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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06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5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06화

106. 증명

 

 

날이 밝자 안톤은 카린이 구해다 준 로브를 걸쳐 입고 영주성으로 향했다.

 

미리 영주와 약속을 잡아 둔 상태였기에 입구에서부터 일사천리였다. 그들의 안내를 따라 검소하게 만들어진 접견실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다 보니 페로스 백작이 들어왔다.

 

“반갑군.”

 

흰머리가 지긋지긋 나 있는 중년 남자로, 피부의 주름들이 그를 유해 보이게 했으나 아직도 젊은 날의 고집과 기개가 겉에 남아 있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너반툴란 페로스 백작님.”

 

카린과 아렛이 그레일시아 예법에 맞춰 허리를 천천히 숙였고, 자연스레 페로스 백작의 시선이 안톤에게로 고정됐다.

 

접견실 내에서 유일하게 뻣뻣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는 자. 그게 안톤이었다.

 

“으음. 자네는 누군가?”

 

“제가 전에 말한 그분입니다.”

 

백작의 물음에 카린이 재빨리 대신 대답했다.

 

“그 조르디가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던 젊은 친구? 그럼 얼굴이나 좀 보지. 로브를 들춰 보겠나?”

 

안톤이 말없이 그의 요구를 따랐다.

 

얼굴 절반을 가리던 후드가 벗겨지자, 페로스 백작은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도 더 어리군.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그게 중요하오?”

 

상상 이상으로 무례한 안톤의 모습에, 카린이 아연실색하며 기겁한다.

 

그녀는 서둘러 페로스 백작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도 당사자인 페로스 백작은 재밌다는 듯 호쾌하게 웃어넘기고 있었다.

 

“하하! 이거 까칠한 친구였구만? 그래, 실력만 확실하다면 나이는 중요치 않겠지. 다만 조금 궁금해서 그랬네.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하고.”

 

“걱정할 필요 없소.”

 

귀족들 중에서도 간간이 소탈하고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카린은 페로스 백작도 그런 부류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게 성급한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뭔가 오해를 하는가 본데, 나는 자네를 걱정하는 것이네.”

 

어쩐지 한층 가라앉은 중후한 음성과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듯 깊이가 있는 눈이 안톤을 향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변으로 위압감이 번져 나간다.

 

아직까지 웃는 낯을 하고 있는 페로스 백작이었으나, 어느새 분위기는 완전히 돌변해 있었다.

 

“이미 방에 들어오자마자 자네의 마나를 측정해 봤네. 완전히 텅텅 비어 있더군. 내가 잘못 보거나 착각한 게 아니라면…… 자네는 그냥 사기꾼이라는 소리가 되겠지.”

 

페로스 백작이 손끝을 살짝 까딱하자, 옆에 대기해 있던 기사들이 안톤과 카린을 중심으로 사방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나는 사기꾼을 보고도 넘어갈 만큼 호인은 아니라서…….”

 

“백작님!”

 

“카린이라고 했나? 자네 아버지를 봐서 얘기는 들어 봐야겠다 싶어 이 자리에 나왔는데, 설마 나를 우롱하려 들 줄이야.”

 

크게 표정에 변화가 있던 것은 아니나, 눈치 빠른 이가 본다면 그가 화났음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무서울 만치 굳어 있었다.

 

셋 중에 가장 소심하고 기가 약한 아렛은 아예 어깨를 움츠리고 덜덜 떨 지경이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일이 꼬였다는 생각에, 카린은 서둘러 무언가를 피력하고자 나섰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안톤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분명 카린이라면 어떻게든 대화만으로도 이 상황을 좋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윽고 결정을 내린 안톤이 한 걸음 앞으로 내뻗자, 갑주를 빼 입은 기사들도 다가와 앞을 가로막는다.

 

검을 휘두르면 곧장 닿을 거리.

 

안톤은 걸음을 멈추고 손을 앞으로 천천히 뻗었다. 아주 느릿한 동작이었으나, 어째선지 기사는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마침내 안톤의 손이 기사의 오른쪽 어깨에 닿는 순간.

 

“흡!”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기사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쿵.

 

그로부터 아주 한순간의 공황 상태가 끝나고, 주변의 일동이 합을 맞춘 것처럼 검을 뽑아 들었다.

 

채챙!

 

당장이라도 살점이 튀고 피가 난자할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

 

안톤은 모든 게 장난이었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증명이 필요하다면 피하지 않으리다. 그러니 이곳에서 가장 강한 자를 데리고 오시오. 피차 시간 낭비할 건 없잖소?”

 

 

* * *

 

안톤의 당당함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아니면 그저 호기심을 자극했을 뿐인 건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성대한 무대가 차려졌다는 것이었다.

 

“페로스 백작님의 마흔네 번째 기사 세이런 아크칸. 당신의 이름은?”

 

눈앞의 상대가 나름 예를 갖추며 이름을 물어 왔다.

 

“안톤이오. 성은 없소.”

 

짧게 소개를 마친 안톤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주변에는 대충 세어 보아도 쉰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페로스 백작가의 혈족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측근들까지 모두 불러 모았기에 가능한 숫자였다.

 

‘거참, 많이도 모였군.’

 

주변을 둘러보던 안톤이 흠칫했다.

 

상대로 나온 여기사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당신도 나를 무시하는 건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 말은 반은 맞았지만 반은 틀렸다.

 

솔직히 그녀가 안중에도 없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허나 그것은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안톤은 한 번 흘깃하는 걸로 상대에 대한 탐색을 끝마친 이후였다.

 

아마도 그녀의 수준은 오러 유저의 초입 정도.

 

서른 살 전후로 보이는 외모와 여인이라는 성별을 감안하면, 그녀가 상당히 재능 있고 노력을 했는지도 알 수 있지만, 아쉽게도 그게 전부다.

 

결코 안톤이 집중해 살피거나 긴장해야 할 대상은 될 수 없었다.

 

‘불쌍하게 됐군.’

 

좀 전에 안톤은 한 번 쭈욱 주변을 훑어보았고, 그랬기에 알 수 있었다.

 

같은 편이라고 하기에는 그녀를 향한 주변의 시선이 냉랭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한식구 동료를 바라보는 눈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째선지 전생의 나를 보는 것만 같군.’

 

출신이 노예였기에, 기사의 직위를 얻었음에도 안톤은 같은 가문령의 기사들에게 단 한 번도 인정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난 동질감이 어느덧 동정심으로 형태를 바꿨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찰나의 감정이었지만 말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얼른 끝내자.’

 

아공간 가방을 품에 안은 아렛이 안톤의 옆으로 다가왔다.

 

워낙 눈에 띈다는 카린의 조언에 따라 안톤은 영주성에 들어오면서 대검을 그곳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가방에서 대검을 꺼내 들자, 곳곳에서 작은 탄성이 피어났다.

 

“휘유.”

 

“저걸 휘두를 생각인가? 제정신이 아니군.”

 

“그나저나 저런 게 가방에서 나오다니, 대체 무슨 아티팩트지?”

 

안톤은 군중들 틈새에서 페로스 백작을 찾았다. 그는 저 뒤에 가장 전망 좋은 자리에서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긴장감을 어떻게든 억누르며 필사적인 그녀와는 달리.

 

“그럼 시작합시다.”

 

딱히 진행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안톤이 입을 열어 비무의 시작을 고했다. 그러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했다.

 

“오시오.”

 

안톤은 선공을 양보했다.

 

상대 여기사는 그 행위에 짐짓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이를 거부치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악착같은 투지를 불태울 뿐이었다.

 

한 손으로 검을 쥔 여기사가 어깨가 정면에서 일직선이 되도록 몸을 틀었다. 그레일시아의 검술에 익숙한 안톤으로서는 익숙한 기수식이었다.

 

‘차근차근 시작하겠다는 건가?’

 

저 자세는 공격에 힘이 덜 실린다는 단점은 있지만, 언제든 원활하게 치고 빠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섣부른 수였다.

 

차라리 전력을 다했으면 조금 더 자신을 보여 줄 수 있었을 테니까.

 

슈욱.

 

오러가 맺힌 여기사의 검이 급소를 향해 일직선으로 신속하게 파고들었고, 그게 끝이었다.

 

서걱.

 

보다 빠르게 휘둘러진 안톤의 검이 찔러져 오던 검을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본체를 잃은 검의 끝부분은 빠르게 지면으로 날아가 박혔고, 여기사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체중이 쏠렸다.

 

“아…….”

 

짧게 스쳐 지나가는 동안 그녀가 지은 울분 어린 표정.

 

그것이 무엇인지 안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기회였겠지. 드디어 주변의 편견을 깨고 인정을 받아 낼 기회.’

 

안톤은 재빨리 검을 회수해 다시 내뻗었다. 다른 이들이 확실하게 납득할 수 있도록 목에다 검을 가져다 댈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앞으로 넘어지던 여인이 균형을 잡고 몸을 뒤집은 것이다. 그 때문에 자칫하면 안톤의 검이 단지 목에 닿는 것이 아니라, 베고 지나갈 판이 되었다.

 

‘젠장. 죽을 생각인가?’

 

안톤은 팔 힘만으로 휘둘러지던 검의 경로를 틀었다.

 

진검을 들고 행하는 대련에서 누군가 죽는 일은 흔해 빠진 이야기였지만, 그것은 서로가 혈투를 벌일 때나 발생하는 사고였다.

 

물론 지금도 그 일련의 사고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이 여인 또한 페로스 백작가의 일원이지 않은가.

 

앞으로 카린이 백작과 벌일 협상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하고자 한다면, 이 여인은 여기서 죽어선 안 됐다.

 

‘아무튼 굉장한 투지다.’

 

몸을 틀어 이제는 검이 자신의 목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고 있다는 걸 보았을 것이 틀림없는데도 그녀는 검을 쥔 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사실 이제는 검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끄트머리만 조금 남은 검자루.

 

그냥 몸으로 맞는다 해도 그리 큰 부상은 입히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목숨을 걸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미련해.’

 

이를 막는 것보다 여인을 떨어뜨려 놓는 것이 편하다고 판단한 안톤이 오른발을 들어 여인의 가슴팍을 밀어 찼다.

 

퍽.

 

여기사의 가슴 방어구에 발자국이 찍혔을 정도로 힘이 실린 일격.

 

그녀는 흙먼지를 피우며 몇 차례나 바닥을 굴렀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파 보였는지, 주변의 누군가가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으으…….”

 

“끝났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도대체 뭐지, 저 검술은? 단순히 외공이라기엔 말이 되질 않는데…….”

 

내색하진 않았지만, 안톤은 상당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저 눈을 빛내며 더욱 호기심을 왕성하게 하고 있을 뿐, 그중 어느 누구도 여기사의 몸 상태는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안톤 하나뿐이었다.

 

안톤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바닥에 쓰러진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이만하시오.”

 

여기사는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몸으로도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는다면 아마 계속해서 괴롭기만 할 뿐이겠지.’

 

안톤은 주저치 않고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당신은 졌소.”

 

“젠……장…….”

 

흐느끼듯이 뱉어지는 욕지거리에서 그녀의 울분과 체념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밌다는 듯 왁자지껄 떠드는 주변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 염려는 마시오. 이번 일은 절대 당신에게 흠이 되지 않도록 할 테니.”

 

도로 검을 거둔 안톤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페로스 백작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자, 이제 증명은 됐소?”

 

“음……. 자네가 내가 생각하던 뜨내기가 아니었다는 건 인정하겠네. 하지만 아크칸 경을 이긴 것 정도로는 내가 믿고 일을 맡길 만큼의 실력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군.”

 

“돌려 말하는 건 그만둬 주시겠소?”

 

“실력을 좀 더 보여 줘야겠네.”

 

안톤은 문득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찌 이런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는 걸까.

 

“그것참 잘됐군. 안 그래도 나도 이걸로는 부족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적어도 몇 번은 더 대련을 해야만 증명해 낼 수 있으리라.

 

여인이라고 무시받던 그녀와 이들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니, 다를지도 모르겠군.’

 

안톤은 살짝 쓰라림이 느껴지는 팔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나뭇가지에 긁힌 듯한 자상이 남아 있었다.

 

정신을 잃고 실려 간 여기사가 그의 몸에 남긴 상처였다.

 

안톤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결심했다.

 

이후 어떤 상대가 나오건, 단 한 번의 검격으로 승리를 따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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