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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07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1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07화

107. 협상

 

 

안톤의 그 다짐은 오래지 않아 결실을 맺었다.

 

지금 그의 근처에는 검의 조각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모두 안톤이 짧은 시간 동안 연이어 상대한 페로스 백작의 기사들의 무기에서 나온 파편들이었다.

 

“내가 졌소.”

 

무기를 잃은 금발 머리의 기사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뒤로 물러선다.

 

안톤은 몇 번이나 반복한 말을 또다시 내뱉었다.

 

“다음.”

 

“…….”

 

그 무심한 한 마디에 지켜보던 페로스 백작이 말없이 꿀꺽 침을 삼켰다.

 

방금 패배한 기사까지 합하면, 지금까지 안톤이 상대한 기사의 수가 벌써 여섯 명째.

 

이제는 인정할 때였다.

 

‘더 이상의 시험은 의미가 없겠군.’

 

그러나 현재 페로스 백작의 얼굴은 패배자 특유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기분 좋은 웃음을 내짓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것은 승부가 아니었으니까.

 

“설마 이제 더는 없는 거요?”

 

안톤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 대상이 백작이란 지위를 고려하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였다. 그렇지만 페로스 백작은 그 무례를 탓하고 나설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페로스 백작은 이런 부분에서는 제법 융통성이 있는 편이었다.

 

접견실에서의 일도 그저 자신을 속이려 했다는 착각 때문이었지, 그가 무례하다 생각해서 화가 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고리타분한 전통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모든 이의 무례를 참고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마음도 없고, 영주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래서도 안 된다.

 

그가 이런 무례를 용납해 주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다.

 

상대가 그럴 만큼의 실력을 갖춘 자일 때.

 

그리고 그게 바로 안톤이었다.

 

“자네는 스스로를 증명했네.”

 

“끝이란 말이군.”

 

“그렇지.”

 

안톤이 군말 없이 들고 있던 검을 등에 멘 후, 카린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페로스 백작은 그의 뒷모습조차 유심히 살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자가 나타났을까!’

 

페로스 백작은 최대한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감탄사가 나오려는 것을 억누르는 중이었다.

 

방금 안톤은 이곳에서 여섯 명이나 되는 기사를 연이어 상대했고, 모두 단칼에 승리를 거뒀다. 그럼에도 바닥에는 희미한 혈흔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만큼 압도적인 실력이었다.

 

그가 가진 기사들로는 그의 실력을 이끌어 내는 것조차 무리였다.

 

‘만약에 마스터가 상대였다면 달랐을까?’

 

문득 무의미한 의문이라는 생각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오러 마스터라는 경지를 거론해야만 한다는 것 자체가, 안톤의 실력이 비범을 넘어선다는 뜻이었으니.

 

‘이거 참, 탐이 나는군.’

 

고작 몇몇만을 남긴 채 옆의 가신들을 모두 물리면서도, 그의 눈은 안톤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편히들 들게나.”

 

현재 안톤 일행은 아까 있었던 그 접견실에 다시 와 있는 중이었다. 겨우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대접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우선 귀해 보이는 듯한 차를 사람 수만큼 내주었고, 같이 먹을 간식들도 여러 종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서로가 얼굴을 편히 볼 수 있게끔 페로스 백작과 마주 앉았다.

 

차를 한 모금 마셔 입술을 적신 페로스 백작이 슬그머니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인사하지 않았던 것 같군. 너반툴란 페로스일세.”

 

“안톤이오.”

 

“하하. 아까 전에는 내가 자네를 오해하고 말았네. 부디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 줄 수 있겠는가?”

 

“넘어가고 말고 할 것 없이, 당연히 할 수 있는 오해였습니다, 백작님.”

 

카린이 황급히 대화에 껴들며 대신 대답했다.

 

뭔가 안톤이 이상한 말이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그것이 짐짓 마음에 들지 들지 않았지만 안톤은 굳이 따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그나저나 저 친구 역시 시간이 늘어지는 걸 그리 선호하지 않아 보이니, 그럼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예. 그러시지요.”

 

“분명 전에 만났을 때, 자네는 내게 골치 아픈 고민거리를 해결해 주겠다고 그랬었지?”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돕겠다는 것인가?”

 

카린은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그에게 설명했다. 여기선 어떻게 할 것이고, 저기선 어떻게 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까지.

 

그녀는 열성을 다해 하고자 하는 말을 전했고, 페로스 백작 또한 이를 귀 기울여 경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길었던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 났다.

 

“자네의 말은 잘 들었네. 자네와 저 친구라면 분명 실현 가능한 계획이라 사료되는군.”

 

“감사합니다. 그럼…….”

 

“하면 일단은 가장 중요한 안건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네.”

 

카린은 계속 말을 이어 가려 했으나, 대뜸 페로스 백작이 그녀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안톤이 차를 홀짝이며 역시 그레일시아의 차는 자신의 입에 안 맞는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대가로 무얼 원하나?”

 

올 게 왔나.

 

이전보다도 좀 더 진중해진 듯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그녀는 슬며시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러고 나서 흔들림 없이 그의 눈을 마주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올해 수확한 곡식의 전량을 제게 팔아 주십시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마는 전량이라……. 그래, 그럴 능력은 되고? 자네도 상인이라면 알겠지만, 지금 값이 평소보다 최소 다섯 배는 올랐네.”

 

“시세가 폭등하기 전의 가격이라면, 충분히 전량을 매입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다섯 배 넘게 값을 후려치겠다는 말을 저리도 당당하게 하는 카린이었다.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긴 한 건가?”

 

“예. 알고 있습니다.”

 

카린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페로스 백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실 굳이 자신을 콕 집어 찾아왔다는 점에서, 그녀가 값을 깎을 시도를 하리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대가뭄의 여파로 곡식 값이 폭등한 탓에 물량이 없기는 해도 당장의 시세대로 매입한다면 못 구할 것도 없었으니까.

 

허나 무려 다섯 배라니.

 

심지어 곡식의 값어치는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해서 올라가는 중이 아니던가.

 

허구한 날 합리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상인이라면, 이렇게 비현실적인 말은 해서는 안 됐다.

 

“뭔가 착각한 건 아닌가? 우리 백작령은 원래 농업으로 유명했던 곳이네. 수확량으로 치면 그레일시아에서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란 말일세.”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카린은 오늘을 위해 치밀하게 사전 조사를 해 왔다.

 

그녀가 확인한 바로는 평소 시세대로 계산했을 때, 페로스 백작령에서 나오는 한 해 수확량은 대략 8, 9만 골드쯤이었다.

 

‘올해는 전체적으로 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고 하니 많아 봤자 7만 골드 언저리겠지. 그리고 여기서 다섯 배를 곱하면…….’

 

“35만 골드. 겨우 일 하나를 하는 데 무려 35만 골드를 달라니! 자네, 제정신으로 하는 얘긴가?”

 

계산을 끝낸 페로스 백작이 흥분하며 외쳤다.

 

미처 화가 나지 못할 정도로 어이가 없었던 걸까.

 

비록 언성이 높아지긴 했지만, 딱히 그렇게까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카린이 사족을 붙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정신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원래 값어치는 돌려받으니 실질적인 손해액은 28만 골드가량입니다.”

 

물론 그것은 지금 당장의 시세만 놓고 봤을 때의 이야기고, 사막의 길이 열렸다는 정보가 풀리면 걷잡을 수 없이 더 폭등하겠지만, 그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카린도 굳이 그 얘기를 꺼낼 생각은 없었고.

 

“그게 그거란 말이네!”

 

페로스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카린을 향해 사나운 눈빛을 쏘아 냈다. 카린은 그 기세에 잠시 주춤하는 듯 보였으나, 어느샌가 들려온 안톤의 전음에 어깨를 당당히 폈다.

 

-무서워할 것 없소. 그자는 절대 당신을 해칠 수 없으니까.

 

든든한 지원군이 옆에 있기 때문일까.

 

이제 카린도 그의 기세에 밀리지 않았다.

 

그렇게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둘의 눈싸움은 한동안 지속됐다.

 

먼저 백기를 든 것은 페로스 백작이었다.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후우! 아무튼 자네가 제정신이라면 결국 둘 중 하나군. 내가 이런 제안에 응할 정도로 미련하게 비쳐졌거나, 혹 자네가 이 일에 그 정도의 값어치가 있다고 믿고 있거나!”

 

“당연히 후자입니다.”

 

“설명해 보게.”

 

“페로스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의 목숨이 지닌 가치가 그 이하일 거라곤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말을 잘해야 할 걸세.”

 

순간 공기의 흐름이 바뀐다.

 

좀 전의 눈싸움도 심상치 않았으나, 지금과는 아예 분위기가 달랐다.

 

아까는 그저 서로 조금이라도 이익을 보기 위해 기 싸움만을 벌인 것이었다면, 지금은 실제로 피가 튀어도 모자라지 않을 살벌한 분위기라고나 할까.

 

실제로 페로스 백작은 마나까지 운용해 카린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때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던 안톤이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잘못하면 어쩔 것이오?”

 

무미건조한 그 짧은 말에 무겁게 내려앉던 공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슨 이런 느낌이……!’

 

페로스 백작의 등골에 식은땀이 가득 맺혔다. 뭔가 말을 잘못 내뱉으면 그대로 당할 것 같은 감각 때문에 그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런 그를 구해 낸 것은 카린이었다.

 

“안톤, 당신은 가만있어요. 이래서야 협박이랑 다를 게 뭐예요?”

 

“알겠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톤이 페로스 백작에게서 고개를 돌려 아까부터 바라보던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페로스 백작은 숨을 쉴 수가 있었다.

 

“흐업!”

 

그는 다리가 후들거렸는지, 지친 기색으로 다시 원래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잠깐 사이 몇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다.

 

때를 놓치지 않고 카린이 입을 열었다.

 

“제대로 설명해 드릴게요. 제가 아까 그런 말을 한 건, 이대로라면 아드님께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에요. 바로 코르보 백작가의 손에 의해서.”

 

그녀의 눈은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 * *

 

“협상과 협박은 결국 한 끗 차이예요.”

 

페로스 백작이 접견실을 떠나고 묵고 있던 여관으로 돌아오며 카린이 한 말이었다.

 

안톤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녀가 자식의 목숨을 미끼로 내걸고 협상과 협박 사이의 간극에서 자기 입맛대로 페로스 백작을 요리하는 걸 방금 보고 온 직후였으니까.

 

“흐으흠.”

 

첫 단추를 잘 끼워 맞춰서일까.

 

카린은 흥겨운 기분을 주체할 수 없는지 콧소리를 흘리며 나풀나풀 걷고 있었다.

 

안톤은 아까부터 궁금했지만 페로스 백작 앞이라 참고 있던 질문을 날렸다.

 

“그런데 지금 제값을 주고 곡식을 사 와도 돈이 많이 남지 않소?”

 

안톤이 그녀에게 투자한 금액은 총 70만 골드다.

 

다섯 배가 오른 값으로 계산해서 35만 골드를 소모해도 절반이나 돈이 남는다.

 

이번 일을 끝내고 다른 영지로 가서 비슷한 짓을 또 반복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안톤은 불안했다.

 

“아, 그거요? 이미 다 썼어요. 아마, 페로스 백작가에서의 거래가 마지막 매입일 것 같네요.”

 

마치 오는 길에 사과 하나를 산 것처럼 덤덤하게 말한다.

 

안톤은 뭔가 그 문장 속에 숨은 의미가 있나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그러나 딱히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흐음. 말해 드려요?”

 

어느새 카린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만연해 있었다.

 

‘페로스 백작을 상대할 땐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몰아붙이더니…… 이럴 때는 그냥 어린 소녀 같군.’

 

역시 상인이 천직이긴 한가 보다.

 

그렇게 내심 속으로 감탄하고 있던 중에 카린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안 궁금해요?”

 

“아, 말해 줄 생각이 들었소?”

 

“처음부터 숨길 생각은 없었거든요? 우린 한배를 탄 사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서 그 많은 돈을 어디에 다 쓴 거요?”

 

“뭐긴 뭐예요. 당신이 말한 대로 곡식을 사느라 다 썼죠. 그레일시아에 막 도착했을 때는 이렇게 값이 오르기 전이었거든요.”

 

카린이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해 주었으나,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몇몇 있었다.

 

“그럼 왜 그때 다 사지 않고 이렇게 귀찮은 일을 하는 것이오?”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예요. 70만 골드어치의 물량을 구하는 게 단시간에 되는 일 같아요? 뭐, 반년이면 충분한 시간인 건 맞지만…… 세 달 전부터는 돈을 준다 해도 다들 팔지 않으려 해서 돈이 남았어요.”

 

“그랬군. 근데 그럼 그 많은 곡식들은 다 어디 있소? 그만한 물자들을 여관에서 보관할 순 없었을 텐데?”

 

“당신이 도적 무리들이 사라졌다고 알려 준 날,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바로 펭 제국으로 출발시켰어요. 상인들이 몰려들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선점해야 할 거 아녜요.”

 

카린이 한 번 씨익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이번 일이 정말로 끝. 이것만 마치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나라에서 떠날 수 있어요. 아! 그리고 축하해요, 안톤.”

 

“축하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펭 제국에서는 다섯 배가 아니라 스무 배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넘쳐 날걸요?”

 

초기 자금인 70만 골드의 스무 배면 대체 얼마인 걸까.

 

숫자를 따로 배운 적 없던 안톤이었기에, 계산이 빠릿빠릿 되지 않았으나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가히 나라를 하나 새롭게 건국할 만큼 천문학적인 액수라는 것이었다.

 

“깊게 생각할 게 뭐 있어요. 이제 우리는 부자라고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힘내 줘요, 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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