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96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96화
096. 역할
“안톤, 꼭 행복하렴.”
그 한마디를 끝으로 안톤은 정신을 차렸다.
사실은 그저 눈만 떴을 뿐이지, 완전 정신을 차린 건 아니었다. 혼미한 정신으로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안톤이 헤르시를 두고서 사라진 이후에 그녀가 겪은 일들에 대한 기억이었다. 단순한 관찰자의 시점이 아니라 그녀 본인의 시점에서 보고 들으며 했던 생각들까지 세세히 기억이 났다.
가장 마지막.
이별하는 순간의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던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은 지금도 가슴에 아린 듯 맺혀 있어 선명했다.
그래서였을까.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에 눈물이 나왔다.
말은 오랜만이라 했지만, 사실은 처음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안톤이 기억하는 생애에서는 슬프거나 분해서 눈물짓던 기억은 존재치 않았으니까.
고양감과는 전혀 다른, 처음으로 겪어 보는 벅찬 감정.
안톤에게 이러한 감정은 생소한 걸 넘어 신비한 종류의 것이었다.
‘아무도 보질 못했으니 다행인 일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설령 누군가 본들, 눈물을 흘리는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확인할 길이 없을 터였다. 지금 그는 물속을 헤엄, 아니 부유하고 있었으니까.
어두운 수중에서 안톤이 어미 배 속의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어차피 한겨울의 냉기도 문제없는 그였지만 마침 물의 온도도 적당했다.
호흡 문제 따위야,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지 오래였기에 그리 문제 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감정을 추스르다가,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고서야 물 밖으로 나왔다.
한밤중인 밖은 어두웠다.
그리고 물속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춥지 않았다. 막 잎이 나고 풀이 자라기 시작하던 숲에는 어느새 수풀이 무성했다.
“계절이 바뀌었군.”
“그래도 계절이 두 번 바뀌기 전에 돌아왔으니 다행이라 여기게.”
혼자서 중얼거렸던 한 마디에 대답이 돌아왔다. 세로게트였다.
그 말로 인해 속에서 서서히 커져 가던 불안감이 종식됐다. 적어도 몇 년이 후다닥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소?”
“189일. 자네가 그곳에 가고서 반년이 조금 넘었군. 호오. 그나저나 그 검은 예전에 내가 빌려줬던 검이군?”
“아, 잘 썼소이다. 나름 조심히 쓴다고 썼는데 손질은 한 번 다시 해 주시오.”
“그러지. 일단 들어가서 옷부터 말리는 게 어떤가? 아무래도 서로 듣고 싶은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그럽시다.”
세로게트의 오두막은 놀랍게도 20년 전이나 반년 전이나, 또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여러 잡다한 골동품들이 가득했고, 집주인의 성격대로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세로게트가 난로에 장작을 지피려는 걸 안톤이 말렸다.
“괜찮소. 한겨울도 아니고, 이 정도야 금방 마를 테니.”
뭐, 한겨울이라고 한들 옷이 젖은 것 정도로 몸에 탈이 나거나 하진 않겠지만.
고개를 끄덕인 세로게트는 들고 있던 장작을 내려놓고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음! 어떤 말로 이야길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래, 그곳은 어떻던가? 무슨 일들을 겪었지?”
그의 눈에는 호기심이 그윽했다.
허나 안톤은 그가 단순한 흥미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해 오는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당신이 알고 있는 것부터 말해 주시겠소? 분명 내게 설명해 줘야 하는 게 있을 텐데?”
“허허. 이거 내가 너무 나만 생각한 모양이군. 부끄럽게도 말이야.”
세로게트를 바라보는 안톤의 눈에는 강인한 의지가 뚜렷하게 비치고 있었다. 털털 웃음소리를 내짓던 세로게트의 눈빛이 한순간에 돌변했다.
“누구의 입이 먼저 열리는지, 선후는 중요치 않겠지. 어차피 자네가 돌아오면 모두 얘기해 주려고 했으니까. 그래서 지금 자네는 무엇이 가장 궁금한가?”
대뜸 보내진 과거의 세계.
그리고 그곳에서 겪은 상식을 초월하는 신비들.
묻고 싶은 질문만 모아도 적어도 한 보따리는 된다.
온-누르와의 일이며, 부모와의 일이며. 블라디미르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집단이고, 안톤이 돌아오며 만났던 그 존재는 어떤 것인지까지.
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을 묻는다면 단연코 이것이었다.
“나는 대체 누구요?”
회귀하기 전, 안톤은 그저 노예 기사였다. 주인을 위해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며 어떤 짓이건 서슴없이 행하던. 특이하긴 해도 결코 특별하지는 못했던.
그러나 죽음 이후 어린 시절로 돌아오고서부터 묘한 운명이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온-누르를 만나서 검을 배웠고, 블라디미르를 만나서 싸웠다. 그런 과정 중에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경지에 몇 년 만에 올라섰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니까. 그때만 해도 세상일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만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검술의 원류를 알기 위해 찾아온 이곳에서, 뜬금없이 과거로 보내진 이후부터 안톤은 거대한 혼란을 마주했다.
온-누르를 만났다.
검을 배웠던 그에게 되려 검을 가르쳐 줬다.
부모를 만났다.
회임 중이던 그녀가 출산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 적들로부터 그녀를 지켰다.
어떤 존재를 만났다.
집행자니, 율법의 힘이니, 운명이니. 알 수 없는 소리들만 가득하게 들었다.
하나같이 모두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적인 현상들뿐이다. 아넨교의 교리를 응용하자면, 달걀이면서 동시에 닭이기도 한 자. 그게 안톤이었다.
“정말 운명이란 게 존재하는 것이오?”
안톤의 물음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세로게트가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네.”
그 나지막한 한 마디는 마치 선고 같았다.
노예로 태어난 운명을 뒤바꾸기 위해 하였던 안톤의 노력들과, 그로 인해 달성한 모든 결과들이 결국 그 단어 하나로 끝이 나 버렸으니까.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모든 운명이 정해진다면, 도대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야 하지? 그 아넨교가 말하는 다음 생에 좋은 운명을 타고나기 위해?
아니,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어차피 노력조차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타고나지 못한 자들은 끊임없이 그 굴레 속에서 삶을 반복해야 한다는 거니까.
“분명 운명은 존재하네. 하지만 완전히 정해진 운명은 아니지. 지금 이 순간순간에도 개개인의 선택에 따라 그들의 운명은 천차만별로 변하고 있네.”
“그렇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의 운명이라고 할 수 없소.”
“그렇지. 하지만 그 살아가며 그들이 하는 선택 하나하나조차도 운명이란 말로 정해진 자들이 있네. 바로 자네나 나 같은.”
“나와 당신 같은 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소.”
“이 시대가, 아니 이 세계가 직접 역할을 부여한 자들 말이네.”
“역할이라니? 그럼 내 역할은 도대체 뭐요?”
“자네의 역할이 뭔지는 그곳에서 겪은 이야기를 듣기 전엔 알 수가 없네. 그러니 이제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그곳에서 자네가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
입을 굳게 다물고 고민하던 안톤이, 과거의 세계에서 겪은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사건 사건마다 느꼈던 고민과 결정들까지 세세하게 말해 주었다.
세로게트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이야기를 경청했다. 안톤의 입가에 고정된 시선이 아니었다면 딴청을 피우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의 집중력이었다.
그런 그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연 때가 몇 번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온-누르와의 만남을 얘기하던 때였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군.”
“당신은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물론 이런 경우는 나 역시 처음 들어 보네만……. 아무래도 자네의 운명에는 천검술이 필요하다고 세계가 판단한 것이겠지.”
“그럼 그렇게 복잡하게 할 것 없이, 차라리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 검술을 배우면 되는 거 아니오?”
“나는 제약에 묶여 있어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네. 게다가 인간이 천검술을 쓸 수 있게 하는 방법 따위 나는 모른단 말일세. 그냥 그럴 운명이었던 거라고 생각하게나.”
“뭐만 하면 다 운명이라니, 참 편리한 말인 것 같소이다.”
“흠흠. 아무튼 계속 말해 보겠나?”
무안한지 헛기침을 내뱉는 세로게트를 모른 척했고 안톤은 끊겼던 부분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아까처럼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런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가던트와의 여행이 끝나고, 안톤이 헤르시를 만난 후 조금 더 이야기가 진행되었을 때였다.
“자네가 아까 그런 질문을 한 것도 그래서였구먼. 분명 그때 자네가 없었으면, 자네라는 존재는 태어나지도 못했겠어.”
“그렇지. 이는 운명이라는 막연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순이오.”
“자네로서는 그렇게 느낄 만도 하군.”
세로게트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안톤은 이를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다.
세로게트의 말은 틀렸다.
이건 주관적인 추측이 아니다. 근거가 존재한다.
다만 문제는 이를 그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선 안톤이 그간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비밀을 얘기해야 하며, 동시에 확실한 증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고민이 깊어지며 안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이걸 말해 줘야 하나…….’
회귀.
안톤은 전생에 노예로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 안톤은 지금처럼 강하지도 않았고, 천검술을 익히지도 않았다.
그럼 그때 안톤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던 걸까?
“세로게트. 해 줄 말이 있소.”
결정을 내린 안톤이 굳은 얼굴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누구에게도 해 준 적 없던 먼 옛날, 아니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의 이야기를.
* * *
“……놀라운 이야기군.”
전생에 관련된 이야기를 끝마치고, 세로게트는 그저 이렇게 읊조릴 뿐이었다. 솔직히 조금 의외의 반응이었다.
“내 얘기를 믿는 것이오?”
혹시 이 회귀 현상에 대한 원인이나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 건 아닌가 했으나,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세로게트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내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오래 살다 보니 이 세계에는 믿기 힘든 일들이 가득한단 걸 깨달을 수밖에 없더군. 자네가 보기에 내 나이가 얼마나 될 것 같나?”
느닷없는 질문에 안톤이 머뭇거리다가 대충 추측해서 대답을 내놓았다.
“혼요종은 원래 수명이 길다고 들었소. 근데 왠지 당신은 그보다도 훨씬 길 것 같구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1만 년쯤 된다네.”
“1만 년이라니……. 정말로 그 긴 시간을 살아온 것이오?”
“그럴 리가. 물론 거짓말이지.”
세로게트가 농을 던질 것이란 예상을 못 했기에 안톤은 잠시 벙찐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놀란 감정을 미처 잠재울 시간도 없이, 세로게트는 보다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제 그 절반은 넘었을 걸세.”
뭐가 농담이고 뭐가 사실인지 알 수가 없어 갈팡질팡하는 안톤을 바라보며 세로게트가 씨익 미소 지었다.
“어때? 자네는 믿겠는가?”
적어도 5,000살은 넘게 나이를 먹었다는 얘기지만, 어째선지 이번엔 거짓말처럼 들리지가 않는다.
결국 말없이 그를 노려보던 안톤이 수긍했다.
“……믿겠소.”
“믿어 줘서 고맙네. 아무튼 간에 말이지……. 이런 노괴물도 세상에 존재하는데, 시간 여행자라고 없을 리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짚이는 것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짚이는 거라니?”
“아까 자네가 말했던 모순. 그걸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생각나서 말이네. 물론 자네의 뒷이야기를 더 들어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말이야. 그럼 그쪽에서 있었던 뒷얘기를 더 해 주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절대 방해하지 않고 듣도록 하겠네.”
“그러리다.”
안톤은 도중에 끊겼던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부모를 노리는 적들과 싸우고, 또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것까지. 얘기가 너무 길어지는 듯해 축약해서 말해 주었다.
세로게트는 적들의 정체가 블라디미르였다는 걸 듣고는 표정이 변했다. 어느 누가 봐도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앞서 한 말을 지킬 생각인지 꿋꿋이 침묵을 지켜 내고 있었다.
그러나 헤르시가 무사히 출산을 끝내고, 딱히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어떠한 공간 속에서 만난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땐 그로서도 참기 어려웠는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기록자! 아니 설마 그분을 만났단 말인가?”
“모습도 보지 못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눴을 뿐이지만…… 일단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근데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오?”
“물론이네! 아 참! 이럴 게 아니지. 그래서 그분과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
안톤은 가감 없이 솔직하게 그때 있었던 대화 내용을 말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율법이니 집행자니, 기록자가 했던 이상한 말들도 알려 줄 수밖에 없었는데, 세로게트는 그 단어들을 듣고 짐작 가는 게 있다는 듯한 눈치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치 자신의 예측이 맞았다는 것처럼.
“율법이라……. 역시 자네가 집행자였군.”
그의 눈빛이 달라짐과 동시에, 안톤의 눈빛 역시 변했다.
드디어 속에 지니고 있던 의문들을 풀어 줄 사람을 만난 것이다.
세로게트는 설명을 하기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먼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