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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98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8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98화

098. 구속

 

 

펭 제국 황궁 한복판에 위치한 어느 접견실.

 

정장 차림의 사내가 다리를 꼰 채 소파 위에 앉아 있다.

 

그는 지금 무언가를 유심히 읽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얼마 전 자론이 그에게만 따로 보내온 자료였다.

 

“흐음.”

 

아르토르가 왼손으로 턱과 목 사이를 쓸어 만졌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할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자료 내용 자체는 오로지 주관적인 내용들로만 눌러 담긴 추론에 불과했으나, 그 주제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도 그럴 게 영웅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

 

“영웅 후보라…….”

 

자론이 보낸 자료에는 이번 시대의 영웅으로 추측되는 인물들에 대해 쓰여 있었다. 후보는 총 다섯 명으로 이미 대륙에 명성을 자자하게 떨치는 이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성별과 국가, 혹은 종족까지. 후보들 제각기 다른 특징들을 갖고 있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하나같이 20세 전후의 젊은 나이라는 것이다.

 

문득 20년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아르토르가 턱을 매만지던 손을 더 아래로 내렸다. 그곳엔 일자 모양으로 길게 그어진 흉터가 있었다.

 

적극적으로 치료를 하고자 했다면 흉조차 지지 않았을 상처.

 

허나 그는 일부러 상처를 내버려 두었고, 결국 오돌토돌하게 흉터가 남았다.

 

아르토르는 이 흉터를 좋아했다. 이렇게 살살 문지르고 있으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실감나는 것이다.

 

“드시면서 하시지요.”

 

“매번 고맙습니다, 살라첸.”

 

“별말씀을…….”

 

아르토르는 여인이 가져다준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곳엔 자론이 조사한 다섯 명의 후보들 중 마지막 후보에 대해 적혀 있었다.

 

“붉은 머리에 회색 눈이라…….”

 

마지막 후보의 인적 사항을 중얼거리며 아르토르는 자료를 뒷장으로 넘겼다. 그곳에는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남자의 초상화가.

 

잠깐 생각을 정리한 아르토르가 옆에 있던 여성을 불렀다.

 

“살라첸. 아무래도 정기 집회를 조금 앞당겨서 열어야겠습니다. 모두에게 공지해주세요.”

 

“무슨 안건이라고 얘기할까요?”

 

“우리의 최대의 적을 찾아냈다고. 그거면 충분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옆에서 계속 서 있던 미모의 여성이 어디론가 떠나고 나서도, 아르토르는 한참이나 초상화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제야 다시 만나게 됐군요.”

 

아르토르는 다시 장을 넘겨서 앞으로 넘어왔다.

 

그곳에는 마지막 후보에 대한 정보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물론 이름도 있었다. 아르토르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안톤.”

 

뭔가 한참이나 알고 지낸 이의 이름처럼 발음이 입에 익다. 아르토르는 종이에 적힌 안톤의 이동 경로까지 확인한 후 씨익 웃었다.

 

“사막이라……. 그러고 보니, 쟈카론이 그곳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지?”

 

아아,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아주 재미난 그림이.

 

아르토르의 길어진 입꼬리는 한참이나 내려오질 않았다.

 

 

* * *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움푹 바닥이 패고, 몇 걸음 가기 전에 다시 채워진다. 태양의 열기는 강렬하게 내려쬐고 있으며, 은은하게 부는 바람에는 익숙한 모래의 향이 가득 실려 있다.

 

창궐한 도적 떼로 인해 상인들의 발길이 사라진 츠레이바의 사막 한복판.

 

현재 그곳에 안톤이 있었다.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안톤이 무심코 이마를 닦았다.

 

사실 어지간한 열기에도 땀 한 방울 나지 않는 몸이 되었기에 무의미한 행위였지만, 아직 그의 몸이 이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거 참 감회가 새롭군.”

 

문득 이 뜨거운 무더위 속에서 검을 휘두르던 나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땐 이렇게 자유로운 몸이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한참이나 여운에 빠져 있던 안톤이 고개를 덜컥 저었다.

 

‘현재에 만족해선 안 돼.’

 

운명에 관한 얘기들을 실컷 들어서인지 이젠 솔직히 이것에 그리 큰 의미가 있겠는가 싶긴 하다마는, 그리도 바라던 자유는 손에 넣었다.

 

하지만 안톤의 간절하던 바람들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바로 다름 아닌 검.

 

‘아직 갈 길이 멀어.’

 

전생에선 꿈도 꾸지 못할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후.

 

솔직히 말해서 안톤은 안주해 있었다. 초심을 잊어버리고, 섣불리 검의 완성을 논했다.

 

아마 그러한 것에는 오러 마스터인 온-누르나 가우스트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예전부터 무의 끝은 마스터의 경지라 믿고 있었고, 그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기어코 안톤은 검으로 그들의 인정을 받아 냈으니까.

 

하지만.

 

그건 결코 끝이 될 수 없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고, 세로게트와의 지난 비무에서 그 사실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그는 강했지…….’

 

안톤은 며칠 전에 있었던 비무를 또다시 상기해 보았다.

 

비무 내용은 간단했다.

 

서로 검을 마주 들고선 수십 차례 검격을 주고받았고, 그 이후에 안톤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패배했다.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오러 유저와 마스터처럼 쉽게 메울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간극이 둘 사이에 존재했던 탓은 아니었다.

 

둘 모두 검에 의념을 불어 넣을 수 있었으며, 둘 모두 신안을 개방해 사물의 결을 볼 수 있었다.

 

물론 혼요종과 인간이라는, 종족의 차이에서 오는 신체적인 능력차는 존재했다. 허나 그 차이는 이런 일방적인 결과를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랗던 것이 아니다.

 

우습게도 세로게트와 안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검술이었다.

 

-한 5천 년 정도 심심할 때마다 검을 휘둘러 보게. 그럼 나처럼 될 수 있을 테니.

 

머쓱하게 말하는 세로게트의 한 마디를 들었을 때.

 

안톤은 누군가가 둔기로 뒤통수를 내려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무력에만 정신이 팔려 어느새 검이란 것의 본질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의념을 불어 넣은 검은 무엇이든 벨 수 있게 해 주고, 신안으로 바라본 세상은 적들의 약점을 알려 준다.

 

그러나 결국 그 검이 닿지 못하면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 기세에 어떤 힘을 실었건 그것은 그저 공허한 일검일 뿐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아무리 서투른 일검이라 한들, 상대의 몸에 닿기만 한다면 그 일검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야말로 검이란 무기가 지닌 본질이었다.

 

아주 단순한 이치인데도, 안톤은 잠시 그걸 잊은 채 살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그 진리를 다시 깨우칠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는데도.

 

안톤은 온-누르가 누누이 강조했던 말을 떠올렸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사람이다.’

 

아무튼 세로게트와의 비무는 여러모로 뒤를 돌아볼 수 있게끔 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그 탓에 이렇게 귀찮은 일에 다시금 말려들어야만 하긴 했다마는.

 

-너무 실망하지 말게. 자네는 충분히 더 강해질 수 있으니까. 내 부탁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온다면 그 방법을 알려 주도록 하겠네.

 

세로게트의 부탁은 간단명료했다.

 

츠레이바의 도적 떼에게 포로로 잡힌 탈티온과 그의 부관을 구출하고, 함께 도적 떼를 섬멸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포로로 잡힌 그들의 생사는 여차하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나저나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무인을 포로로 잡는 도적 떼라니, 믿을 수가 없군.’

 

아무래도 보통 도적 무리들은 아니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안톤은 오히려 상대가 강하다는 사실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적을 얕잡아 보고 방심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안톤이 싸우는 걸 병적으로 좋아하는 전투광이었을 뿐.

 

“그건 그렇고, 여전히 기분 나쁜 곳이군. 일만 끝내면 서둘러 떠나야겠어.”

 

어서 도적놈들과 조우하길 기대하며, 안톤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델-트로그 도적단 진영의 정중앙.

 

철창 속의 사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팔과 다리가 구속된 채 포박되어 있는 남성의 이름은 탈티온으로, 반년 전 에반하임에서 안톤과 잠깐 엮인 일이 있었던 자였다.

 

레노테이르의 사절로 에반하임을 방문했던 그는, 그곳에서 단 하루도 묵지 않고 혼요종들의 요구를 따라 곧장 츠레이바의 사막으로 향했다.

 

도적놈들에게 죽임당한 어린 혼요종들의 복수를 대신 해 주기 위함이었다.

 

사실 그들의 복수를 인간이 대신 해 준다는 것도 웃긴 일이긴 하다마는, 혼요종인 그들이 나선다면 인간과 혼요종 사이에 분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레노테이르의 영토 내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모를까. 범인은 츠레이바에 주둔하는 도적 무리들이다. 혼요종들이 츠레이바의 국경을 넘는 순간 국제적인 소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것이 도적을 응징하기 위함이라고 한들, 츠레이바 측에서는 꼬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질 게 분명하다.

 

그들 국가의 정서 자체가 이종족을 적대시하는 것은 둘째 치고, 그들은 레노테이르와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걸 넘어, 적대적이라고 봐도 무방한 경쟁 관계였으니까.

 

‘아마도 구조대는 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어떻게든 자력으로 탈출해야 하는데…….’

 

탈티온은 양손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덜컹덜컹하는 사슬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려 퍼졌지만, 철창 주변에 위치한 도적들은 별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다.

 

주변의 모두가 탈티온의 지금 이 행동이 그저 미련한 짓일 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읏!”

 

마나 사용에 제약을 받은 지금. 육체의 힘만으로 철로 만들어진 구속구를 풀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미련한 짓이기도 했고.

 

허나 그럼에도 탈티온은 이 짓을 석 달이나 넘게 반복했다. 철창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에겐 괴로운 일이었다.

 

안 그래도 너덜너덜하던 손목에서 다시금 피딱지가 벗겨지며 핏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젠장, 젠장, 젠장!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이제는 어떤 소란을 벌여도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들을 증오의 눈길로 바라보며, 탈티온은 속에서 피어나는 모든 분노를 담아 외쳤다.

 

허나 돌아오는 것은 고작해야 비웃음과 조롱뿐이었다.

 

“어, 거기 양반! 오늘따라 더 시끄럽네. 대충하고 자쇼!”

 

고작해야 마나 유저.

 

갇히지 않았다면 자신의 눈길조차 받아 내지 못했을 조무래기들의 멸시.

 

이렇게 사로잡혀서 그들에게 생사여탈권을 내줘야 한다는 무인으로서의 굴욕.

 

모두가 하나같이 일생일대의 치욕이지만, 정말로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오르메넨.”

 

괜히 자신이 데려온 탓에 이런 굴욕과 멸시를 함께 견뎌야 하는 그의 부관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네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미안하구나.”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탈티온이 염려했던 수모가 그녀에게는 자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야만적인 도적놈들이 미모의 젊은 여성을 그냥 내버려 뒀다는 건 암만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다만, 그래도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여인으로서 씻기 힘든 수치를 당했다면, 그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오르메넨의 옥살이가 편했다는 것은 아니다.

 

마나를 봉인 당했어도 탈티온은 무예를 수련한 무인이었고, 그녀는 체력이 약한 마법사였으니까.

 

아마 그보다도 몇 배는 더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지금까지 버텨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

 

결국 그녀는 얼마 전에 병에 걸렸다.

 

평소였으면 고뿔처럼 그저 지나갔을 정도의 병이었지만, 가뜩이나 기력이 상한 몸에는 그마저도 치명적이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생명까지 위협할 정도로.

 

그러나 아무리 치료를 호소해 봤자, 그들이 조치해 준 것은 고작 수갑을 찬 채로 바닥에 누울 수 있게 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열이 들끓는 그녀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심지어 오늘 오르메넨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느라 끼니도 때우지 못했다.

 

‘그래……. 이젠 어쩔 수 없어…….’

 

탈티온은 결국 그동안 지켜 왔던 의지를 스스로 꺾었다.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

 

아까 악을 써 가며 지르던 외침과는 대조적인 작은 읊조림.

 

겨우 그것 하나에 주변에서 고기를 뜯어 먹으며 왁자지껄 떠들던 도적 무리들의 시선이 변했다.

 

마치 여태까지 이 말만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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