내 대화에 껴들지 못하고 있던 아렛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철가면께서는 사실 꽤나 미남이시군요?”
“고맙소. 당신도 말끔하게 입으니 훨씬 보기 좋소.”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사내를 보며 카린은 여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아휴…… 머리야.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건지…….”
안톤이 그런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시오. 나는 생각보다 강하니까.”
말을 뱉어 놓고도 스스로 무안했는지 안톤이 말을 이어 붙였다.
“아마도.”
“그것참! 위로가 되네요!”
* * *
그리고 그날 오후.
안톤과 카린 그리고 아렛까지 합쳐 셋은 에반하임으로 가는 길목 앞에 섰다.
“고집을 부려서 미안하오. 사실 당신과 관련한 일 때문만이 아니라 에반하임에 가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그랬소.”
“어쩐지……. 그럼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요.”
“그럴 걸 그랬나 보오. 아무튼 당신의 안전은 확실히 보장하겠소.”
안톤은 카린에게 팔찌를 보여 주었다. 예전 감옥을 탈출할 때부터 여러모로 유용하게 사용해 왔던 아티팩트였다.
“이 속에 들어가 있으면 안전할 거요. 적어도 내가 죽기 전까진.”
“아, 좀! 그런 말은 왜 하는 거예요, 대체?”
안톤의 사족에 신경질을 내는 카린과는 달리, 아렛은 굉장히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이었다.
“오! 이런 물건이 있다니, 굉장합니다!”
물론 딱 안톤이 또 다른 사족을 내뱉기 전까지만.
“그렇지만 아쉽게도 두 명은 들어갈 수가 없소.”
환하던 아렛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극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렛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전……? 아, 아! 도시에 남아 있으면! 그러면 되겠군요?”
안톤은 대답 대신 카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결정을 맡기겠다는 무언의 의사 표현이었다.
이를 눈치챈 아렛이 간절한 눈초리로 카린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데려가요.”
“그렇다는군. 내가 잘 지켜 주겠소. 할 수 있는 데까진.”
“아, 예…….”
아렛은 뭔가 놀리는 재미가 있는 남자였다.
말은 장난식으로 했지만, 안톤이 정말로 그가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한 푼도 없었다.
애초에 옛날의 혼요종들이라면 모를까.
인간들과 교류가 활발한 요즘에 자신들의 말을 무시하고 영역에 침범했다고 곧바로 목을 쳐 버리진 않을 거다.
게다가 설령 일이 꼬여 버린다 해도 아렛 한 명쯤이야 무사히 데리고 탈출할 자신이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한 것은 카린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정말로 목숨을 버리는 짓이라 판단했다면, 이렇게 그녀가 고집을 못 이기는 척 따라오는 일도 없었을 테지.
안톤은 등에 멘 아공간 가방에서 오랜만에 검을 꺼내 들었다. 근데 검만 빼려 했는데 금화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진다.
도합 70만 골드. 무려 마차 네 대 분량의 금화를 아공간에 때려 박다 보니 자리가 꽉 차서 그만 딸려 나온 것이다.
짤랑짤랑.
“어이쿠!”
아렛이 기겁하며 금화들을 손으로 쓸어 담았고, 카린은 안톤이 짊어지고 있는 가방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방, 나한테 팔면 안 돼요?”
“이건…… 내 것이오. 그만 탐내고 어서 팔찌나 받으시오.”
“흠, 알았어요.”
카린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안톤에게서 팔찌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안톤에게 언질받은 주문을 외웠다.
“밤 그림자.”
주인을 잃고 떨어지는 팔찌를 공중에서 낚아챈 안톤은 팔찌를 도로 자신의 팔에 끼웠다.
“다 주웠으면 이제 갑시다!”
“그, 그러지요.”
“얼굴 좀 펴시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잖소?”
피식 웃으며 안톤이 에반하임을 향한 첫발을 뗐다.
* * *
혼요종들의 성지, 에반하임.
그레일시아와 레노테이르 사이에 위치한 거대한 산맥 전부를 그렇게 부른다.
이곳은 불과 150년 전까지만 하여도 인간들이 발길을 들이밀지 못하는 대륙의 금지들 중 하나였다.
허나 타 국가들에 비해 열린 사상을 지닌 레노테이르의 수뇌부들은 인간들 중 최초로 혼요종들과 동맹 협정을 체결했다.
그 결과 레노테이르는 그들의 허락으로 대륙 최대의 곡창 지대인 그레일시아까지 직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고, 에반하임은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든든한 동맹군을 얻었다.
그렇게 두 집단은 서로 공생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계속해서 굳건한 동맹 관계를 잘 유지해 왔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는 말이다.
“후우. 드디어 도착했군.”
두 남녀가 에반하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섰다. 겨우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안톤 일행이 서 있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무뚝뚝한 얼굴의 금발 여인이 몸을 숙여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었다.
“성주님, 여기 웬 금화가 떨어져 있습니다.”
“하하, 이거 어쩐지 징조가 좋군. 부디 이 기세를 타서 멋지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실 겁니다.”
그들은 레노테이르 의회에서 에반하임으로 보낸 사절단이었다. 어떻게든 혼요종들을 설득해 에반하임의 봉쇄를 풀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역시 자네를 데려온 것은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군. 자! 그럼 가 보자고, 오르메넨.”
“네, 성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