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34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34화
134. 격돌
따라오라던 카트락시아는 장장 여섯 시간 동안을 내리 달렸다.
안톤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그녀 또한 초인의 영역에 오른 괴물이긴 마찬가지.
그가 있던 곳으로부터 만 하루 거리였던 수도를 멀찍이 우회해 지나친 것도 오래전이었고, 지금 그들은 제국의 외곽부까지 도달해 있었다.
“설마 국경을 넘을 생각인가?”
슬슬 정면으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경관을 보며, 안톤이 중얼거렸다. 그도 직접 실물은 본 적 없었지만, 그 모습이나 형태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록티아의 성벽.
그랜드 게이트.
그것을 실제로 눈에 담게 되자, 안톤은 예전에 클린턴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록티아의 성벽을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지. 기회가 되면 한 번 가 보게.’
클린턴의 말엔 살짝 어폐가 있었다.
이건 성벽이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어찌 인간이 쌓아 올린 성벽 따위가 이 천혜의 벽에 비할 수 있단 말인가.
안톤은 구름 위로 치솟아 끝이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심하게 눈에 담았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언젠가 멀리서 봤던 화산과도 비슷한 형태이지만, 경사가 압도적으로 직각에 이르며 그 넓이 또한 비할 바가 아니었다.
딱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안톤은 아인종들의 국가인 록티아가 강국들 사이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를 곧바로 깨달을 수 있달까.
“이제 거의 다 도착했으니 보채지 말라고!”
주변을 가득 메운 물소리에 묻히지 않게, 카트락시아가 거의 외치듯이 대답했다.
솨아아아아-.
장벽의 중간 지점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쉴 새 없이 우렁찬 소리를 내고 있었다.
멀리서 보고 있으면 마치 강물이 지상으로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거대한 폭포.
그것이 지면에 맞닿으며 생긴 안개 속을 헤치고 들어가니, 머지않아 가려져 있던 호수가 나타났다.
“자, 타라.”
그녀가 가리킨 나룻배를 보며 안톤이 허탈한 웃음을 내지었다.
“정말 단단히도 준비한 모양이군.”
“그래서 안 탈 거냐?”
안톤이 배에 올라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카트락시아가 망설임 없이 나룻배와 지상을 연결하던 줄을 끊었다.
점점 심해지는 안개로 인해 한 치 앞을 분간하기도 어려웠고, 호수란 말이 무색하게 물살 또한 굉장히 거셌지만 무언가가 이끄는 듯 나룻배는 앞을 향해 전진했다.
안톤은 감각들을 일깨워 주변을 탐색했다.
적들이 도처에 깔린 사지 한복판에 몸을 들이밀었으니 이제부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자만이란 언제나 죽음이랑 가까운 단어란 걸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섬인가. 장소 한번 잘 골랐군.’
안톤이 블라디미르의 세심한 준비에 감탄했다.
그가 생각해도 이 장소는 자신을 상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일단은 안개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고, 폭포 때문에 소리까지 먹통이니 기공을 사용치 못하는 안톤에게는 나름 제약이 되는 것이다.
뭐, 사실 그렇게까지 영향을 주는 큰 제약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분명 준비한 게 이것만은 아닐 테지.’
안톤은 신안을 열어 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여러 기운들을 판별했다. 카린을 찾기 위해서였다.
살펴보니 섬에는 딱 일곱 명의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결같이 심상치 않은 요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톤은 그 나머지 한 명에게로 집중했다.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유일한 일반인은 아마 카린일 가능성이 높았다.
‘카린을 구하는 게 가장 우선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그 선결과제를 해내지 못한다면 내내 그들에게 주도권을 내준 채 끌려다니고 말 거란 건 안 봐도 눈에 훤하다.
안톤이 슬그머니 카트락시아를 보았다.
그녀는 그가 뭔 짓을 벌일까 싶어 그를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미 도착한 마당에 생각대로 움직여 줄 필요는 없겠지.’
섬과 배의 거리가 슬슬 거리가 적당해졌단 판단이 서자, 안톤은 신속하게 나룻배를 박차며 뛰어올랐다.
예고되지 않은 움직임에 나룻배가 덜컥하며 뒤집혔고, 그로 이해 카트락시아가 홀라당 물에 빠졌다.
탓.
섬에 착지한 순간.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든 짙은 안개가 펼쳐진다. 이 섬을 중심으로만 유독 안개가 짙은 느낌이었다.
허나 앞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안톤에겐 신안이 있었다.
단숨에 섬에 착지한 안톤은 카린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는 방향으로 재빠르게 이동한 후, 그 옆을 지키는 적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휘이잇.
한순간이지만 풍압에 의해 안개에 틈새가 벌어졌고, 그 사이로 시야가 확보됐다. 그리고 안톤은 그만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카린이…… 없다……?’
그런 안톤을 보며, 안개 틈으로 모습을 보인 아르토르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연다.
“라트로이안 님,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의 옆에 있던 노인이 고갤 끄덕이더니,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쳤다.
쿠우웅!
누군가 북이라도 세게 친 것처럼 큰 소리가 울렸고, 섬 중심부에서부터 돌풍이 피어났다.
안에서 밖으로 뻗어 나가는 세찬 바람에 앞을 가리던 안개가 순식간에 거둬졌다.
안톤은 빠르게 모든 인물들의 얼굴을 훑었다.
바위로만 이루어진 이 섬에는 처음에 확인한 대로 일곱 명의 인물만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중에 카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푸! 이 개자식이!”
“다행히 카트락시아 님도 무사하셨군요.”
노발대발하는 그녀를 보며 아르토르가 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던진다. 아무튼 이제 막 물 위로 올라온 카트락시아까지 총 여덟 명의 인물들.
그중 안톤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딱 세 명뿐이었다.
츠레이바 사막에서 만났던 쟈카론과, 과거 세계에서 만났던 아르토르, 그리고 카트락시아다.
다른 다섯은 그로서도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안톤은 그들의 정체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세로게트에게 미리 들어 놔서 대략적인 정보는 그 역시 갖고 있던 덕이다.
‘저 늙은이가 라트로이안. 복면 사내는 로푸스. 쟈카론과 비슷한 인상의 사내는 가르톤. 그리고 저 키 작은 남자는 호룸이겠군.’
그리고 만약 그 가정이 맞다면, 블라디미르의 수뇌부가 거의 전부 한자리에 모인 격이다.
미궁에서 안톤이 해치운 키리옌을 빼면, 수뇌부 아홉 중 일곱이 이곳에 왔다는 소리니까.
‘설마 파서스는 죽은 건가?’
아무래도 살아 있을 것 같다는 예상은 빗나갔는지, 파서스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래도 혹시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
안톤의 시선이 마지막 한 인물을 향해 움직였다. 카린으로 착각했던 유일한 일반인이었다.
‘저 남자는…… 그저 날 위한 미끼였나.’
손과 입이 바짝 묶인 채로 벌벌 떠는 한 사내를 향해 안톤이 시선을 보내자, 쟈카론이 씨익 웃으며 어디론가 도끼를 휘두른다.
스읏.
마치 안톤을 놀리기라도 하듯 줄에 묶여 있던 사내의 목이 단숨에 동강 났다.
미끼였다는 추측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처음부터 속였던 건가.”
안톤의 중얼거림에 아르토르가 한 걸음 다가오며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레이왈츠 양에 관한 이야기라면 속인 건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귀한 분을 당신이 빤히 찾을 수 있도록 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전투에 한정해선, 안톤은 계획도 없이 무작정 움직이는 멍청이가 아니다.
카트락시아를 따라오며 그는 무수한 변수들을 떠올렸고, 머릿속으로 가정을 해 보았다.
그중에는 이런 상황도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거래를 하자.”
“거래…… 말인가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내짓는 아르토르를 보며, 안톤이 더욱 강하게 나갔다.
“정정하지. 거래가 아니라 협박이다.”
믿는 구석 하나 없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비록 카린이라는 패가 그들에게 넘어갔지만, 안톤에겐 그들을 상대할 패가 하나 남아 있었다.
“지금 당장 카린을 데려오지 않는다면 이 성물을 박살 내 버리겠다.”
안톤이 품에서 왕관을 꺼내 든 다음, 언제라도 우그러트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한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이게 없으면 다른 열쇠들을 아무리 모아도 무용지물일 테지?”
“……그것은 인력으로 망가트리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 부리지 마시지요.”
안톤은 대답 대신 손에 힘을 가했다.
그러자 왕관의 끄트머리가 살짝 휘어졌다.
“표정을 보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제 마음에 따라 당장에라도 그녀가 죽을 수 있단 걸 잊은 것 같군요.”
아르토르가 약점을 물고 늘어지자, 안톤은 초강수로 이에 대응했다.
“마음대로 해라. 난 머저리가 아니다. 어차피 네놈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 그녀 또한 죽은 목숨이란 걸 알고 있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아르토르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당신이란 상대는 쉽게 가는 법이 없군요. 좋습니다. 당신 말대로 하지요. 어차피 당신이 이곳에 온 이상 그녀는 쓸모를 다했으니까.”
아르토르가 허리춤에 매고 있던 호리병의 따개를 열자, 그 속에서 카린이 튀어나왔다.
“안톤!”
카린이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고, 쟈카론이 그녀의 입을 거칠게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르토르가 눈을 빛내며 안톤에게 말했다.
“그럼 트릭 씰을 던져 주시겠습니까?”
이제 안톤도 알 수가 있었다.
자신이 먼저 내건 거래조차도, 사실 그의 노림수 중 하나였다는 것을.
“결국 이것까지 예상해서 그녀를 납치했던 거냐.”
“당신이 갖고 있는 물품들에 대해선 잘 알고 있으니까요.”
원래 안톤은 성물을 이용해 카린을 구한 후, 트릭 씰과 팔찌를 연계해서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미 그 생각은 상대에게 간파당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안톤에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도가 남지 않았다.
“좋다. 대신 성물은 그녀가 이곳을 떠난 후에 주겠다.”
아르토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톤이 트릭 씰을 던졌다. 공중에 뜬 트릭 씰은 옆에서 누군가 간섭한 것인지 천천히 낙하하며 카린의 손에 정확히 올려졌다.
트릭 씰을 손에 쥐게 된 카린이었지만,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얼굴로 안톤을 바라보았다.
“내 걱정은 마시오. 금방 갈 테니까.”
그 말에 나름 안심이 되는지 카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안톤은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전음으로 시동어를 알려 주었고, 그녀가 안톤을 지그시 눈에 담으며 시동어를 읊조렸다.
“……바람으로 통하는 문.”
쉬잉!
섬광이 한 번 번쩍한 후, 카린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안톤은 앞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왕관을 그에게 던졌다. 어차피 카린이 떠나간 지금, 안면 몰수하고 약속을 어겨도 괜찮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안톤의 방식과는 많이 어긋나 있었다.
‘물러날 생각은 없다.’
안톤은 검병을 쥔 손을 꽉 오므렸다.
트릭 씰을 카린에게 줬기에 도주로는 막혔다. 이제 격전의 순간을 피할 수 없다.
그런 지금.
후일을 기약하겠다는 나약한 타협은, 오히려 방해만 된다.
‘반드시 이긴다.’
안톤이 그들에게 검을 겨누었다.
전에는 혼자서 감당하기도 벅찼던 자들이 일곱이나 되었지만, 어째선지 그리 불안하진 않았다.
금방 우르르 무너질 허망한 자신감은 아니었다.
안톤은 견고히 쌓아 올린 그동안의 노력을 믿었다.
이번 생에 있어 강해지기 위해 얼마만큼 쉬지 않고 달려왔던가.
이만큼 강해지기 위해 얼마만큼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던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그들에 대한 실례였다.
안톤이 목 뒤의 혈도를 짚었다.
그러자 전신의 피가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하며 감각들이 보다 선명하게 깨어난다.
칸타타의 마법 각인술의 효능 덕택일까.
전에 파서스를 상대할 때와 달리, 작은 구토감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저 살짝 뜨듯할 정도로 달아오른 피가 전신을 맴돌며 끊임없는 활력을 불어 넣고 있었다.
‘부작용에 대해선 아예 신경 꺼도 되겠군.’
그 어느 때보다도 최상의 몸 상태.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와라!”
안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