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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08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3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08화

108. 악연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암살 시도 사건이 있었다.

 

대상은 그라디온 페로스. 백작가의 장남이자 유일한 후계자였다.

 

뒷산으로 사냥을 나갔던 그가 호위기사 없이 처참한 몰골로 혼자 살아 돌아오는 순간, 백작가는 완전히 난리가 났다.

 

아무리 한심한 자식이래도, 일단은 자식이라는 것일까.

 

페로스 백작은 노발대발하며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사실 누가 범인일지 의심이 가는 자는 있었다.

 

바로 그들과는 오랜 앙숙지간이기도 한 코르보 백작가였다.

 

하지만 심증만 있고, 증거가 없는 상황.

 

증거를 찾기 위해선 은밀하게 자체적으로 그들을 조사해야만 한다. 페로스 백작이 골치 아프다 여긴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였다.

 

아무것도 확실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을 보내 조사를 시키면 그쪽에서는 분명 괜히 시비를 건다며 물고 넘어질 게 뻔했으니까.

 

‘이럴 때 믿을 만한 외부인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카린이 나타난 것이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페로스 백작의 고민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대뜸 찾아와, 대신 코르보 백작가를 조사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허약한 상인에게 이런 일을 믿고 맡길 수 있겠냐며 제안을 거절했지만, 카린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믿을 만한 조력자가 있다며, 한 번 그를 만나 보기라도 하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오늘.

 

페로스 백작은 카린의 조력자를 만났고, 카린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가 상식을 뛰어넘는 가격 후려치기를 받아들인 건, 결코 카린이 말했던 협박이 통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라디온 녀석의 목숨 값이 그만큼 될 리가 있나.’

 

솔직히 말해서, 하나뿐인 아들이지만 페로스 백작은 그에게 큰 애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름 재능이 있었지만 성격이 글러먹었고, 커 가며 여러 사고들을 저질러 댄 탓에 이미 진절머리가 나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가 카린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인 건, 다 그에 상응하는 계산을 끝마쳤기 때문이다.

 

‘일만 잘 풀리면 코르보 백작령을 통째로 먹어 치울 수도 있다.’

 

그는 카린과 안톤의 정보를 일부러 흘릴 생각이었다.

 

‘그자의 실력은 쏙 감추고, 우리가 보낸 첩자라고만 하면 되겠지.’

 

그러면 끝이다.

 

이 정보를 획득한다면 그들도 분명 어떤 반응을 할 테고, 그 과정에서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최고의 상황은 그 와중에 코르보 백작가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는 것이지만, 그렇게까지 되기는 좀 요원한 일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타격은 입겠지.’

 

페로스 백작은 그 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카린이 일을 무사히 마친다면, 그쪽에서 먼저 암살 시도를 했다는 명분까지 지니게 될 테니 거리낄 것도 없으리라.

 

“하하하!”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그럼 이제 코르보 백작령으로 가는 것이오?”

 

“네.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 기다려 주시겠어요? 여기서 준비할 게 조금 있거든요.”

 

“그러리다.”

 

안톤은 카린이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에 할 일이 딱히 없었기에, 뒤뜰로 나와 적당한 그루터기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겉보기론 그래 보일지 몰라도, 그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원래도 시간이 나면 이런 식으로 검술에 대한 연구를 했었지만, 세로게트와의 비무 이후 검술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 주기가 부쩍 늘었다.

 

그러던 중 문득 주변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안톤은 무의식중으로 눈을 떠 그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익숙한 여인이 서 있었다.

 

아무렇게나 길러 뒤로 묶은 연갈색 머리에 건강미 넘치는 유연한 육체.

 

‘세이런 아크칸.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그녀는 안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히 복잡한 시선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지만, 안톤은 먼저 다가가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거라면 직접 와서 하겠지.’

 

그러려니 하며 안톤은 다시 눈을 감고 하던 일을 이어 갔다. 그리고 얼마나 더 지났을까. 떠날 준비를 끝마친 카린과 아렛이 안톤을 데리러 나왔고, 그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여인은 어느새 사라져 없어진 후였다.

 

“뭐해요? 어서 가요.”

 

여인이 있던 자리를 흘깃 쳐다보던 안톤의 팔을 카린이 붙잡았고, 안톤은 그 여인에 대한 생각은 모두 떨쳐 냈다.

 

‘왜 찾아온 건진 모르겠지만, 상관없겠지.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이후 성문 밖으로 나온 그들 셋은 곧장 이동하기보단 그 앞에서 잠시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코르보 백작가까지 어떻게 갈 건지 이동 방법에 관한 논의였다.

 

“고작 하루 거리라고는 해도, 빨리 가는 게 낫겠죠?”

 

카린의 질문에 안톤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렛이 체념한 얼굴로 안톤에게로 다가갔다. 딱히 다른 말은 없어도 이 자리의 모두가 어떤 형식으로 이동할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뚜벅뚜벅 걸어오는 아렛을 보니 피식 웃음이 새 나온다.

 

뭐, 어쩌겠는가. 억울하면 출세해야지.

 

그래 봤자 결국 카린의 밑이긴 하겠지만.

 

안톤은 자연스럽게 팔찌를 벗어 카린에게 건넸다. 그러나 의외로 카린은 이를 거절했다.

 

“아뇨. 이건 아렛에게 주세요.”

 

안톤과 아렛의 시선이 단숨에 집중되자, 카린이 쑥스러운 기색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때…… 에반하임에서의 일도 그렇고, 사실 요즘에 아렛이 엄청 고생을 했었거든요. 심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크흑…….”

 

상관에게 인정받는다는 게 그렇게 감격스러운 일이었을까. 아렛이 찔끔 나온 눈물방울을 손으로 콕 찍어 닦았다. 그리고 사기 넘치는 병사처럼 소리쳤다.

 

“아닙니다! 카린 님이 편하게 가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자, 빨리 받아요. 딴소리하지 말고.”

 

카린이 억지로 팔찌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고, 아렛은 끝까지 이를 거부하려 했다.

 

헌데, 그러던 중 아렛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눈빛! 눈빛이 평소랑 달라!’

 

아렛이 예상했던 것은 따뜻하고 배려 넘치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지금 카린의 눈빛은 어떤가. 이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보이지 않는가.

 

“알겠습니다!”

 

아렛이 팔찌를 얼른 낚아채 자신의 팔목에 채웠다. 그리고 카린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 느낀 위화감은 착각이었던 것일까. 카린은 어느새 온화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야.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질 않아.’

 

순간 소름이 돋은 아렛이 급하게 기억하고 있던 시동어를 외웠다.

 

“밤 그림자!”

 

팔찌에서 피어 나온 광채가 아렛의 몸을 뒤덮었다.

 

이내 빛이 사그라들고, 안톤은 아렛을 삼키고서 허공으로 떨어지는 팔찌를 낚아챘다.

 

“참 거창하게도 외치는구려.”

 

“그러게요. 편하게 가는 게 많이 기뻤나 봐요. 음…….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냥 등에 업히면 되려나?”

 

“편한 대로 하시오.”

 

잠시 고민하던 카린이 이내 홍조 어린 얼굴로 안톤에게로 살며시 다가갔다. 안톤은 그녀가 쉽게 업힐 수 있도록 몸을 숙여 주었다.

 

“실례 좀 할게요. 그럼…….”

 

카린이 천천히 그의 등에 올라타고, 안톤의 딱딱한 등으로 물렁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맞닿는다. 그리고 그러기 무섭게 카린이 등에서 뛰어내린다.

 

“자, 잠깐만요!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완전히 당황해 마구잡이로 손을 흔드는 카린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지만, 안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넘어갔다.

 

“그럼 아렛을 부르리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좀 불편할 것 같아서……. 혹시 앞으로 안아 줄 순 없을까요?”

 

“그러리다.”

 

카린의 조심스러운 요청에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인 안톤이 덥석 카린을 들어서 앞으로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건 좀 편하오?”

 

“네……. 괜찮네요.”

 

어째선지 그렇게 말하는 카린은 안톤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있었다.

 

 

* * *

 

코르보 백작령에 도착하기까지는 겨우 한 시간도 채 소요되지 않았다. 성이 보이는 위치에서 멈춘 안톤은 카린을 품에서 내려 주고 팔찌 속에 있는 아렛을 꺼내 주었다.

 

“일단 성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만 더 확인할게요. 다들 미리 말을 맞춰 뒀던 거 기억하시죠?”

 

“당신과 아렛은 떠돌이 상인. 그리고 나는 그 둘을 호위하는 용병. 됐소?”

 

“좋아요. 다행히 기억하고 있네요. 그럼 이제 가 보죠.”

 

복기를 끝낸 그들은 성 앞에 마련된 검문소로 향했다.

 

미리 말을 맞춰 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검문 임무를 수행 중인 경비는 건성이었다. 졸린지 내내 하품을 내뱉던 경비는, 그저 신분패와 얼굴만을 쓱 확인하고는 그냥 출입 허가를 내주었다.

 

“허무하네요.”

 

낙담한 카린을 보며 안톤이 피식했다.

 

“그럼 뭘 바랐소? 원래 이런 곳이오. 이곳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향처럼 그리 편한 느낌은 아니지만, 안톤에게 코르보 백작령은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어? 와 본 적이 있었어요?”

 

“예전에 한 번은.”

 

안톤이 무심하게 대답했고, 카린은 질문을 더 보내지 않았다.

 

사실 뭔가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었지만, 왠지 평소와 같은 얼굴인 안톤이 낯설게 느껴진 탓이었다.

 

‘여전하지만…… 새롭군.’

 

거리를 걸으면서도 안톤은 쉬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의 변화는 있을지 몰라도, 이 거리는 그의 기억과 비교하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근데 왜 이렇게 새롭다는 느낌이 들까.

 

‘아마 그건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계속해서 걷다 보니 길거리 곳곳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종종 보였다. 딱히 이름을 알거나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까 그 경비도 낯이 익었었지.’

 

하기야 아무리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살았어도,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거의 15년 정도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 정보도 얻을 겸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아, 맞다. 안톤! 그때 이곳에 왔을 땐 어디서 식사를 했었어요?”

 

감상에 빠져들던 안톤이 카린의 물음에 흠칫했다.

 

사실 그는 항상 식사는 성에서 나오는 음식으로 해결했지, 이렇게 길거리에 있는 가게에서 식사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식사를 해 본 적이 없소.”

 

“그냥 바로 지나쳤던 거군요.”

 

솔직한 대답이었으나, 속사정을 모르는 카린은 그러려니 하고 수긍했다. 안톤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생을 살았는지 실감했다.

 

“그럼 저 가게로 할까요?”

 

그들 일행이 발걸음을 멈추고 카린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아드린의 선물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이 그곳에 있었다.

 

“어째서 이곳으로 정한 것이오?”

 

“왠지 예감이 좋아서요. 상인의 직감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군. 과연 상인의 직감이라……. 대단하오.”

 

“왜요? 아는 곳이에요?”

 

“예전에 이 근방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집이 이곳이라 들었던 적이 있었소.”

 

조금 상황에 맞게 바꿔 말하긴 했지만, 이는 사실이었다.

 

간판과 건물을 보자마자 기억이 났다. 카아드린의 선물. 괜찮은 요리를 내어 주는 걸로 유명하던 가게다.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지나가는 소리로 많이도 들었다.

 

‘그때는 평생 가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러한 것들이 사치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사치였던 시절이었다.

 

카린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그녀는 미묘한 눈빛으로 안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도 그렇고 갑자기 입을 꾹 닫고 뭔가를 회상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왠지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상인의 직감이 아니라 여인의 촉이랄까.

 

“혹시 그때 여자랑 왔었어요?”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 오는 카린을 보며 안톤은 잠시 기가 찼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카린은 혼자 뭔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주특기였다.

 

뭐, 그 덕에 항상 여러 잡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만.

 

“실없는 소린 그만하고 들어갈 거면 어서 들어갑시다.”

 

“이거 질문을 회피하는 건가요? 더 수상한데…….”

 

“그때 나는 혼자였소. 그리고 그런 건 왜 묻는 것이오?”

 

“그, 그냥요! 어서 들어가 보죠. 음. 냄새도 굉장히 좋은데요? 벌써 기대가 되네요.”

 

끼이익.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종업원이 다가와 그들을 자리로 안내해 주었고, 안톤은 자리까지 가면서 가게 내부를 쭉 훑어보았다.

 

‘안은 이런 분위기였군.’

 

항상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던 가게에,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오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곳저곳 유심히 살피던 안톤의 눈이 어느 지점에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어이가 없군.”

 

안톤은 성문에서 이곳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걸었지만, 얼굴이 아니라 이름까지 기억하는 자를 만나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지금, 그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자리에.

 

그로서는 잊지 못할 이름을 지닌 자가 있었다.

 

“에멀린 코르보.”

 

백작 부인.

 

과거 안톤에게 끔찍한 기억을 선사했던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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