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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10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2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10화

110. 응징

 

 

복수.

 

한때는 그렇게 갈망했던 단어였다마는, 사실 안톤은 오늘 에멀린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거의 잊은 채 살았다.

 

전생에서는 복수할 길이 없었기에 마음을 닫고 살았었고, 회귀 후에는 자유를 얻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보니 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막상 자유를 얻고 난 이후엔, 그런 것보다도 큰일들이 주변에 넘쳐 나서 복수란 그저 인생의 낭비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건 전부 안톤의 인생이 한 번 구원되었기에 가능한 마음가짐이었다.

 

만약 누군가 옛날의 자신에게 복수를 원하냐는 물음을 던졌다면, 과연 레온과 다른 눈빛을 지을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그렇기에 안톤은 그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보아도 무방했기에.

 

원래의 레온은 일찍이 콜로세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이었다. 허나 이번 생엔 안톤의 개입으로 보다 긴 명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레온에게 결코 행운 같은 일이 아니었다.

 

‘아마 수도 없이 죽고 싶었겠지.’

 

각인 마법으로 죽음이 금지된 안톤과 레온은 상황이 다르다. 안톤은 목숨조차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그를 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한 생명이,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버텼다는 것은 흠잡을 일이 아닐 테니까.

 

‘앞으로 녀석이 다시 살아가려면, 뚜렷한 매듭이 필요하겠지.’

 

문득 펠샤인의 스승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복수보다 중요한 건 그 이후의 삶이라 했던가.

 

안톤은 그 이후 레온의 삶까지 어느 부분까지는 책임지는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싶었다.

 

“카린. 만약 내가 코르보 백작가의 혈족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소?”

 

“일단 그레일시아 전역에 수배령이 내려지고 쫓기게 되겠죠.”

 

“별거 아니군.”

 

안톤이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옆에서 눈동자를 굴려 대는 에멀린의 귀에 들리라고 괜히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근래 들어 안톤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면, 이것저것 잴 것 없이 행동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어떤 일을 저지르건, 그 뒷감당은 이제 안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안톤은 대륙의 다른 강자들과 다르게 딱히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괜히 그들처럼 정치적인 제약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다.

 

막말로 황제라도 죽여 완전히 제국과 척을 지는 것이 아닌 이상 문제는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제국과 척을 진들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자신이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요. 페로스 백작과의 약속은 어쩌려고요?”

 

그런 안톤의 속내를 읽은 카린이 기겁하며 나섰지만, 안톤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별 상관 없을 것이오. 어차피 그들의 목적이야 뻔하니까. 잘됐다며 박수를 쳐 대겠지.”

 

눈엣가시 같은 코로브니 백작가가 쑥대밭이 된다면, 가장 기뻐할 자는 다름 아닌 페로스 백작이었다.

 

“하지만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딴지를 걸 수도 있잖아요.”

 

“그러지 않을 것이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괜히 욕심부리다 파멸을 부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니까.”

 

앞으로 코르보 백작가에서 벌어질 일들을 보고도, 고집을 부릴 수 있을 배짱의 소유자로도 보이지 않았고.

 

안톤은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이렇게 되면 원래의 계획대로 굳이 복잡하게 일을 처리할 필요도 없었다.

 

“흥. 웃기고 있네.”

 

그때 대화를 엿듣던 에멀린이 코웃음 쳤다.

 

그다지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모두가 입을 닫고 있던 중에 새어 나온 것이라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뭔가 할 말이 있나?”

 

안톤이 빤히 바라보며 물어보자, 에멀린이 고개를 휙 돌리며 눈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입은 살아 있었다.

 

“그럴 리가. 어차피 곧 죽을 놈들한테 말은 무슨 말?”

 

“흐음. 지금 여기서 네가 할 소리는 아닐 텐데…….”

 

“정신 나간 새끼들! 내가 이 굴욕을 그냥 넘어갈 것 같아? 기다려 봐! 네 연놈들 모두 죽는 게 낫다고 애원할 정도의 지옥을 보여 줄 테니까!”

 

안톤이 느끼기엔 귀여운 발악이었다.

 

이 멍청한 여자는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거지?”

 

능청스러운 안톤의 물음을 다르게 받아들인 걸까. 에멀린이 의기양양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다.

 

“일단 네놈들의 사지를 잘라 낸 다음 지하실 천장에 걸어 놓을 거다. 그리고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겠어. 아, 덤으로 저 여자는 병사들이 원하면 언제든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아마 병사들이 참 좋아하겠지?”

 

30대 초반의 여인이 뱉은 말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악담에 카린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씩씩거렸다.

 

“뭐 이런 미친 여자가 다 있어요?”

 

“흥분할 것 없소. 원래 저런 여자니까. 그리고 아마도 저 계획들도 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일 것이오. 불쌍하게도.”

 

“이놈! 애걸복걸하며 빌어도 모자랄 판에, 누가 누굴 불쌍하다 여기는 것이냐!”

 

“아무래도 당신은 아직도 자신의 운명을 깨닫지 못했나 보군.”

 

안톤이 무서운 얼굴로 걸음을 내딛자, 그제야 지금 이 순간이 걱정됐는지 에멀린이 입을 꾹 다문다. 안톤은 새삼 이 여자의 생각 없음에 감탄했다.

 

“이제 슬슬 때가 됐군.”

 

안톤은 에멀린이 말만 할 수 있도록 혈을 짚은 후, 어깨에 덥석 들쳐 멨다.

 

“놔, 놔라! 이 버러지 같은 놈!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도 아득바득 소리를 치는 그녀였지만, 안톤은 추호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할 말들을 해 갔다.

 

“혹시 모르니 둘은 여기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금방 다녀오리다. 아마 그들의 신경이 온통 나한테 쏠릴 것이니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오. 그리고 레온. 너는 따라와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아으어.”

 

 

* * *

 

“레온에게 잘못을 빌어라. 그럼 풀어 주지.”

 

“죽여 버릴 거야!”

 

한적한 거리로 나온 안톤은 에멀린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고, 그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명심하고 있어라, 에멀린. 네가 레온에게 용서를 구하는 순간 모든 일은 끝이 난다. 알겠나?”

 

“뭐라는 거야! 놔! 놓으라고, 이 잡것아!”

 

“그럼, 가자. 레온.”

 

최후의 통보를 끝마친 안톤은 일정한 속도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레온은 약간의 간격을 둔 채로 그를 쫓아갔다.

 

목적지는 정중앙에 위치한 백작성이었다.

 

“미쳤어! 너넨 미쳤다고!”

 

그러는 동안에도 에멀린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악을 쓰며 난리를 피워 댔고, 안톤은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며 묵묵히 대로변 한복판을 걸었다.

 

범상치 않은 광경에 군중들의 시선이 모인다.

 

“자, 마녀가 붙잡혀 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진귀한 볼거리에 인파가 점점 늘어났고, 그중에는 당연히 에멀린의 얼굴을 아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넌지시 떨어져 쳐다보기만 할 뿐, 섣불리 안톤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멈춰라!”

 

그렇게 안톤이 걷기를 시작하고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소식이 성 안쪽까지 전해졌는지, 방패 진형을 하고 있는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안톤은 지휘관으로 보이는 기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예상외로 처음부터 거물이 나왔는데?’

 

1기사단의 부단장. 가르스톤 윈터젯.

 

평민 출신으로 준남작의 작위까지 받은, 사실상 영내 최고의 실력자.

 

지금은 오러 유저이지만, 그는 대전쟁이 발발한 후 각성해 마스터가 된다.

 

사실 그것 말고는 그에 대해 아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20년 동안 코르보 백작가의 기사로 살면서 그와는 엮일 일이 별로 없던 탓이다.

 

그는 워낙 개인주의적인 인물이었다. 괜히 안톤을 괴롭히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고, 오로지 모든 시간을 자기 개발에 썼다.

 

그래서 안톤은 고민했다.

 

‘딱히 악감정은 없는데…….’

 

죽일까, 말까.

 

그러던 사이 가르스톤이 말을 걸어왔다.

 

“전 백작 부인님을 풀어 주고 투항하라. 그럼 목숨은 부지할 수 있도록 힘써 보겠다.”

 

안톤은 코르보 백작가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그렇기에 코르보 백작가에서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근데 이런 소란을 벌인 자를 살려 준다고?

 

어린 애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미래의 그라면 모를까, 현재의 그는 그럴 만한 힘도 없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윈터젯 경! 어서 이자를 죽여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에멀린을 보자, 안톤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이 멍청한 여자는 그의 의도조차 짐작치 못하고 그를 탓하고 있었다.

 

뭐, 처음부터 그의 말이 그저 감언이설일 뿐이란 건 알았기에 별 의미는 없었지만, 이를 모르는 가르스톤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을 터였다.

 

“죽이라고!”

 

바득바득 떼를 쓰는 에멀린의 고성에 애써 지켜지던 그의 무표정이 뒤틀렸다. 그리고 그의 심정을 대신해 안톤은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길을 열어라. 안 그러면 이 여자는 죽는다.”

 

원래 이렇게 인질극을 벌일 생각은 없었으나, 조금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괜히 소란을 피우며 들어가면, 정말 죽여야 할 녀석들이 도망쳐 버릴 수도 있었다.

 

안톤의 통보에 가르스톤이 멈칫하더니 병사들을 물렸다.

 

“현명하군.”

 

이내 막혀 있던 길이 뚫렸고, 안톤은 그 사이를 걸었다.

 

대치 중이던 병사들과 가르스톤은 조금 떨어진 채로 안톤을 따라왔다.

 

‘이해할 수가 없군. 도대체 뭐가 목적이길래…….’

 

가르스톤은 의아한 얼굴로 안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처음 부하에게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생긴 의문이 점점 불안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왜 밖으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성으로 향하는 거지?’

 

이건 마치 불나방 같지 않은가.

 

돈을 목적으로 벌인 인질극이라면, 일단 찾을 수 없는 곳에 인질범을 숨기고 나중에 따로 만나 교환을 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왜.

 

무슨 이유 때문에 성으로 향하는 걸까.

 

가르스톤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함이 그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큰 실수를 저지른 사람처럼 초조했다.

 

‘어쩌면 길을 터 준 건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그런 마음이 뒤늦게 들었지만, 다시 길을 막아 세울 생각은 없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차해서 에멀린이 현장에서 죽어 버린다면, 그 책임은 그에게 돌아오게 되니까.

 

그렇게 된다면 평민이라 안 그래도 평탄치 못했던 출셋길이 이번 기회에 완전히 가로막혀 버릴 것이다.

 

‘여기서 무너질 순 없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보다 상관인 기사단장이 나타나길 염원하며, 가르스톤은 뒤처지지 않게 발을 옮겼다.

 

성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거리를 메운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 갔다.

 

병사들의 도움으로 일반인들은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지만, 인질극이 반복되며 몇 배나 증가한 병사들이 그를 포위한 형국으로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근 수백의 병사와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안톤이었으나, 그는 걸음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저 담대하게 발을 쭉쭉 내뻗었다.

 

그렇게 안톤은 마침내 성문 앞까지 도착했다.

 

사실상 현장에서는 최고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제1기사단장이 나타난 것도 그때였다. 중후한 수염이 인상적인 기사단장은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성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안톤은 이곳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반복한 말을 단어 하나만 바꿔서 말했다.

 

“이 여자를 살리고 싶다면 성문을 열어라.”

 

“그러기 전에 이러는 이유라도 듣고 싶군.”

 

기사단장의 질문에 안톤이 짧게 읊조렸다.

 

“복수.”

 

별다른 말을 추가할 것 없이, 모든 동기가 단숨에 설명되는 단어였다.

 

턱을 짚던 기사단장이 절로 수긍하고 나섰다.

 

“과연 원한을 갖고 있던 자였나. 그나저나 미련하군. 여길 지나간 다음엔 어쩔 생각이었지? 영주님 앞에서도 이런 식으로 협박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나? 죽어 달라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다. 비켜라.”

 

“백작님이 목적인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럴 수 없다. 주군을 향한 위협이라면, 아무리 티끌만 한 가능성이라도 사전에 잘라 내는 것이 나의 임무이며 역할이다.”

 

“포틀란드 경! 날 버리겠다는 말이에요!?”

 

“에멀린 님, 일의 경중을 따라야 하는 저를 용서하시지요.”

 

“이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들을 바라보던 안톤이 입을 열었다.

 

“내 복수가 아니다.”

 

처음에 안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는, 이내 뒤쪽에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초라한 행색의 사내를 발견하고는 눈매를 좁혔다.

 

“뭐? 그럼 설마…… 고작 저거 때문에?”

 

“레온이다.”

 

“뭐, 친구라도 됐던 건가? 그렇다 하면 다시 잘 생각해 봐야 할 것이야. 정말로 목숨을 내버릴 수 있을 만큼의 가치를 지녔는지 말이야. 젊은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가?”

 

“웃기는군. 언제 내가 죽을 각오로 왔다고 말한 적 있던가? 나는 이 자리에서 죽을 생각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안톤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앞으로 내가 하는 건 응징일 뿐이다. 하늘이 벌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그걸 대신해 줘야 하는 법. 오늘은 단지 그게 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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