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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09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7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09화

109. 복수

 

 

에멀린 코르보.

 

그녀는 전대 코르보 백작이 말년에 들인 세 번째 부인이었다. 그러니 정확히 호칭하자면 전 백작 부인이 맞다.

 

허나 그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냥 백작 부인이라 부른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성질 더러운 계집이 그 사람을 절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쟈빌이라는 이름의 기사 역시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쟈빌!”

 

딴생각을 하던 중의 호명되었기 때문일까.

 

살짝 흠칫하던 쟈빌이 서둘러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예, 백작 부인님.”

 

이번에는 또 어떤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벌써부터 그의 눈살이 찌푸려지려 하고 있었다.

 

“가게가 너무 시끄럽네요. 당장 모두 내쫓아 버려요.”

 

하아.

 

쟈빌은 소리도 형체도 없는 한숨을 속으로만 내쉬었다.

 

안 그래도 꽉 찬 가게에서 혼자 여덟 명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근데 시끄럽다고 영민을 그냥 내쫓겠다니, 어찌도 이리 생각이 어릴까.

 

‘이러려고 기사가 된 건 아니었는데…….’

 

허나 행동거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이렇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눈을 돌리면서 참아내는 수밖에는 말이다.

 

‘앞으로 반년만 더 버티면 된다. 그때는 1기사단으로 복귀할 수 있을 테니까.’

 

코르보 백작가에는 정식 기사단이 두 개 있다.

 

영주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1기사단과, 에멀린을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해 주는 2기사단. 원래는 1기사단뿐이었던 것이 그녀가 억지를 부려 하나가 더 늘어났다.

 

기사의 증원은 아무래도 어려우니, 1기사단의 구성원들 중 짬이 낮은 이들끼리 돌아가며 1년씩 2기사단에서 근무하는 형태였다.

 

“……알겠습니다.”

 

에멀린의 심기를 건드릴 정도로 쟈빌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쟈빌은 평생 2기사단에서 썩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는 군말 없이 에멀린의 명을 따르기 위해 가게 주인을 찾았다.

 

에멀린이 막무가내라고 그 역시 막무가내로 일을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결국 그러다간 백작가의 명성에 흠이 생기고 마는 것이니까.

 

“이보시오, 주인장.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소?”

 

결국 그는 가게 주인과 손님들에게 보상하는 것으로 협상을 이끌었다.

 

가게 주인은 아무리 돈을 쥐여 준다 해도 손님을 쫓아내는 것이 조금 걸린 모양이었지만, 에멀린의 이름을 듣자마자 안색을 바꾸고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꼬장은 이미 백작령 내에서도 자자했던 것이다.

 

“그럼 부탁하겠소.”

 

주인장과 얘기를 끝내고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온 쟈빌은 참지 못하고 표정을 구겼다.

 

기다리는 동안 지루했는지, 에멀린이 역겨운 짓을 한창 벌이는 중이었다.

 

“흐음. 하란다고 진짜 하네? 재미없게.”

 

그녀의 앞에는 벌거벗은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는 얼굴을 가린 투구마저 벗으려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 투구는 벗지 마. 비위 상하니까.”

 

에멀린이 자세를 바꿔 다리를 꼬고 앉는다. 그녀의 시선은 사내의 중요 부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진짜 이 미친년이…….’

 

쟈빌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속으로 잠재웠다.

 

대체 이 여자는 어디까지 생각 없이 살 예정인 걸까. 지금 이런 행동들 하나하나가 백작가에 대한 인식에 해를 끼친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 걸까.

 

“어머, 저게 뭐람…….”

 

“망측해라.”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제각기 한 마디씩을 던져 온다. 그러나 딱 보기에도 기사 차림인 쟈빌이 옆에 있었기 때문일까. 용기 내어 다가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쟈빌은 왠지 자신도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자존심도 없는 자식.’

 

에밀린을 향해 표독스러운 눈빛을 뿌릴 순 없었기에, 쟈빌은 굴욕을 온몸으로 맛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이름이…… 레온이라고 했던가?

 

그는 에멀린이 열 달 전에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새롭게 구해 온 장난감이었다.

 

‘나였다면 차라리 죽었을 텐데. 태생이 노예여서 그런지, 배알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는 모양이군.’

 

이내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광경에서 눈을 돌린 쟈빌은, 가게 주인을 도와 손님들을 내보냈다.

 

사실 뭐, 이미 볼 사람은 다 보았고 더 퍼질 악명도 없다마는…… 그래도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덜한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던 때, 그의 눈에 한 무리를 상대로 쩔쩔매는 가게 주인이 들어왔다.

 

세 남녀가 함께 식사 중인 테이블이었는데, 그중 한 남자의 덩치가 상당했다. 극한까지 압축된 듯한 근육과 뭔가 강인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본능적으로 압도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잠시, 상대방에게 마나가 없다는 걸 깨달은 쟈빌이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육체만은 굉장하군. 용병인가?’

 

쟈빌은 거침없이 테이블로 향했다. 그리고 사내의 몸에 쫄아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가게 주인을 대신해서 말해 주었다.

 

“미안하지만,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해 주시오. 물론 지금까지 먹은 음식 값은 내지 않아도 되오.”

 

사실 양해가 아닌 통보였다.

 

쟈빌은 혹시나 사내가 덤벼들까 싶어 아예 기까지 끌어 올려 위압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런데.

 

“거절하지.”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 * *

 

‘쟈빌. 이 녀석도 정말 오랜만이군.’

 

쟈빌 랭스턴.

 

안톤이 기사가 된 후에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자들이 몇몇 있었는데, 쟈빌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당연히 안톤의 기억 속에 좋은 추억 따위는 일절 존재치 않았다.

 

‘근데 원래 이렇게 보잘것없었나.’

 

한때는 쟈빌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왜 이렇게 가소롭게만 느껴질까.

 

그는 안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잔뜩 예민해진 상태로 안톤을 경계하고 있었다.

 

“소란은 원치 않소. 음식 값은 두 배로 보상을 할 테니 다른 곳으로 가 주시오.”

 

점잖게 다시 제안을 건네는 쟈빌이었으나, 안톤은 그가 살짝 겁먹었음을 눈치챘다.

 

안톤이 잠시 고개를 돌려 카린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내 마지막으로 그녀의 허락을 받아 낸 안톤은 현 상황에 집중했다.

 

쟈빌의 눈을 잡아먹을 기세로 바라보며 완고하게 말했다.

 

“거절한다고 말했을 텐데. 귀가 어둡나?”

 

명백한 도발에 쟈빌이 이를 악물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가 분노를 못 이기고 검을 빼 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뭔가 믿는 게 있는 건가?’

 

혹시나 하는 그 의심이 쟈빌을 망설이게끔 만들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더 기공을 이용해 안톤의 체내의 마나를 살폈다. 아까 확인한 바와 마찬가지로 단전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추측은 하나였다.

 

“혹시 어느 귀족가에서 오셨습니까? 그러시다면 제가 실수를 하지 않게 성함을 알려 주십시오.”

 

안톤은 그의 질문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참 약삭빠른 녀석이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물이랄까. 약자에게는 잔혹하지만, 강자에겐 한없이 유해지는 기회주의자. 그게 바로 쟈빌이었다.

 

만약 안톤이 별게 없다고 판명 나면 이 녀석은 곧바로 이를 드러낼 거다.

 

바로 지금처럼.

 

“안톤. 성은 없다.”

 

“이 자식이 날 놀렸군.”

 

쟈빌이 마나를 끌어 올리며 검을 뽑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재빠른 행동이었으나, 그는 검을 빼 들지 못했다.

 

“커, 컥!”

 

동작을 눈치채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안톤의 손이 쟈빌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있었다.

 

“노, 놓아줘…….”

 

안톤은 아무런 대답 없이 묵묵히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손을 풀려는 움직임조차 멎고, 그의 몸이 아래로 축 늘어졌을 때.

 

안톤은 별 감흥 없는 눈빛으로 그의 늘어진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콰당탕!

 

요란스럽게 집기들이 넘어지고, 딴짓에 한눈팔려 있던 에멀린도 그제야 안톤이 있는 곳에서 벌어진 일을 확인했다.

 

안톤은 놀란 얼굴로 몸이 굳은 에멀린을 향해 성큼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겁먹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에멀린이 급하게 외쳤다.

 

“레, 레온. 저 녀석을 막아!”

 

에멀린에게 굴욕을 당하던 알몸의 사내가 검도 없이 맨몸으로 안톤을 향해 뛰어들었다. 안톤은 그런 그를 동정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지독히 당했으면…….’

 

왠지 자신을 보는 듯해 속이 더부룩했다. 원래라면 그가 저 자리에 있었어야 했다.

 

‘나 때문인가…….’

 

분명 자신이 원래의 삶대로 살지 않았기에 그 위치에 엉뚱한 인물이 끼어든 것이리라.

 

안톤은 뛰어드는 사내의 혈을 짚은 다음, 힘없이 넘어지는 몸을 잡아 바닥에 눕혀 주었다.

 

“내,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에멀린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버럭버럭 호통을 치고 있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안톤의 몸이 흠칫 굳었다.

 

방금 전에 에멀린이 불렀던 남자의 이름이 불현듯 떠올라서였다.

 

‘잠깐……. 레온이라고?’

 

겨우 두 음절의 이름만으로 파생된 추측에 안톤의 눈매가 좁혀졌다.

 

레온.

 

안톤이 검투사 양성소에 있을 때 같은 방을 쓰던 동기가 그런 이름이었다.

 

그는 원래라면 콜로세움에 입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을 운명이었다. 그리고 안톤은 그게 안쓰러워, 가끔 시간이 빌 때마다 검술에 대한 조언을 해 주고는 했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그 덕에 콜로세움에서 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그로 인해 우연히 에멀린의 눈에 들어 팔려 왔다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이것은 오로지 추측일 뿐, 확인된 것은 없었다.

 

안톤은 서둘러 손을 내뻗어 사내의 투구를 벗겨 냈다.

 

사내의 얼굴은 확인이 불가할 정도로 처참했다.

 

절반을 넘게 화상으로 피부가 그을려 있었고, 여기저기 칼로 그어진 듯한 상처가 가득했다. 사람 피부가 아니라, 잔뜩 난도질당한 짐승의 가죽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톤은 사내의 얼굴에서 그의 예전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얄궂군. 정말로…….’

 

과거 훈련소 생활 당시 여러 도움을 받기도 했던, 그 레온이 맞았다.

 

안톤은 레온의 입에 물려진 천 뭉치를 잡아당겨 빼내었다. 천 뭉치에는 피와 고름이 가득 묻어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게 혀를 잘라 버린 건가…….’

 

안톤은 손톱이 가죽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손을 꽉 쥐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분노가 몸을 휘감고 있었다.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으마.’

 

안톤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린. 미안한데 당신 계획대로 움직이긴 어려울 것 같소.”

 

“네?”

 

안톤은 결심했다.

 

오늘 이 오랜 악연의 굴레를 매듭짓고야 말겠다고.

 

 

* * *

 

분명 혈을 짚는다는 얌전한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야 할 당위를 안톤은 느끼지 못했다.

 

“꺄아아악!”

 

안톤은 머리채를 잡고 감정을 실어 뺨을 후려치는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고, 뭔가 계속 부랴부랴 소리치던 에멀린의 입은 그제야 조용해졌다.

 

“앞으로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혀끝을 조금씩 도려내 주지.”

 

이후 한 손으로 에멀린을 들쳐 멘 안톤은 레온을 이끌고 신전을 찾아갔다.

 

그리고 적정량의 돈을 기부한 후, 주교급 사제에게 치료를 받았다. 안톤의 협박이 유효했는지, 에멀린은 그동안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그것은 카린이나 아렛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린이 입을 연 것은, 안톤이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힌 것 같다는 판단이 들고 나서였다.

 

“도대체 어쩔 생각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안톤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 역겨운 가문을 송두리째 뿌리 뽑을 생각이오.”

 

어느 정도 진정했다는 건 그녀만의 착각이었던 것일까. 과격을 넘어 파격적인 대답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랑 무슨 관계였길래…….”

 

“…….”

 

안톤은 대답하지 않았고, 카린도 더 질문을 날려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레온은 눈을 떴다. 그가 정신을 차린 걸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안톤이었다.

 

“레온. 날 알아보겠나?”

 

초점 없는 눈으로 안톤을 바라보던 레온의 눈에 희미한 감정이 서렸다. 그것은 놀람이었다.

 

“아오?”

 

혀가 반이나 잘린 탓에 완전히 뭉개진 발음이었으나, 안톤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음을 알았다.

 

“그래, 안톤이다.”

 

“으어어.”

 

레온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뭐라 뭐라 레온이 열심히 말하고 있었으나, 안톤은 아무런 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굉장한 설움만을 얼핏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으마.”

 

“으아어…….”

 

“이것 하나만 물으마. 복수하고 싶으냐?”

 

“으어어어!”

 

흐릿한 발음인 레온의 대답이, 어째선지 안톤의 귀에는 너무나도 선명히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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