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2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22화
122. 복귀
스윽.
안톤이 파서스의 가슴을 깊숙이 관통한 검을 뽑아냈다.
육체가 미처 부상을 인지하지도 못한 것일까. 마치 나무판자를 관통한 것처럼, 그의 몸에 난 검 자국에서는 피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심장은 비껴갔나.’
그 와중에도 치명적인 급소만큼은 피해 낸 파서스의 움직임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안톤은 이 대결을 끝내기 위해 다시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안 돼!”
키리옌의 비명과 함께 미궁의 천장에 마법진이 그려진다.
평범한 육망성이 아니라, 마치 사람의 눈을 그린 듯한 붉은 빛깔의 마법진.
그 눈동자 부분에서 빛줄기가 직선으로 뿜어졌다. 다름 아니라 안톤이 있는 곳을 향해서.
솨아아아앙!
안톤은 움직이던 팔을 회수한 뒤, 곧장 뒤로 굴러 이를 피해 냈다.
치이이.
원래 그가 있던 자리에는 사과 정도 크기의 작은 구멍이 생겼고, 그 주위에서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그만둬! 다 함께 죽을 작정이냐!”
파서스의 외침에 안톤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위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뭐야, 저건…….”
마찬가지로 고개를 들었던 케이혼이 중얼거렸다.
하늘이 있던 59층과 다르게, 현재 그들이 있는 40층은 천장이 있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닿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높았다.
그리고 그런 천장에 새겨진 마법진이 검은색 불꽃을 뿜어낸다.
검은색의 불꽃은 아까 전 소녀가 쏘아 냈던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달랐다.
크기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얼추 60m는 족히 넘어 보이는 지름의 불꽃.
사실 이쯤 되면 거의 운석 수준의 크기다.
저 높이에서, 굉장한 힘을 머금은 화염구가 지상에 닿는다면 일어날 일들은 눈에 보듯 빤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톤은 곧장 키리옌을 향해 달려들었다.
반응을 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럴 생각부터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안톤을 보고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푸슉.
안톤의 무지막지한 대검이 가녀린 복부를 꿰뚫고 지나갔다.
키리옌은 검에 매달려 공중으로 발이 뜬 채 웃음을 내지었다.
“날 죽여 봤자 소용없어.”
“키리옌!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냐!”
“당신은 여전히 눈치가 없네. 아까 모두 죽을 생각이냐고 물었지? 답은 그렇지 않다야. 오늘 이 자리에선 단 한 명만이 죽을 거야.”
“……?”
“바로 나.”
키리옌이 양손을 펼쳤다. 그녀의 손바닥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역설적이지만, 눈부시게 찬란한 암흑이었다.
“베놀라여!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키리옌이 악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순간, 암흑의 불꽃이 지상을 뒤덮기 위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안톤은 키리옌의 몸에서 검을 뽑아낸 후, 상황 판단을 시작했다.
그 짧은 사이에 그녀가 무슨 짓을 한 건진 알 수 없지만, 두 발이 바위라도 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피할 수는 없다는 건데…….’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생사대적을 눈앞에 둔 것처럼, 안톤이 결사적인 태도로 하늘을 향해서 검을 겨누었다.
백결검을 쓰기 위해 혈도를 짚었던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런 집중력으로는 저 구체의 점은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선은 보인다.
‘벤다.’
안톤의 검이 곡선을 그리며 위를 향해 휘둘러졌다.
솨아아아아!
검이 지나간 길을 따라 공기 중에 파문이 일어난다.
육안으로 확인이 될 정도로 선명한 궤적을 따라 케이혼이 고개를 움직였다.
‘이게 과연 인간이란 말인가.’
정확히 반으로 양단된 불꽃을 보며 넋을 놓는 것도 잠깐.
케이혼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비록 저 불꽃이 두 조각으로 분리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힘을 잃고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고, 남은 한 조각이 이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케이혼은 다급하게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상대가 악신을 통해 기적을 이루었다면, 그 역시 그래야만 할 때였다.
“아넨이시여!”
그에게서 피어난 흰색 빛무리가 반투명한 막이 되어 안톤과 케이혼의 몸을 감쌌고, 그와 동시에 지옥의 불길이 지상을 뒤덮었다.
* * *
‘여긴 어디지?’
눈을 떴음에도 앞은 깜깜했다.
차갑고 울퉁불퉁한 바닥의 촉감이 등으로 전해졌다.
안톤은 뻐근한 몸을 일으켜 세우던 중 단단한 무언가에 머리를 찧었다.
“읏.”
아무래도 이곳은 굉장히 좁은 공간인 모양이었다.
안톤은 섣불리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일단 몸 상태를 점검했다.
다행히 물리적인 부상 같은 것은 없었다.
몸 구석구석이 뻐근하다는 것을 제하면 거의 평상시나 다름없는 상태.
‘그런데도 정신을 잃은 건 백결검의 부작용인가…….’
그래도 칸타타에게 돌아가 각인술을 받으면 괜찮아질 것이다.
신체가 더 단단해진다면, 혈도를 짚는 부작용도 훨씬 덜해질 테니까.
아무튼 몸 상태의 점검을 끝마친 안톤은 기억을 되돌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화염구를 양단하던 것까지는 제대로 기억이 났지만, 그 뒤로는 왠지 흐릿했다.
차분히 기억을 되짚어 보니 서서히 기억이 났다.
양단된 불꽃이 닿기 전에, 어떠한 보호막이 펼쳐져 자신의 몸을 감쌌다. 아마 그게 아니었다면 죽었거나, 그게 아니라도 이렇게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에게 빚을 졌군.’
그 보호막을 펼친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그 자리에 케이혼밖에 없었으니까.
‘잘 있을지 모르겠군.’
케이혼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던 중, 문득 안톤의 머릿속에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스쳤다.
‘당신은 살아.’
불꽃이 지상을 뒤덮기 직전.
복부에 커다란 검상을 입고도 겨우겨우 파서스에게 다가간 키리옌은 마지막으로 생명을 태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벌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마지막 유언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를 살리기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또한 살아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군.’
의도치 않은 한숨이 속에서 흘러나왔다.
왠지 모르게 파서스가 했던 말들이 떠올라 선과 악의 경계가 뒤틀리고 있었다.
‘이래선 마치 내가 악역인 것 같지 않나.’
상념을 떨쳐 내기 위해 안톤이 고개를 저었다.
이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 눈을 뜬 안톤은 세세하게 주변을 살폈다.
이제 회상은 끝났으니 다시 현 상황에 집중할 때였다.
‘무슨 잔해 속에 갇힌 모양인데, 어서 나가야겠어.’
안톤은 등을 바닥에 맞닿게 한 채로, 양팔에 힘을 꾹 담아 천장을 밀었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깊이 파묻힌 것은 아닌지 조금 들썩인다.
“후우…….”
크게 숨을 들이켠 안톤이 힘을 한 군데 끌어모았다. 상당한 무게였던 터라 단번에 밀어 던질 수는 없었으나, 어느 정도 공간은 생겼다.
안톤은 그 짧은 틈에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기둥 역할을 하며 그 무게를 버텨 냈다.
부르르르르.
천장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잔해물들이 엇물리며 틈새로 돌가루들을 쏟아 낸다. 안 그래도 쾨쾨한 공기에 먼지까지 잔뜩 묻으니 숨 쉬는 게 꽤나 고역스럽다.
‘어서 시원한 공기를 맡고 싶군.’
기립한 자세를 취한 이상 힘을 주는 일은 이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다시 한 번 전력을 다해 천장을 밀어내니 쑥 들렸다.
“흐앗!”
콰아앙!
바깥의 잔해물들이 나가떨어졌고, 안톤은 얼른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들고 바깥으로 도약했다.
“마치 지옥 같군.”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안톤은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그의 주위로 반경 1km는 그야말로 폐허라는 말이 절로 어울리는 광경으로 변해 있었다.
모든 것이 박살 나고 파괴되어 있었으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코로 맡아지는 미적지근하게 달아오른 매캐한 공기.
산불처럼 화르륵 불길이 치솟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방이 바위뿐인 곳에서도 곳곳에 퍼진 불길은 끈질기게 불씨를 이어 가고 있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던 것 같군.’
케이혼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던 안톤은, 주변에 널리고 널린 잔해를 보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이 근방 깊숙한 곳에, 케이혼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갇혀 있을 터였다.
‘정말 운이 없었으면 죽었을 수도 있겠는데…….’
부디 살아 있기를 바라며 안톤은 잔해물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막막한 일이었지만, 그저 모른 척할 생각은 없었다.
빚을 진 이상 갚아야 한다.
마음의 무게를 무시하는 건 안톤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게다가 어차피 성물 또한 이 아래 파묻혔을 터이니 찾아내야만 한다.
안톤은 주변의 잔해들을 하나씩 들어 멀리 던져 버렸다. 혹여 평범한 인부들이 본다면 자괴감에 괴로워할 만큼 빠른 작업 속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쿨럭. 쿨럭.”
한참이나 아래에서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안톤이 화색을 띠었다. 어딘지만 알면 잔해물을 치우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 안톤……?”
“살아 있어서 다행이오.”
“물 좀 줄 수 있겠나……?”
얼굴을 보자마자 물부터 찾는 걸 보니, 아무래도 꽤나 힘든 시간을 보낸 듯하다.
안톤은 가방에서 물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천천히 마시오. 물도 급하게 마시면 체할 수가 있으니.”
물을 다 마신 케이혼은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후……. 덕분에 살았네. 이틀이나 넘게 갇혀 있었더니 정말 죽는 줄 알았단 말일세.”
그의 넋두리 같은 말에 안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틀이나 지났단 말이오?”
“솔직히 내내 갇혀 있던 탓에 정확하진 않지만…… 그 정도는 됐을 걸세. 갇혀 있던 곳에 바람이 통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어깨를 부르르 떨던 케이혼은 뭔가 생각났는지, 급하게 말을 끊고 새 화제로 넘어갔다.
“근데 그 소년은 아직도 팔찌 속에 있는 겐가? 아마 그곳에선 배가 고프지 않거나 한 것이 아니라면, 그쪽 또한 꽤나 힘들어하고 있을 텐데?”
“아!”
솔직히 잊고 있었던 안톤이 곧장 팔찌에서 델스를 꺼냈다.
“으어어, 저도 물 좀, 물 좀 주세요……!”
물론 케이혼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고생했는지 초췌한 얼굴이었고, 안톤이 물을 주자 벌컥벌컥 들이켰다.
안톤은 아예 가방에서 먹을 것까지 꺼내 그들에게 나눠 주며 재정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성물부터 찾아야 할 것 같소. 지금도 기운을 탐지할 수 있겠소?”
“물론이지. 아, 저쪽 아래에 있군.”
“그럼 둘은 좀 더 쉬고 있으시오.”
안톤은 케이혼이 알려 준 지점으로 가 잔해들을 치웠다. 이제는 뭐, 아래 사람이 깔려 있는 것도 아니기에 거칠 것 없었다.
콰앙! 쾅!
케이혼이 검을 마치 삽처럼 이용하는 안톤의 모습을 신기한 듯 구경했다.
“이런 말은 태어나 해 본 적 없는데, 정말 괴물 같은 친구로군.”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게 둘이 옹기종기 대화를 나누며 쉬고 있을 무렵.
안톤은 마침내 성물을 발견했다.
별다른 장식 없이 철로 만들어진 단순한 형태의 왕관 옆에는, 파서스가 썼던 팔찌도 함께 있었다.
‘이것도 있어서 다행이군.’
팔찌는 비어 있는 손목에 끼고, 왕관은 가방이 아니라 품에 갈무리한 안톤이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왔다.
“후우. 아무래도 지상까지 가는 게 문제네요. 성자님은 혹시 길 좀 아시나요?”
“나도 잘 모르지. 그런 건 아랫사람들이 다 알아서 해 줬으니까.”
안톤이 그 둘의 대화에 껴들었다.
“걱정할 것 없소.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으니.”
“그게 뭔 소린가?”
“다 방법이 있소.”
안톤은 양 손목에 낀 팔찌를 벗어 둘에게 하나씩 던졌다.
“잔말 말고 일단 끼고들 계시오. 이게 당신들을 무사히 집으로 보내 줄 티켓 같은 거니까.”
대충 방법을 설명해 준 안톤은 그 둘을 내버려 두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제대로 마물들을 사냥하기도 전에, 일들이 파바박 벌어지느라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지옥의 모습으로 화한 이곳 근처에는 마물들이라곤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마물들 대신 마석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안톤은 가방에 있는 식량들을 모조리 쏟아 낸 뒤, 그것들을 담을 수 있는 만큼 담았다.
처음 도착했던 59층의 마물이 뱉어 내던 것들보다는 질이 떨어졌지만,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정도면 2만 골드는 되겠지. 부족하면 케이혼에게 돈을 꿔도 괜찮겠고.’
명색이 성자인데 그 정도 돈을 융통할 능력은 있으리라.
쉬고 있던 일행에게 돌아온 안톤은 품에서 트릭 씰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갈 시간이오.”
뭐, 그곳에서 적어도 열두 시간은 뛰어야 라프도니아에 도착하겠지만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