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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76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7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76화

076. 종전

 

 

“더 해 볼 생각이라면 굳이 마다하진 않겠네만…… 이미 제단은 사라졌네.”

 

기세등등한 가우스트의 말에 복면 사내가 처음으로 음성을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칼로 쇠를 긁는 듯 거칠었다.

 

“계약자가 죽으면 제단이 생기는 것쯤, 우리도 알고 있다.”

 

대체 뭘 하는 자들이기에 그런 속사정들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싸움이 더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가우스트는 검병에 힘을 가했다. 허나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복면 사내가 미련 없이 단검을 허리춤에 도로 집어넣은 것이다.

 

“하지만…… 저런 걸 봐 버린 이상, 뭘 하든 의미 없겠지.”

 

복면 사내는 흘깃 고개를 돌려 시선을 옮겼다.

 

구름이 길게 갈라져 그 사이로 따사로운 빛을 뿜어내는 하늘이 있는 방향이었다.

 

“좋은 판단이네.”

 

“우쭐하지 마라, 검성……. 오늘 일은 네가 잘나서가 아니니까.”

 

복면 사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연기가 흩뿌려지듯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게 전장에서 이탈한 것은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전투를 치르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그들은 대개 소리 소문 없이 등장했던 신예들이었고, 다들 웬만큼 지위가 있어 현장에서 지휘를 도맡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단체로 종적을 감추자, 혼란이 찾아왔다.

 

뭔가 허무한 듯 검을 아래로 내렸던 검성이, 다시금 검을 높이 들었다.

 

“검을 버린다면 굳이 피를 보지 않겠다!”

 

그 말을 기점으로, 우왕좌왕하던 검사들이 하나 둘 무기를 바닥에 떨구었다.

 

이제 정말로 이 전쟁이 끝난 것이다.

 

안톤이 등장한 것은 상황이 대충 정리되면서였다.

 

그를 본 가우스트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옆에 있던 린디아스에게 다가갔다.

 

“고생했다, 아이야.”

 

하지만 린디아스는 그의 손을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안톤의 뒤로 몸을 숨겼다.

 

의아하단 얼굴로 가우스트는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 했지만 안톤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만하는 게 좋겠군.”

 

이거 말이 상당히 짧아졌지 않은가.

 

못내 그 사실이 거슬리면서도, 가우스트는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혹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그리고 그 질문에 안톤이 안광을 빛낸다.

 

“그래, 있었지.”

 

가우스트는 살아오며 적대감이 실린 눈빛을 수도 없이 받아 보았다.

 

허나, 이번만큼 살벌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남들의 눈을 의식한 가우스트가 사람 좋은 웃음을 내지으며 한 걸음을 물러났다.

 

“아무래도 돌아가면, 우린 아마 긴 얘기를 해야 할 듯하군.”

 

 

* * *

 

많은 고통과 눈물을 낳았던 내전이 드디어 끝이 났다.

 

허나 그렇다고 모든 상황이 좋게 마무리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심각한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속출했고, 이 안건 또한 그중에 하나였다.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쟁이 끝남으로 인해 다시 되찾은 가주전.

 

그곳에서 총관과 가우스트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차가 가득 따라져 있었지만, 연신 대화를 나누느라 찻잔은 쉬이 빌 기미가 없었다.

 

“글쎄…….”

 

방금 총관이 칭한 그들이란, 헤스갈의 파벌에 붙었던 잔재를 뜻한다. 그들은 지금 변절자들의 처우를 논하는 중이었다.

 

질문을 받은 가우스트가 뚜렷한 해답 없이 말꼬리를 흐린다.

 

“참 어렵구나, 어려워…….”

 

단순히 헤스갈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뿐이라면 이렇게까지 골치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정도에 따라서 처벌하고, 남은 이들을 도로 받아들이면 됐을 테지.

 

다만, 문제는 충성만이 아니라 블라디미르로부터 괴이한 힘을 전해 받은 자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계속 이대로 내버려 둘 수만은 없습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다.

 

최대한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은 가우스트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 참하기엔 그 수가 너무 많네. 게다가 어쩔 수 없이 그들로부터 힘을 받은 자들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내부의 적으로 돌변할지도 모를 그들을 평소처럼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감옥에 계속 처박아 넣는 것도 문제가 있고요. 만일 처형을 한다면, 더 시기를 늦추는 건 피해야 합니다.”

 

“알겠네. 이 안건에 대해서는 내가 내일까지 대답해 주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벌써 차가 식었구만.”

 

가우스트는 잔에 가득 차 있던 찻물을 기공을 이용해 단숨에 데워 주었다. 그는 김이 피어나는 찻잔을 한 모금 마시곤 입을 열었다.

 

“그래……. 그 아이는 어떻지?”

 

“헤스갈 공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네.”

 

“계속 심문을 하고 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혹시 그자는…… 아니네. 못 들은 걸로 해 주게나.”

 

가우스트는 도중에 말을 끊었으나, 이미 총관은 그가 무슨 얘길 꺼내려 했는지 눈치챈 듯 보였다.

 

“안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는 예전에 기거했던 별원에서 암검과 틀어박혀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물론 2공녀님도 그들과 함께 지내고 계시고요.”

 

“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 혹시 자네도 가문 내에서 그를 뭐라 칭하는지 들어 보았나?”

 

“검신……이라던가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 사람들에겐 영웅이 필요한 때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보기엔 상당히 과장된 무호라 생각됩니다.”

 

“하긴…… 자네는 그걸 직접 보지 못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어.”

 

“하하. 검성께서도 그들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무튼 오늘의 얘기는 끝난 듯하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쉬시지요.”

 

“아, 자네도 바쁠 텐데 너무 많은 시간을 뺏었군. 이만 나가 보게나.”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하던 총관이 문득 등을 돌렸다.

 

“혹시 제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대책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건 없네. 그렇지만 만약에라도 생긴다면 바로 말해 주지. 약속하겠네.”

 

“예. 그럼…….”

 

털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도 가우스트는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총관이 이내 완전히 벗어난 것을 기감으로 확인한 후, 그는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모든 걸 말해 줄 수 없음을 용서하게나, 총관. 자넨 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걸세.”

 

 

 

 

 

은은한 달빛이, 주인을 잃고 산산조각 난 검 위로 내려앉는다.

 

이곳은 전투가 벌어졌던 예의 공터였다.

 

비록 어떻게 시신들은 모두 수습됐지만, 치열한 전투의 흔적들이 아직도 이곳저곳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한 사내가 기척 없이 나타났다.

 

“다행히도 아직 있군.”

 

가우스트와 일전을 벌였던 복면 사내였다.

 

그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두 조각으로 양단된 괴물의 사체였다.

 

시신들은 어떻게든 모두 수거했지만, 이것의 경우 부피와 무게가 상당했기에 아직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복면 사내는 가볍게 도약해 그 위로 올라섰다.

 

“겨우 며칠이나 됐다고. 슬슬 썩은 내를 풍기는군.”

 

살짝 인상을 찌푸린 그는, 품에서 꺼낸 무언가를 절단면 위로 뿌렸다.

 

샤아아아.

 

가루에 맞닿은 부분이 녹는 듯 연기가 피어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신비한 현상이 벌어졌다. 사체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며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내 그것은 완전히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지만, 두 조각으로 몸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여전했다.

 

복면 사내는 무심하게 절단면이 닿도록 사체를 맞물렸다.

 

그러자 다시금 연기가 피어나며 떨어져 있던 몸이 서서히 붙기 시작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몸이 완전히 붙었다. 순백의 나신 위로는 베어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허나 아직까지도 그녀의 몸에서 어떠한 생기도 돌지 않는다.

 

복면 사내는 여인의 입을 벌리고 그 위로 검은색 용액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끄야아아아!”

 

여인이 세차게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떴다.

 

복면 사내는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냉정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볼 뿐.

 

서서히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한 것인지, 여인이 고개를 올려 복면 사내를 바라본다.

 

가슴 둔덕이 훤히 드러나는 고혹적인 자세였다.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내가 주변에 있다고 해도 잠식 상태에 들어간 건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질문에나 대답해 줘.”

 

“너는 안톤이라는 남자에게 졌고, 비약으로 너를 살려 냈다.”

 

“조르디가는…… 어떻게 됐지?”

 

“검성 가우스트가 임시 가주를 맡았고, 사태를 진정시키는 중이다. 너는 실패했다.”

 

복면 사내의 말에 카트락시아가 오랜 시간 침묵했다.

 

도무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럼 왜 날 되살린 거지?”

 

같은 목적을 위해 한 울타리 속에 얽혀 있긴 하지만, 결국 카트락시아와 그들은 경쟁 관계이다. 일이 실패한 것은 애석하나, 그녀의 죽음을 아쉽게 여길 자는 없었다.

 

“본단에서는 아직 네가 할 일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 일단 복귀하라는 명령이다.”

 

“명령……. 그래, 명령이란 말이지…….”

 

블라디미르에는 지도자의 자리가 공백이다. 그렇기에 블라디미르의 의사 결정은 십인의 합의로 결정된다.

 

방금 복면 사내가 말한 명령이란 것도 그로 인해 결정됐을 것이다.

 

그렇기에 카트락시아는 모멸감에 휩싸였다.

 

“내 신세도 참 우습게 됐네. 그래서 날 살리는 일엔 몇 명이나 찬성했지?”

 

분노가 전해지는 음성에, 복면 사내는 기가 찬 듯 코웃음 쳤다.

 

“죽었다 살아났으면서 겨우 그런 게 궁금한가?”

 

“대답해.”

 

“여섯 명이다.”

 

그녀는 그만 허탈한 웃음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여섯 명이라면 자신을 제외하면 세 명을 빼고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다는 말이었고, 그것은 자신을 경쟁자라고조차 여기지 않는 자들이 무려 여섯 명이나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카트락시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복면 사내를 지그시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어느 쪽이었지?”

 

“너를 살리자는 쪽이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지금 어쩌겠다는 건가? 설마 명령에 불응하기라도 하겠단 건가?”

 

“그럴 리가.”

 

카트락시아의 즉답에 복면 사내는 허리춤에 슬그머니 가져다 댔던 손을 도로 뗐다. 그리고 가지고 온 옷가지를 그녀에게 던지곤 대뜸 등을 돌렸다.

 

“그럼 됐군. 어서 가지.”

 

카트락시아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어서 가자고.”

 

까드득.

 

그녀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 * *

 

흐트러진 모습으로 철창 안에 구속된 헤스갈을 바라보고 있자니 묘한 감상이 인다.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 안톤은 가주 살해의 누명을 쓰고 저곳에 갇혔었다.

 

그런데 지금, 그 누명을 쓰게 만든 주체자가 자신과 반대의 상황이 된 걸 보자니 새삼 묘한 기분이었다.

 

다만 한 가지 그때와 다른 것은, 한 줌의 빛도 존재치 않던 복도에 환히 불이 밝혀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저 안에 있는 헤스갈이 자신을 볼 수 있었을 테지.

 

“크크큭. 나를 비웃으러 왔나?”

 

헤스갈이 증오 어린 눈초리를 쏘아 낸다.

 

아, 그리고 이제 보니 밝은 장내 외에도 다른 점이 있었다.

 

‘편하게 지낸 모양이군.’

 

며칠간의 투옥 생활 탓인지 꾀죄죄한 몰골의 헤스갈이었으나, 당시의 자신과는 비교하는 게 무색할 정도로 사정이 좋다.

 

몸에는 딱히 상처를 찾아볼 수 없었고, 옷조차 겨우 때가 살짝 탔을 뿐 해지지도 않았다.

 

‘이런 짓을 벌였는데도 조르디가의 핏줄은 핏줄이라 이건가?’

 

아무래도 심문관들이 직무 유기를 한 것 같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기에,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은 일단 잠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솔직히 그런 건 이제 별 상관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비웃으러 온 것은 아니다. 단지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왔다.”

 

“심문관들도 캐지 못한 걸 네까짓 게 들을 수 있을 성싶으냐?”

 

“그 얘기는 들었지. 그래서 꽤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헛발걸음을 했군. 돌아가라.”

 

철창 너머에서 조소가 날아든다.

 

참 어처구니없는 심정이었다.

 

“정말로 네가 심문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안톤은 그에게 보이지 않게 씩 웃었다.

 

“이빨도 손톱도 피부도 멀쩡하고, 밥도 잘 먹었는지 살도 빠지지 않았어. 눈이 충혈되어 있는데, 이건 고문 때문이 아니라 단지 네 정신 상태가 문제인 것 같고……. 내 생각엔 참 손쉬운 일이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넌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안톤은 단숨에 철창을 부수고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글쎄. 앞으론 직접 알아봐. 과연 이게 무슨 뜻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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