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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0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9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03화

103. 협력

 

 

1:1의 대치 상황.

 

병사들은 이미 저 멀리로 물러난 지 오래였고, 그 중심에서 안톤과 가롱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대결을 시작하기 전, 가롱이 입을 열었다.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여인은 옆에 잠깐 내려 두는 게 어떤가?”

 

그저 서로가 최상인 상태에서 맞붙고 싶을 뿐인, 어떤 술수도 없는 제의.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안톤은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지.”

 

확실히 왼쪽 어깨로 여인을 들쳐 메느라 생긴 한쪽 팔의 빈자리가 크기는 하다.

 

아무리 2:1로 싸웠다고는 해도, 탈티온과 쟈카론의 협공에 정처 없이 당한 것도, 그 이유가 아마 상당한 작용을 했을 터.

 

‘그를 상대로 방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델-트로그 도적단의 두목 쟈카론과의 전투가 있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다.

 

결사적인 의지로 안톤에게 도주의 기회를 만들어 준 탈티온의 부탁을 잊을 만큼 안톤은 기억력이 나쁘지 않았고, 그의 부탁을 매정하게 외면할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가롱으로서는 그 사정을 알 리가 없다.

 

“그래? 그럼 그렇게 만들어 주지.”

 

자존심이 상해도 단단히 상했다는 듯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위잉.

 

츠레이바 특유의 곡선 형태의 검날 위로 오러가 피어났다.

 

두께는 고작 1cm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얇았고, 표면은 한적한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히 일렁거렸다.

 

안톤은 이를 보자마자 과거의 온-누르보다도 훨씬 완성된 형태의 오러라는 걸 눈치챘다.

 

“준비는 됐나?”

 

가롱의 말에 안톤도 본격적으로 전투를 개시할 준비를 시작했다.

 

안톤이 검에 의지를 불어 넣자 굳이 마나가 담겨 있지 않다 해도 어째선지 시선을 떼지 못할 만큼 강렬한 기세가 검에 실렸다.

 

“기묘한 느낌이군.”

 

그 검을 본 가롱의 감상을 끝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는 언제 맞붙어도 위화감이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

 

이를 바라보던 병사들의 눈에 긴장감이 어렸다.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누군가가 눈을 떴다. 바로 안톤의 어깨에 실려 있던 여인이었다.

 

“으음……. 숙부님? 숙부님이 여긴 왜…….”

 

방금 막 깨어나 사태 파악을 끝마치지도 못한 여인이 가롱을 보며 중얼거렸고, 가롱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곤 화들짝 놀랐다.

 

“설마 오르메넨인 것이더냐? 네가 왜 거기에…….”

 

그리고 그것은 안톤도 마찬가지였다.

 

“뭐, 오르메넨이라고?”

 

이후의 사태는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 * *

 

크렌디아 성 안에 있는 어느 귀빈실.

 

세 사람의 남녀가 거실에 있는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자네는 저 도적놈들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내 질녀를 구했다는 것이지? 도시에 무단으로 침입하고 아넨교 신전을 점거한 것은 모두 질녀의 병세가 위독했기 때문이고?”

 

“그렇소.”

 

가롱이 상황 정리를 먼저 끝냈고, 안톤은 그냥 이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그로서는 광전사 가롱 센데벨과 피를 흩뿌리며 싸우는 게 아니라 이렇게 대화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떨떠름한 일이었다.

 

“아휴……. 그 망할 놈의 성문 경비들 때문에 이 지경이 됐다는 건데……. 갑자기 열이 받는군.”

 

예상외로 가롱 센데벨은 꽤나 멀쩡했다.

 

“다음에 만나면 사지를 갈가리 찢어 버려야겠어.”

 

물론 지금 이 시기에도 도시 한복판에 콜로세움이라는 무시무시한 기관을 만들었을 정도니, 인간성 자체에는 문제가 많았지만 아무튼.

 

전생에 전장에서 미쳐 날뛰던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이상한 사상에 빠져서 옆 나라로 이민 간 내 질녀가 그놈들에게 붙잡혀 고생을 하고 있었다니. 이거 꿈에도 몰랐군. 이렇게 도시에서 놈들을 견제만 할 게 아니라 진작 선공해서 싹 쓸어버렸어야 하는 건데. 쯧쯧.”

 

안톤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금발의 여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다 싶었는데 설마 그녀일 줄이야.’

 

오르메넨 프로젠마임.

 

대전쟁에서 실질적으로 무너질 뻔한 공화당 체계를 일으켜 세우며, 여왕이란 별명을 얻은 철혈의 군주.

 

예전에 천급 보영전에서 보았던 블러드샤롯의 주인이 바로 그녀였었다.

 

‘왜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거지?’

 

안톤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다른 유명인들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르메넨은 과거 같은 연합군에 속해 함께 전쟁을 치르기도 했었지 않은가.

 

나중에 레노테이르는 연합군에서 탈퇴하고 다른 진영에 붙은 후로는 볼일이 없긴 했다마는, 수도 알서스에서 펼쳐졌던 공성전은 근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어졌었다.

 

그렇기에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를 나눠 본 적은 없다고 해도 안톤은 멀리서 그녀를 자주 보았다.

 

그런데 설령 그때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바로 알아보지 못한 건 조금 이상했다.

 

‘그건 그렇다 쳐도, 가롱 센데벨이 그녀의 숙부라는 건 믿지 못할 이야기군.’

 

솔직히 안톤은 아직까지도 그들의 관계가 정말 사실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알서스에서 펼쳐졌던 전투에서 적군의 장군이었던 자가 바로 가롱 센데벨이었으니까.

 

서로를 원망하고 증오하며, 어떻게든 죽이기 위해 혈안이었던 그 둘이 이렇게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은 안톤이 보기에 너무도 어색한 광경이었다.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정말 위험했을 거예요.”

 

문득 행해진 오르메넨의 감사 인사에 안톤은 낯이 뜨거워졌다.

 

물론 실제로 그러진 않았지만, 전투 중에 수도 없이 그녀를 버릴 생각을 했던 그였으니까.

 

그렇게 이 공을 다른 이에게 돌렸다.

 

“세로게트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내가 당신을 구할 일도 없었을 테니, 감사의 인사는 받지 않겠소.”

 

“세로게트라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는 반응이자, 안톤은 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아! 에반하임에서 도와주신 거였군요.”

 

그렇게 말하는 오르메넨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기야, 본국도 아닌 곳에서 보낸 자로 인해 구출되었으니 기분이 묘하기도 할 터.

 

게다가 그녀의 안색을 흐리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숙부님! 그리고 안톤 님! 혹시 성주님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실 수는 없을까요?”

 

탈티온 베니체른.

 

그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감정을 호소했다. 말 자체는 단도직입적이고 짧았지만 그녀의 비통한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말의 대상자가 가롱 센데벨이었으며, 안톤이었다.

 

“엥? 아까 듣지 않았더냐. 분명 벌써 뒈졌, 아니, 죽었을 것이다.”

 

무심하게 말을 내뱉은 가롱이었으나, 오르메넨의 이어진 눈빛 공격에 항복을 외쳤다.

 

“으음……. 복수라면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해 주마. 내 질녀를 건드린 대가는 치러야지.”

 

이제 그 애잔한 눈빛이 안톤을 향했다.

 

“나는 아직 그가 살아 있다고 보오. 하지만 구출에는 회의적인 입장이지. 아까처럼 운 좋게 정신을 차리는 것이 또 가능할 것 같지가 않소. 만약 그를 정신 차리게 할 방법이 없다면, 나는 그자를 죽일 수밖에 없소.”

 

“그건 제가 방법을 알아볼게요. 그럼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시죠?”

 

“뭐, 도적놈들을 쓸어버리는 일은 도우리다. 아니, 애초에 원래 내가 하려는 일이었고.”

 

오르메넨은 결과적으로 안톤과 가롱의 협력을 얻어 냈다.

 

일단 그렇게 한 가지의 안건이 종결되자, 가롱이 안톤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쉽군. 한 번 제대로 싸워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이거 은인을 상대로 내 멋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안톤은 피식 웃었다.

 

질질 말꼬리를 끄는 모습에서 그의 미련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안 그래도 나도 아쉽던 참이오. 그럼 그럴 것 없이, 이따가 한판 붙읍시다.”

 

“오, 호쾌하군! 이거 갑자기 마음에 드는걸? 어떠냐, 오르메넨. 네 배필로는?”

 

호쾌한 것에서 갑자기 배필이라니.

 

안톤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가기 어려운 사고방식이었지만, 오르메넨에겐 익숙한 일이었나 보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숙부를 째려본 그녀는 안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의미 부여하려 들지 말고, 모두 무시하세요. 원래 숙부님은 항상 저러시니까.”

 

 

* * *

 

이후 안톤은 가롱과 살벌한 비무를 벌였고, 대략 200수 만에 안톤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가롱은 어느 순간 갑자기 베여 버린 자신의 검을 허탈한 눈으로 보더니, 어떤 말도 없이 휙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

 

그리고 안톤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금은 가슴이 답답했고,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며칠 사이 내가 부족한 게 무엇인지 절절히 깨닫는군그래.’

 

세로게트와의 대련에선 순수한 기량의 부족을 느꼈다.

 

쟈카론과의 전투에선 일 대 다수의 상황에서 천검술이 보이는 약점을 알게 됐고, 가롱과의 비무에선 이기긴 했지만 결코 자신의 검이 완벽하지 않음을 깨닫게 됐다.

 

‘역시 세상엔 강자가 많아.’

 

그렇다고 안톤은 좌절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검술이 부족하고, 약점이 있고,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반대로 더 성장할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기에.

 

‘설마 비무에서 진 걸로 애 같은 짓은 하지 않겠지?’

 

안톤은 가롱 센데벨을 떠올렸다.

 

그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변덕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러니 감정적인 이유로 협력하겠다는 말은 취소한다고 말을 바꿔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설령 그게 자신의 부탁도 아니고, 질녀의 눈물 어린 부탁이었다고 한들 말이다.

 

안톤은 그런 걱정을 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이 우스웠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와의 협력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그가 탈티온만 맡아 준다면, 쟈카론과도 겨뤄 볼 만할 테니까.

 

단순히 베겠다는 의지만 불어 넣은 검으로는 마스터의 무인이 펼쳐 낸 오러나, 그에 준하는 어떤가를 상대할 수 없다.

 

신안을 개방해 결을 찾아내고 정확히 그 지점을 검으로 베어 내야 한다.

 

하지만 쟈카론과의 전투에선 그것이 어려웠다. 하나를 베려 하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옆에서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결만 잘 노리면 검강이라도 능히 베어 내나, 방해를 받아 정확한 지점을 타격하지 못했을 시에는 큰 위력을 보일 수 없다는 것.

 

이게 바로 천검술이 지닌 약점이었다.

 

‘그나저나 세로게트가 말했던 그 힘이…… 이런 것이군.’

 

안톤은 새삼 운명이란 단어가 가진 힘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오르메넨과 가롱 센데벨. 그 둘과의 만남은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아무래도 시기가 너무 적절했으니까.

 

‘혼자만의 힘으로는 감당키 힘든 적을 만나자마자 적절한 조력자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안톤이 자조 섞인 웃음을 내지었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들조차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후……. 생각은 이만하도록 하자.’

 

이 화두를 가지고 꼬리를 물면 물수록 갑갑함은 커지기만 한다.

 

이내 상념들을 떨쳐 낸 안톤이 품속에서 위스퍼 스톤을 꺼냈다.

 

도적들을 토벌하는 일은 오르메넨의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로 결정됐기에 시간이 제법 남는다.

 

뭐, 그 시간 동안 할 일이 마땅히 없기에 수련이나 하면서 보낼 생각이었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곤란하다던 그 일이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하고. 늦는다는 것도 얘기해 줘야 하니까.’

 

사실 어째선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것도 있었다.

 

“산을 덮는 파도.”

 

안톤이 시동어를 외우자 위스퍼 스톤이 푸른색 빛을 내기 시작한다.

 

가끔 시간이 안 맞으면 서로 연결되는 데 오래 걸릴 때도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금방 카린의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 안톤? 벌써 일이 다 끝난 거예요?”

 

“그건 아니고……. 일이 조금 꼬였소. 그래서 당신을 도우러 가려면 아마 시일이 더 걸릴 것 같아서 연락했소.”

 

“음……. 그랬군요. 어쩐지, 그 악명 높은 도적 떼들이 상대인데 너무 빨리 연락이 왔다 싶었어요.”

 

아주 잠시였지만 잔뜩 기대하던 목소리가 풀이 죽은 게 느껴진다. 당연한 일이다.

 

에반하임과 사막의 길이 막혀 예정보다 그레일시아에 늦게 도착한 바람에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고, 지금 그녀에겐 안톤의 힘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니까.

 

‘운명이란 녀석이 쉴 틈을 주지 않는군.’

 

그런데 잠깐 말이 없던 안톤이 심상찮게 느껴졌던 걸까.

 

카린이 다시 원래의 목소리로 활기차게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일단 급한 대로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그러니까 무리는 하지 말라고요. 저번처럼 또 운 좋게 엘릭서를 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니까.”

 

그 장난기 어린 말에선 배려와 걱정이 묻어났고, 안톤은 그런 카린이 고마웠다.

 

분명 그녀와 만나게 된 것은 운명의 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그녀의 조력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아마 온-누르나 핫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이것 하나만큼은 운명이란 녀석에게 고마워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뭔가 갑갑했던 기분이 그나마 가시는 듯했다. 안톤은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고맙소. 덕분에 머릿속이 한결 개운해졌소.”

 

이후 안톤과 카린은 서로의 근황에 대하여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잘 모르고 있었으나, 대화 내내 안톤의 얼굴에는 푸근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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