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1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12화
112. 책임
퍽퍽퍽!
살이 짓눌리며, 뼈가 분쇄되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가죽이 뼛조각에 베이고, 두 주먹은 퉁퉁 부어올랐지만 레온은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미 분노에 이성이 잡아먹힌 후였다.
“그만해. 이미 죽었다.”
보다 못한 안톤이 나서서 레온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미 에멀린의 얼굴은 원래의 형체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마치 피가 덕지덕지 묻은 밀가루 반죽 같달까. 아무튼 사람의 몰골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레온이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깔아뭉개고 있던 에멀린의 몸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득 힘이 빠졌는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한동안 형언키 어려운 눈빛으로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렇게 주저앉아 있었다.
안톤은 시선을 옮겨 에멀린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입맛이 씁쓸했다.
한때 그토록 원망했던 여자의 비참한 죽음일진대, 왜일까.
개운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왠지 조금 더 갑갑해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일단 남은 일은 마무리 지어야겠지.’
안톤은 레온을 잠시 내버려두고 백작 일가들을 향해 다가갔다. 오늘 코르보 백작가의 핏줄을 근절시키고야 말겠다던 아까의 결심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에멀린의 최후를 숨죽이며 지켜보던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상황을 깨달았다.
“사, 살려 주시오!”
안톤은 그들의 얼굴을 오목조목 살펴보았다. 대략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 중 거의 전부가 안톤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자들이었다. 좋은 기억을 남긴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 중 유독 안톤의 시선이 집중된 자가 있었다.
20대 중반의 사내로, 안톤에게는 어쩌면 에멀린보다도 더 깊은 애증의 관계라 할 수 있는 사내였다.
‘말론 코르보.’
코르보 백작가의 소영주.
전생에 안톤은 에멀린을 향한 암살 시도를 훌륭히 막아 낸 뒤,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직속 부하가 되었다.
신분도 노예에서 기사로 올라갔고, 생활수준은 훨씬 좋아졌다. 꿈에서나 그리던 마나 연공법도 배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안톤은 그것에 대해 단 한 번도 고마움을 느낀 적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란 걸 안톤은 알고 있었다.
‘이 녀석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해.’
안톤은 그에게 철저하게 도구로만 취급받았다. 그랬기에 딱히 그에게 구타나 가혹 행위를 받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톤이 그에게 살의를 느끼는 것은, 그가 터무니없는 악인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명령에 의해 행했던 숱한 악행들을 안톤은 아직까지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전생에서의 속죄가 되겠지.’
그러한 일념으로 안톤이 검을 휘둘렀다.
사아아아.
안톤의 검이 경로에 있던 모든 것들을 휩쓸며 지나갔다.
말론 코르보만을 노린 일격이 아니었다.
넓은 반경으로 펼쳐진 안톤의 검이 이 자리에 있는 스무 명가량의 인파를 반으로 갈랐다.
푸슈슈슈!
한발 늦게 피보라가 장내를 몰아쳤고, 어째선지 안톤은 피하지 않고 쏟아지는 핏물들을 그대로 맞았다.
300년의 역사를 지닌 코르보 백작가의 핏줄이 완전히 끊기는 순간이었다.
* * *
신전에 있을 카린과 아렛을 데려와 달라고 클린턴에게 부탁한 뒤, 안톤은 레온을 데리고 욕실로 향했다.
둘 모두 피로 목욕을 한 것처럼 전신이 젖어 있었기에, 이 상태로 카린과 만날 수는 없었다.
대충 빨리 씻고 나온 후, 안톤은 아무 옷장이나 뒤져 얼핏 맞는 옷을 찾아 입었다. 그러면서도 참 묘한 기분이었다.
‘이거 강도라도 된 것 같군.’
사실 정황만 놓고 본다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안톤은 이제는 피바다가 된 집무실을 지나 아래층에 위치한 접견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클린턴과 카린, 아렛이 모여 앉아 있었다.
“드디어 왔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아닐세. 간만에 카린 님과도 여러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여러모로 유익한 시간이었다네. 그럼…… 내가 하긴 뭣한 말이다마는, 일단 앉겠나?”
안톤이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보면 그 역시 무단침입 후 집주인을 살해한 공범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마스터가 되어서 그런가? 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진 느낌이군.’
그는 위층에서 어떤 참상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터임에도 침착하고 느긋한 태도를 고수했다.
검에 대해 집착하며 조급해하던 옛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지냈는가?”
클린턴이 근황을 물어 오며 대화가 시작됐다.
안톤은 그와 헤어지고 있었던 일들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느 재능 있는 이야기꾼이 들었다면 혀를 쯧쯧 찼을 만큼 형편없는 솜씨였으나, 다행히 그는 아주 흥미롭게 경청해 주었다.
그것은 카린이나 아렛, 자리에 앉지 않고 굳이 옆에 서 있는 레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먼저 안톤은 해린을 떠난 후 조르디가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얘기했다.
검의 제단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빠트린 이야기였기에 길게 이어질 것이 없었으나, 어째선지 카린이 린디아스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어 와서 꽤나 길어졌다.
에반하임에서의 일도 대충대충 넘어갔다.
과거 세계와 관련된 얘기들은 빼놓고, 그저 그곳에서 수련하는 시간을 보냈다고 둘러댔다.
그러고 나서 사막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허허! 광전사를 이겼다는 게 사실이었다니! 정말로 놀랍군! 겨우 1년 사이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어.”
“마스터가 된 당신도 만만치 않소.”
“아무튼 그 이후의 얘기도 계속해 주겠나? 사실 아까부터 왜 자네가 여기에 있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거든.”
안톤은 카린과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레온은 양성소 시절에 알던 친구라고 말했고, 그 말에 아렛만이 깜짝 놀랐다. 안톤이 노예였다는 사실은 아렛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저기 구멍이 많은 얘기였지만, 클린턴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친구의 복수였군. 다행이야.”
“뭐가 다행이오?”
“사실 그 방에서 나온 게 마음에 너무 걸렸거든. 내가 겪은 자네는 결코 악행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얼마나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자네는 아직 여전하군.”
그의 내면에서 자신이 얼마나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일까.
조금은 무안해진 안톤이 콧등을 긁적였다.
“아무튼 이제 당신의 얘기를 들려주겠소? 나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소.”
“정말로 별게 없는 이야긴데…… 원한다면 그거라도 해 주겠네.”
클린턴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말 뭐, 별거 없는 이야기였다.
1년 전, 그는 안톤과 헤어지고서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각성을 겪었다고 한다.
때문에 해린에서의 일도 다 제쳐 놓고 일단 제국으로 돌아와 황제에게 보고했고, 궁에 머무르며 1년간 깨달음을 정리하며 지냈다.
“마음 같아선 몇 년이고 그러면서 있고 싶었네만……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 제국이 완전 쑥대밭이라네.”
그런 그가 궁에서 나오게 된 것은 바로 이번 대가뭄 사태 때문이었다.
사막의 통행이 막힌 것과, 그레일시아의 귀족들을 수월하게 설득하려면 적어도 마스터급 무인을 보내야 한다는 결론이 났고, 결국 그중 가장 짬이 낮은 클린턴을 파견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다들 제국에 안 좋은 인식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쉽게 쉽게 곡식을 팔려고 들지를 않더군. 그나마 코르보 백작은 좀 대화가 통했고, 조금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침입자를 대신 물리쳐 주면 싸게 구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하필 거기서 자네가 나타날 줄은 몰랐지.”
딱히 그런 말은 없었다. 허나 못내 그 사실이 살짝 아쉬운지 클린턴의 눈이 슬며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때 카린이 대화에 껴들었다.
“걱정 마세요, 제오르 경. 그 근심은 곧 해결될 테니까요.”
“뭔가 방도라도 있는 것이오? 그렇다면 알려 주시오. 이대로 돌아가기엔 황상께 면이 살지가 않소.”
“방법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걸요. 막대한 물자가 제국으로 향하고 있어요. 원 시세로 대략 70만 골드가량이죠.”
“으음…….”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카린이었으나, 클린턴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그는 살면서 검만 휘두르고 수련했지 경제와 관련된 것들은 영 젬병이었다.
카린은 그런 그의 기색을 읽었고, 이런 남자를 그레일시아로 파견한 황실이 한심해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제국 수도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면 반년은 버틸 수 있는 양이에요.”
이제는 얼추 규모가 감잡힌 것일까.
감탄사와 함께 클린턴이 등받이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대단하군! 그 정도 물량이라면 당장의 혼란은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을 것이오!”
“원하신다면 저를 설득한 건 제오르 경의 공적이라고 말해 드릴게요.”
“이거 참, 예상치 못한 곳에서 큰 은혜를 입는군. 고맙소.”
클린턴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정식으로 카린에게 기사의 예를 차렸다.
너무 황송한 대접에 카린은 조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안톤이 잘됐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제국까지 그녀를 부탁할 수 있겠소? 당신이 도와준다면 굳이 내가 페로스 백작령까지 같이 가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소.”
“물론이지. 아마 그녀는 제국의 국빈으로 모셔질 걸세. 현 상황에선 거의 나라의 위기를 구한 영웅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페로스 백작과의 약속은 알지도 못하면서 클린턴은 흔쾌히 그 제안을 승낙했고, 카린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에? 당신은 또 어딜 가려고요!”
안톤은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집중된 시선에 눈을 돌렸다.
“에반하임으로 돌아가야만 하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런 안톤을 보며 카린이 다시금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녀는 자세히 캐묻지 않았으며, 또 고집도 부리지 않았다.
그저 슬그머니 미련을 한 번 내비쳤을 뿐이다.
“……금방 올 거죠?”
“잘 모르겠소. 어쩌면 제국에서의 일이 다 끝나고 나서일지도…….”
여지를 남기는 안톤의 말에 클린턴이 카린을 돕기 위해 대화에 껴들었다.
“그러지 말고 할 일을 빨리 마치고 꼭 시간을 내서 한 번 들러 주게. 자네의 얘기에 황상께서 큰 관심을 보이고 계시네.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다 하시더군.”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해 보리다.”
이렇게 한바탕의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졌다마는, 마지막으로 남은 안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언급한 것은 클린턴이었다.
“그나저나 저 친구는 이제 어쩔 겐가?”
일동의 시선이 레온에게로 모였다.
안톤 역시 무책임하게 이대로 레온을 내버려 둔 채 떠날 생각은 없었다. 단순히 옛정만이 아니라 죄책감도 갖고 있는 안톤이기에, 허용 범위 내에서라면 레온의 거처까지 해결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생각일 뿐, 레온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길게 끌 것 없이 안톤은 레온에게 다가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레온.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너는 이제 자유다.”
“……어으애우오이아.”
정확한 발음이 불가능했기에 레온이 몸까지 총동원해서 의사를 전달했다.
그의 몸동작은 너무나 명확한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내게 검을 배우고 싶다는 뜻이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어떠한 의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안톤도 이 요구에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의 무공이나 세로게트의 천검술은 가르쳐 줄 수 없지만, 보영전에서 봤던 무공서들과 코르보 백작가의 무공을 섞으면 적당한 게 나올 것도 같은데…….’
이내 안톤은 결정을 내렸다.
“알겠다. 근데 그러려면 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그리고 일단 의사소통을 하려면 글을 배워야 할 것 같은데……. 카린, 혹시 레온을 좀 부탁해도 괜찮겠소?”
“후. 항상 이럴 때만 나를 찾죠, 당신은?”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군……. 미안하오. 어쩌면 무의식중에 당신을 너무 의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고치겠소.”
“아, 아니…… 고칠 필요는 없는데……. 아, 알았어요! 이분은 제가 책임지고 살필게요. 대신 한 가지 약속해요. 세로게트 님과의 일이 끝나면 곧장 저한테 오는 거예요?”
“그러리다.”
그리고 그런 둘의 대화를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클린턴이었다.
“하하, 나만 빼고 모두가 청춘인 것 같구먼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