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25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25화
125. 평가
“이거 카린에게 미안하게 됐군.”
엘릭서가 든 상자를 가방에 잘 정리한 후, 안톤은 칸타타의 마법상에서 나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궁에서의 일만 끝내면 금방 제국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정이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칸타타가 그에게 엘릭서를 주는 대가로 내건 조건 때문이었다.
안톤은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네가 할 일은 간단하네. 내가 말해 주는 한 사람을 옆에서 지켜 주면서, 또 필요하면 물심양면 도와주게.”
“언제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걸세. 그저 그 아이가 펭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면 충분하네. 그리고 어차피 자네도 제국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허허! 이거야 자네 입장에선 완전 겸사겸사 누워서 떡 먹는 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구만!”
은근슬쩍 손해 보는 척 연기하던 칸타타였지만, 안톤은 그의 말에 속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계산은 정확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던 칸타타가 한 제안 아닌가. 결코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이란 건 불 보듯 뻔했다.
엘릭서라는 큰 대가를 치른 만큼, 위험 또한 반드시 함께할 것이다.
허나 안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제안을 승낙했다.
온-누르를 위해선 엘릭서가 필요했고, 엘릭서란 돈만 있다고 아무렇게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별 탈 없이 금방 끝나길 바라는 수밖에.’
이내 거리로 나온 안톤은 칸타타가 알려 준 대로 먼저 상업지구로 향한 뒤 그곳에서 녹스 상단의 지점을 찾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크군.’
마차가 수십 대 넘게 정렬된 후원을 지닌, 4층짜리 으리으리한 건물.
그 건물 주변으로는 건장한 사내들이 북적거렸는데, 사람들은 제각기 짐을 나르거나, 그게 아니라도 요란스럽게 움직여 대고 있어서 그런지 마치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에 구릿빛 피부의 사내가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물었다.
“누구시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재커스 레이튼이라는 사람을 찾고 있소.”
“3단주라면 안에 있을 것이오. 따라오시오.”
그 인부의 도움으로 안톤은 찾던 사람을 손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안톤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고, 그것은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 같더니…….’
사무실에서 행정 일을 하고 있던 사내는 안톤을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곧장 안톤에게로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어! 자네는 안톤 아닌가? 아주 오랜만이군. 이런 데서 보게 될 줄이야.”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재커스.”
재커스 레이튼.
그는 안톤이 막 자유의 몸이 된 후, 해린을 떠나 레노테이르로 향할 때 신세를 졌던 배의 선장이었다. 항해하는 동안 내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던 며칠 사이의 기억은 안톤의 머릿속에 아주 좋은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하는 일은 잘 풀렸고? 아, 설마 그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찾아온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약간 곤란한데…….”
헤어지기 전, 재커스는 안톤에게 갈 곳이 없어진다면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었다. 진심이 살짝 담긴 형식상의 말이긴 했지만 아무튼.
“근데 곤란하다니? 딱히 의탁을 하겠다고 당신을 찾은 건 아니지만……. 그간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뒷얘기가 약간 꺼려지는지 말꼬리를 흐리던 재커스가 애써 쾌활한 표정을 지어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내가 이끌던 상단이 망했네. 뭐, 별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지. 모르긴 몰라도 근래의 레노테이르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인 상인들이 수두룩할 테니까.”
“그런 일이 있었군. 유감이오.”
대륙 남부 지역에서 키릴스호를 타고 직접 무역을 하던 그가, 왜 생뚱맞게 이곳에서 3단주란 직위로 불리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네. 그래도 난 괜찮은 편이니까. 이렇게 큰 상단에 새로이 취직도 했지 않은가. 하하! 근데 그나저나 그런 이유인 것도 아니라면 어째서 날 찾아온 건가?”
“사실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았소.”
안톤은 칸타타와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경청하는 자세로 안톤의 이야기를 듣던 재커스는, 얘기가 모두 끝나고도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과연……. 아버지가 그런 부탁을 했었군.”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의 말에 안톤이 또다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재커스와 칸타타가 혈연관계라는 소리였다.
“아버지라니? 당신과 그는 성도 다르지 않소?”
“아, 나는 어머니의 성을 쓰고 있네. 아버지와는 얼마 전에 우연히 이곳에서 만났지. 사실 아버지라는 말 자체도 익숙하지가 않군. 워낙에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사람인지라…….”
왠지 복잡한 가정사가 끼어 있는 모양이었기에 안톤도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와 거래를 했고, 따라서 앞으로 당신이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 지켜 주고 도울 생각이오. 만약 뭔가 꺼려진다면 미리 말해 주시오.”
“왜 자네를 내게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그랬다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굉장히 신비한 사람이니까. 그럼 그때까지 잘 부탁하네. 솔직히 개인 호위가 생긴 것보단 말동무가 생긴 게 더욱 기쁘다마는…….”
“잘 부탁하겠소.”
재커스가 소속되어 있는 녹스 상단이 제국으로 출발하는 것은 내일 아침.
이제 막 정오가 지났으니 상당한 시간이 남은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맘 편히 쉴 틈은 없었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상행에 함께하려면 먼저 상단장님께 직접 보고를 올려야 하네. 바로 함께 가지.”
바쁜 업무도 내려놓고, 재커스는 안톤을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곳은 4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하나뿐인 방으로, 닫혀 있는 문짝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부의 호화로움이 엿보이는 사무실이었다.
재커스가 묵빛의 광채가 나는 문을 조심스레 두들겼다.
똑똑.
“누군가?”
상단장이라길래 꽤나 연륜이 있을 거란 짐작과는 달리, 다소 가벼운 느낌의 앳된 음성이 문 너머로 새어 나온다.
재커스는 그가 보이는 것도 아닌데 닫힌 문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3단주 재커스 레이튼입니다.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럼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조금 기다리게.”
“예.”
안톤과 재커스는 문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안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시간이 무척이나 길었다.
문득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건지 궁금해진 안톤이 청각을 키웠다.
“하하!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라보튼 경은 정말 늘 나를 재밌게 해 주는군!”
“애런 님께서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중요한 얘기라더니, 안에서는 별 시답잖은 수다나 떨고 있었다.
재커스가 녹스 상단의 단장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예였다.
안톤은 굳이 엿들은 이야기를 그에게 말해 주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그들의 수다는 한동안 더 계속됐고, 이제야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기다리지 않고 바로 성문을 나갈 수 있게 부탁 좀 하겠네.”
“예. 물론입지요.”
동시에 무언가가 묵직하게 짤랑 소리를 낸다.
안톤은 그것이 오가는 돈주머니가 내는 소리란 걸 쉽사리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쉬시지요.”
“하하. 조심히 가게나.”
철컥.
문이 열리고, 안에서 30대 중반쯤으로 되어 보이는 사내가 걸어 나온다. 그 사내는 밖으로 나가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서더니 안톤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라보튼 경.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이거 참 공교롭군요?”
사내의 대답에 재커스가 안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눈빛에는 저자와 아는 사이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고, 안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기억 속에 이런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까 제가 말했던 뜨내기 모험가 이야기 있지 않습니까? 저자가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그 동패를 받았다던 그자?”
“예. 하하! 아무래도 그때의 제 조언을 따라 직종을 바꾸려는 모양이군요. 아무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사내는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고, 안톤은 잠시 멍해졌다.
이제 보니 저 사내는 미궁 앞에서 검문을 하던 그 경비였다. 게다가 말을 들어 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모양이다.
순간 열이 확 뻗쳤으나, 아쉽게도 이미 때를 놓쳐 버린 뒤였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재커스가 몸을 담고 있는 이곳에서 그 마음대로 난리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톤은 순순히 재커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 뒤 책상 앞에 기립해 섰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오만한 시선이 쏟아졌다.
“무슨 일로 3단주께서 나를 찾았는지 말하기 전에, 우선 그 옆의 친구부터 소개해 주겠나?”
상단장 애런은 아주 흥미로운 시선으로 안톤을 바라보았고, 재커스가 안톤의 소개를 해 주었다.
“여기 이 친구의 이름은 안톤으로, 제 개인 호위로 고용해 이번 상행에 함께하려 합니다. 원래라면 이렇게 직접 찾아와 귀찮게 해 드릴 사안까지는 아닙니다만, 일단은 외부인이기에 상단장님께 먼저 허락을 맡으려고 왔습니다.”
애런이 책상에 두 팔을 올리고는 심드렁하게 턱을 짚었다.
“흐음. 그렇군. 근데 잡일꾼이면 모를까 호위라니, 제법 허우대는 멀쩡해 보인다마는……. 자네도 들었지 않은가. 똥패라고, 똥패! 푸하하핫!”
똥패라는 표현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폭소하는 애런을 보며 재커스가 모멸감에 주먹을 바득 쥐었다.
안톤은 그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나는 괜찮으니 화내지 마시오.
그런 안톤의 위로가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악물고 있던 턱에 힘을 빼고 재커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래 봬도 이자는 조르디가의 검객입니다. 동패를 받은 건, 뭔가 길드에서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안톤에게 사정을 미리 들은 것도 아닌데, 재커스의 눈은 어느덧 확신으로 가득 찬다. 불현듯 안톤은 어쩌면 이런 눈빛이야말로 상인의 자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상대가 나빴다.
“조르디가? 나는 그런 가문의 이름은 모르는데? 그리고 검객이라면서 검도 들고 다니지도 않는데?”
차라리 바위에게 말을 걸었다면 조금 더 나은 반응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어조에는 빈정거림이 가득했다.
“그건…….”
재커스가 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 입을 열던 차, 애런이 대뜸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자네가 무슨 저치의 변호인이라도 되나? 됐고, 자네가 직접 말해 보게.”
“조르디가에선 나왔지만, 한때 그곳에 몸담았던 적이 있소. 그리고 검은 수리 중이라 수중에 없소.”
안톤의 무지막지한 외형의 대검이 있었다면 조금 다른 반응이 나왔을까. 안톤은 인챈트를 위해 칸타타에게 검을 맡긴 사실이 갑자기 안타깝게 느껴졌다.
“음. 그럴듯한 변명이군. 그럼 어디 사실인지 알아볼까? 가로스, 저자를 확인해 보게.”
애런의 뒤쪽 편에 기립해 있던 우락부락한 사내가 매서운 시선을 안톤에게 쏘아 내더니,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저자의 체내에는 한 줌의 마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몸은 제법 괜찮은 편이니, 짐꾼으로는 쓸 만하겠군요.”
사내의 냉정한 평가에 애런이 어깨를 으쓱했다.
“들었나? 그렇다는군.”
“물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지만, 이자의 고용비는 제 사비로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뭐, 자네도 명색만큼은 단주가 아닌가. 그런 단주의 요청인데 우리 상단의 돈으로 해결해 줘야지.”
“아. 감사합니다!”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크게 내젓던 애런이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호위로는 쓸 수 없을 것 같네. 가로스가 말했던 것처럼 잡일꾼이라면 모를까.”
“…….”
처음부터 농락할 셈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재커스의 몸이 바위처럼 굳었다. 그의 얼굴은 빨갛게 변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만들어져 있었으나, 안톤은 그가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안톤이 그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그러겠소. 하면 될 거 아니오. 그 짐꾼이란 거.”
짐꾼이라도 마다치 않겠다는 안톤의 대답에 애런이 재밌다는 표정을 짓는다. 안톤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마주 보았다.
“호오. 눈빛 하나는 좋군. 일은 잘하겠어. 그럼 얘기는 이제 끝났으니 나가 보게나.”
애런이 이제 귀찮아졌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고, 안톤은 재커스를 데리고 방에서 나왔다.
이후 분한지 말 한 마디 꺼내지 않던 재커스는, 사무실로 돌아오고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안톤을 향한 사과의 말이었다.
“미안하오.”
“미안할 것 없소. 이런 졸렬한 자들이야 익숙하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그래도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군.”
사실 재커스가 지금 하고 있을 생각처럼, 안톤이 무덤덤한 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혹여 노예였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에서야 저런 자들이 까불어 대는 것 정도는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오리다.”
“그러시오.”
안 그래도 안톤의 앞에서 잔뜩 체면을 구긴 직후다. 재커스에게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한 안톤은 서둘러 방을 나가려 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문 앞에 막 섰을 때. 재커스가 그를 붙잡았다.
“아, 잠깐.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봐도 괜찮겠소?”
뒤돌아보며 안톤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커스가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질문을 날렸다.
“아, 그…… 정말 실력이 있는 건 맞소? 아차차, 괜히 노파심에 쓸데없는 걸 물었군. 못 들은 걸로 해 주시오. 아버지가 보낸 이상 당신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닐 테지. 당신도 바쁠 테니 어서 가 보시오. 내일 뵙겠소.”
횡설수설하는 재커스를 보며 안톤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이런 질문을 하는 걸 보면 그의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다.
안톤은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금방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을 거요.”
칸타타가 일을 맡긴 이상, 틀림없이 뭔가 벌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