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05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05화
105. 이동
슈욱!
그레일시아 동남부에 위치한 어느 산속 인적 없는 깊은 곳.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나타난 한 사내가 땅을 밟았다.
등에 대검을 짊어진 붉은 머리의 사내. 안톤이었다.
그는 손에 쥐어져 있는 검은 매 형상의 인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걸 손에 넣었어.”
트릭 씰.
안톤이 조르디가에서 얻은 인장의 진짜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도움으로 안톤은 본래라면 그의 이동속도로도 3일은 족히 걸릴 거리를 단숨에 도약해 올 수 있었다.
“순간이동 능력이라니 말이야.”
혼자서만 쓸 수 있으며, 지정되어 있는 일곱 가지의 장소로밖에 가지 못한다는 것 등등.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트릭 씰은 충분히 사기적인 아티팩트였다.
‘피치 못할 상황에서 비장의 한 수로도 쓸 수 있겠어.’
안톤이 트릭 씰의 능력을 듣고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시전 시간 없이 즉시 발동된다는 점이었다.
‘예비용 목숨을 몇 개나 수시로 들고 다니는 것과 진배없다.’
심지어 이건 부가적인 효능일 뿐이었다.
이 물건의 진정한 가치는, 이미 소실된 고대 마법 중 한 가지인 장거리 순간이동을 가능케 해 준다는 것이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카린이 알게 되면 엄청나게 탐내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상인인 그녀가 이 물건의 가치를 못 알아볼 리가 없으니.
원 역사대로라면 이런 물건들의 도움 없이도 대륙 제일의 상인이 되는 그녀지만, 아공간 가방이나 트릭 씰을 같이 사용한다면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일 터.
‘괜히 귀찮아질 것 같으니 이건 비밀로 해야겠어.’
카린은 믿을 만한 사람이고 그에게 힘이 되는 조력자였지만, 안톤은 굳이 자신의 물건까지 양보해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현재 어쩔 수 없이 아공간 가방은 카린이 지니고 있지만, 다시 만나면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그럼 가 볼까.”
안톤은 망설임 없이 발을 재촉해 산을 뛰어 내려갔다.
방향감을 상실하기 쉬운 깊은 산중이었으나, 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마치 이곳의 지리에 익숙하다 못해 아주 꿰고 있던 사람처럼.
크게 들이쉰 숨 속으로 짙은 풀 내음이 가득 실려 들어온다.
‘카트라 산이라……. 정말 오랜만이군.’
어느 산이나 별반 다를 것 없지만, 왠지 특히나 익숙하게만 느껴지는 건.
아마 전생에 안톤이 이곳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톤이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튀어 올라 주변에서 가장 높은 나무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 해가 지고 있는 석양, 아니 그 아래에 있던 성을 여러 감정이 얽힌 눈으로 바라보았다.
‘코르보 백작가.’
전생에 그가 인생에서 거의 절반을 보냈던 그 장소가 거기에 있었다.
잠시 그곳을 바라보던 안톤이 도로 나무에서 내려와 다시 발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르보 백작령이 있는 방향은 아니었다.
‘솔직히 앙금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굳이 찾아가서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성가시진 않겠지만 조금 귀찮다고나 할까.
이미 안톤의 머릿속에서 그들은 단순한 조무래기 그 이하였다.
‘애써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왠지 자연스럽게 그들과 얽힐 일이 생길 것만 같고.’
이후 안톤은 반나절 정도를 남하하는 데 사용했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남색 빛깔의 밤하늘이 찾아왔을 때, 안톤은 현재 카린이 머물러 있는 페로스 백작령에 진입했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망대 위에서 경비병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안톤은 그들의 눈을 피해 잽싸게 성벽을 넘어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밤에는 성의 출입이 어렵다는 점도 있지만, 비밀스럽게 와 달라는 카린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슬슬 연락을 해 봐야겠군.’
적당히 으슥한 골목길에 들어선 안톤이 품에서 위스퍼 스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시동어를 외웠다.
“산을 덮는 파도.”
카린이 연락을 받은 건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자다가 깼는지 잠겨 있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어어, 안톤. 갑자기 이 시간에는 왜…….”
“도착했소. 어디로 가면 되오?”
안톤의 질문에 비몽사몽하던 카린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변했다.
“벌써요? 잠깐만요. 지금 당신은 어디 있는데요?”
“영주성 근처에 있소. 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요.”
잠시간의 침묵이 있은 후, 카린의 한숨 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왔다.
“하……. 예상보다 빨리 찾아와 준 건 고마운데, 왜 하필 이런 시간대에 온 거예요. 지금 페로스 백작령은 통금이 엄해서 이 시간에는 도로를 돌아다닐 수가 없단 말이에요.”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나도 몰랐소. 그나저나 위치만 말해 주시오. 마중 나오는 것이 어렵다면 내가 찾아가리다.”
“거기서 동쪽으로 조금 더 오면 별빛소리라는 여관이 있어요. 규모도 크고 간판도 휘황찬란하니까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창문을 열어 두고 앞에 흰색 천을 걸어 둘게요.”
그녀답게 간결하고 명료한 설명이다.
안톤도 목적지를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였다.
“아, 그리고 한 마디만 더 하는데, 부디 천천히 오세요. 천천히! 알겠어요?”
“……그러리다.”
도로를 순찰하는 경비들의 눈을 피해 안톤은 카린이 말해 준 대로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3층 높이의 커다란 여관이 눈에 보였다.
아까 그녀가 일러 준 별빛소리라는 이름의 여관이었다.
앞면에는 창문이 열린 방이 없었기에, 안톤은 담장을 넘어 뒤뜰로 침입했다.
‘저기군.’
안톤은 2층에 위치한 방 창문에 흰색 천이 묶여 있는 것을 금방 발견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 너머로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서 잠시간 기다렸다.
창 너머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안톤의 귀로 전해지고 있어서였다.
‘뭔가 바빠 보이는군.’
안톤이 창틀을 넘은 것은 그런 야단법석이 가시고 나서였다.
“어, 왔어요?”
침착한 표정으로 되묻는 잠옷 차림의 카린을 보며, 안톤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뭔가 딱히 지저분하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방 곳곳에서 어수선함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바쁘게 방을 청소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디 있소?”
“아렛을 말하는 거라면 바로 옆방을 쓰고 있어요.”
“아, 그렇군.”
다시 생각해 보니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그녀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남녀가 같은 방을 쓸 일은 없을 테니까.
“일단 여기 앉아요.”
카린이 침대 옆에 있던 탁자의 의자를 꺼내 그에게 주고는, 자신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뭔가 어색하군.’
세로게트의 오두막에서 헤어졌으니, 벌써 반년 만이었다. 그 시간의 간격 때문이었을까?
어째선지 평소 화술이 좋던 카린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안톤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제 보니 과거의 세계에서 봤던 갓난아기 시절 그녀의 모습이 아직 얼굴에 남아 있는 것이 보여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세수를 했나 보군.”
“네. 아무래도 그렇죠? 자다가 깼으니까……. 아니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카린의 언성이 높아지자, 조금이나마 어색하던 공기가 가신다.
안톤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오랜만이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뭔가 그게 상당히 어이없게 느껴졌는지, 입을 수어 번 열고 닫았던 카린이 끝내 바닥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렇죠. 오랜만이죠. 반년이 넘게 연락이 닿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미안하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소.”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근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어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하루 만에 올 거리는 아니었는데…….”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소.”
왠지 그 방법에 대해 알려 주면, 아공간 가방이든 트릭 씰이든 둘 중 하나는 내어 줘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안톤이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제 내가 뭘 해 주면 되오? 설마 완전히 늦어 버린 건 아니겠지?”
“아뇨. 때마침 잘 와 줬어요. 안 그래도 내일 페로스 백작님과 접견 약속을 잡아 두었거든요.”
“페로스 백작이라…….”
오래전 기억이 문득 떠오른 안톤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코르보 백작가의 개로 길러져 처음으로 누군가를 암살한 자가 페로스 백작가의 혈원이었으니 말이다.
“아는 이름인가요?”
“뭐, 그냥 들어는 봤소. 그래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분 앞에서 실력을 증명하고, 소영주님을 죽이려 한 배후를 찾아내면 되는 일이에요.”
“소영주라고……?”
과연 이때부터였나.
안톤이 허탈한 웃음을 내비쳤다.
비록 앞으로 3년은 더 지난 후의 일이지만, 페로스 백작가의 소영주 그라디온 페로스를 죽인 것이 바로 그였다.
그의 죽음은 전쟁의 불씨가 됐고, 야심에 차 있던 코르보 백작령은 영지전에서 승리하며 승승장구했다.
‘전생에 내가 죽였던 대상을 이젠 지켜야 한다니. 정말 세상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는 게 도무지 쉽지가 않군.’
“왜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뭔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꼈는지, 카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안톤은 재빨리 안색을 고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일단 계속해 보시오. 해야 하는 일이 명확해서 좋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당신, 아니 우리가 얻는 이득이 뭔지를 모르겠군.”
“페로스 백작가로부터 곡식을 매입할 수 있게 되겠죠.”
참 간단하죠?
만약 표정으로도 말을 표현할 수 있다면 분명 카린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겨우 그게 전부인가? 이해가 가질 않는군.”
안톤의 삐딱한 질문에도 카린은 너그러운 선생님처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펭 제국을 중심으로 여러 국가들까지 유례없는 가뭄을 겪는 중이에요. 뭐, 땅이 비옥하기로 자자한 그레일시아는 가뭄의 여파가 타 국가에 비해 적기는 했지만, 다들 곡식 값이 더 오르길 기다리며 물량을 손에서 놓질 않고 있죠.”
“쉽게 말해 지금은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는 뜻이군.”
“맞아요. 모두 제가 예정보다 그레일시아에 도착하는 게 늦은 탓이에요. 딱 한 달만 먼저 왔어도 괜찮았을 텐데…….”
마지막 사족에서 카린의 미련이 구구절절 느껴진다.
안톤은 유독 한 달이라는 단어가 강조되어 들리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세로게트에게 들었던, 카린이 호수 앞에서 안톤을 기다린 시간이 거의 한 달가량이었다.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든 안톤이 무안한 얼굴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그럼 서둘러야겠군.”
“네. 당신의 말대로 이제 사막의 길이 열렸다고 하니, 곡식 값은 더더욱 천정부지로 치솟을 테죠. 그러니까 내일 페로스 백작을 만나서 그 보상을 확실하게 언급시키는 게 중요해요. 계약서까지는 무리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내뱉은 말은 지킨다는 평이 있으니까요. 페로스 백작은.”
카린이 안톤의 눈을 지그시 마주하며 눈을 빛냈다.
“그러니까 내일 당신의 역할이 중요해요. 안톤, 당신이 페로스 백작에게 실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모두 헛수고가 되어 버리니까.”
“그 부분은 걱정 마시오.”
나름 자신 있게 말하였으나, 아직도 카린의 신뢰 어린 눈빛에는 약간의 염려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뭐, 내일이 밝으면 봄에 눈 녹듯이 사라질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자, 이제 얘기는 모두 끝났다.
“그럼 슬슬 자야겠군.”
안톤이 기지개를 쭉 펴며 대뜸 의자에서 일어나자, 카린이 놀라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자다니……. 하, 하긴! 그렇죠. 자야죠. 아직 날이 밝으려면 한참이나 남았으니까. 근데 여기서 잘 생각이오? 아, 아니, 잘 생각이에요?”
도대체 그녀는 뭘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궁금해졌지만, 이에 대해 언급하면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잖소. 나는 옆방에 있다는 아렛을 깨워 그의 방에서 아침까지 있을 생각이오.”
“아. 그렇죠? 그럴 줄 알았어요.”
이후 안톤은 잠옷 차림의 카린에게 등을 떠밀려 방 바깥으로 내쫓기듯 나왔다.
그런데 어째선지 닫힌 문 뒤로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웅, 하고.
“아얏…….”
아렛의 방 문을 살며시 두드리며, 안톤은 소리 내어 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