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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21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7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21화

121. 비기

 

 

파서스 라우렌.

 

세로게트는 이 남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무술에 미친 놈.’

 

파서스는 블라디미르 내에서도 별종 취급을 받는 사내였다.

 

보통의 진혈종들과는 다르게,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요력과 고유 능력은 뒷전으로 제쳐 둔 채로 순수한 무술에만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 기행을 일삼은 게 그 이유였다.

 

허나 그건 결코 헛된 노력이나 낭비가 아니었다.

 

 

 

“아마 지금 자네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힘든 상대가 될 확률이 높네.”

 

 

 

안톤은 세로게트의 말을 절절히 이해하게 됐다.

 

천검술이 지닌 한 방 한 방은 강력하지만, 닿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신안으로 암만 결을 찾아낸들 상대가 피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파서스의 고유 능력은 가속.

 

여러 가지로 활용도가 높은 능력이지만, 그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만 그 능력을 사용한다.

 

바로 육체의 가속이다.

 

쉬잇.

 

파서스의 주먹이 안톤의 뺨을 스치고, 뒤늦게 바람이 찢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히 극쾌에 도달한 놀라운 속도였으나, 그가 지닌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치 짐승 같군.’

 

파서스의 무술은 형식이 없었다.

 

그렇다고 수준이 떨어지거나 위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형식이 없었기에 자유로웠고 다채로웠으며,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공격들이 눈으로 좇기도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내린다.

 

안톤은 오로지 반사 신경과 감으로 그의 공격을 피해 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을 아슬아슬한 격전.

 

그 속에서 안톤은 점점 상대의 공격을 피해 내고 막는 것이 편해지고 있었다.

 

공격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거나, 안톤 스스로가 이 전투 속에서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뭐지, 이 기운은?’

 

무언가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돌며, 그의 몸을 보다 신속하게, 보다 활력 넘치게 움직이게끔 돕고 있었다.

 

“져선 안 되오!”

 

어느샌가 정신을 차린 케이혼의 응원이 뒤에서 들려왔다. 잘은 알 수 없지만, 안톤은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을 돕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게 그 유명한 신성 축복의 힘인가…….’

 

아무튼 케이혼의 지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서 튀어나온 순백의 빛무리가 몰아치는 파도처럼 하늘을 휘감았다. 안톤은 파서스가 이를 피하지 못하도록 끈질기게 접근하며 몰아붙였다.

 

“크읏.”

 

이 빛무리는 안톤에겐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는 반면, 파서스에게는 독처럼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빛에 닿은 파서스의 왼쪽 팔의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이렇게 전투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오랜만이군.’

 

안톤은 무의식적으로 케이혼을 살폈다. 그는 다음 신성 마법을 준비하는지,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케이혼만 지킨다면 쉽게 이길 수 있겠어.’

 

그리고 그 사실은 파서스 또한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단 한순간도 안톤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파서스의 시선이 케이혼을 향한다.

 

안톤은 그가 언제 튀어 나가든 대응할 수 있도록 신경을 집중했다. 허나 그는 곧장 달려들지 않고 가만히 멈춘 채 입술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키리옌.”

 

마치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듯한 혼잣말.

 

안톤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누가 케이혼에게 저주를 걸었던 거지?’

 

적어도 안톤은 파서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단 걸 세로게트에게서 듣지 못했다. 그리고 듣기로 성물을 탈취해 간 습격자는 파서스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그의 정체를 모를 땐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지만, 이제는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설마 혼자가 아니었다는 건가?’

 

솨아아-.

 

때마침 케이혼의 기도가 끝나고 다시 한 번 순백의 파도가 하늘을 뒤덮는다. 아까와 달리 파서스는 이를 피하고자 하지 않았다. 외려 파도에 몸을 맡기려는 듯 세차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키리옌! 이런 건 네 전문 분야라고 했으니 믿겠다!”

 

안톤은 본능적으로 케이혼의 앞을 굳건히 가로막았고, 파서스는 무언가 주문을 읊조렸다.

 

“낮 그림자.”

 

그러자 그가 끼고 있던 팔찌에서 주황색 빛이 퍼져 나오며, 10대 초반의 소녀가 그 속에서 튀어나왔다.

 

검은색 드레스에 붉은색 안대로 두 눈을 가린 그 소녀는 곧장 양팔을 활짝 벌리더니, 손바닥에서 바위만 한 크기의 불꽃을 뿜어냈다.

 

불꽃은 마치 지옥의 겁화처럼, 속은 새까맸으며 표면은 살짝 푸르른 빛을 띠고 있었다.

 

콰콰쾅!

 

소녀가 쏘아 낸 수십 개의 불꽃에 의해 넓게 퍼지던 파도에는 구멍이 숭숭 뚫리더니, 이내 공중으로 흩어져 버린다.

 

마치 안개비처럼 퍼지며 지상으로 내려앉는 흰색의 입자들.

 

누군가 봤다면 넋을 잃고 쳐다볼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나, 이 중에선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를 감상할 정신머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상황이 급변했다.

 

원래는 1:1이던 상황이 1:2가 되었다가, 이제는 2:2의 구도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 케이혼이 당해 버린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안톤은 만사를 제쳐 놓고 케이혼을 목표로 일직선으로 쏟아지는 파서스의 일격을 막아 냈다. 그리고 그럼과 동시에 손에서 검을 놓은 후, 파서스의 양 팔목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곧장 상황 파악을 끝낸 케이혼이 두 손에서 빛무리를 뿜어낸다.

 

미리 말을 해 둔 것도 아닌데, 손발이 척척 맞자 안톤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아넨이시여!”

 

“어딜 감히!”

 

콰아아앙!

 

화사한 순백의 광채와 소녀가 뿜어낸 불길이 맞닿으며 공중에서 상쇄된다.

 

그 충격의 여파에 공기가 바르르 떨렸고, 지면이 흔들렸다. 불꽃의 파편이 후두두 쏟아지고 있었다.

 

안톤은 얼른 다시 검을 주워 들어 파편이 케이혼에게 닿지 않도록 모두 쳐 냈다.

 

그리고 그것은 파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한바탕의 공세가 일단락 지어졌고, 서로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노려보던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파서스였다.

 

“그 팔찌……. 왠지 내가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한 거 같군.”

 

“안 그래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소.”

 

아공간에 사람을 숨겨 둔다는 능력이 아니더라도, 아티팩트를 발동시키는 주문어마저 흡사하다. 그리고 그것이 우연일 확률은 극히 미미했다.

 

‘그냥 이 팔찌는 원래 두 개가 한 짝이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

 

뭐, 그건 아무래도 좋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쓸데없는 감정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어딘지, 호흡의 간격은 어떤지, 혈관과 근육은 또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공격해야 가장 효과적인지. 상대가 어떤 식으로 기습을 하면 대응하기가 힘들지.

 

그 모든 변수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톤은 파서스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때.

 

뜬금없이 파서스가 광소했다.

 

“하하! 뭔가 상황이 이상해졌지만, 이것 또한 즐겁군! 헌데 그래도 좀 부족해. 그냥 복잡하게 갈 것 없이 우리 둘이서 끝장을 보지 않겠나?”

 

“좋소. 케이혼, 당신은 나서지 마시오.”

 

안톤의 대답에 케이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안톤이 위기라고 생각하면 그가 나설 수도 있다.

 

허나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듯 파서스가 웃었다.

 

그러고는 팔찌를 벗고 품에서 왕관을 꺼내 안톤과 그 사이 중간 부근에 던졌다.

 

도무지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는지, 안톤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널 두고 도망가지 않겠다는 내 의지다.”

 

“……?”

 

영문을 모르겠단 안톤의 표정에, 그가 허탈한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운명의 사랑을 받는 넌 운명의 잔혹함 역시 모르겠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그를 흑발 소녀가 대뜸 가로막고 나섰다. 그녀는 굉장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잠깐! 이게 무슨 짓이야. 말이 다르잖아?”

 

“도와준 건 고맙다, 키리옌. 하지만 저기 저 아넨의 졸개가 말을 바꾸고 다시 개입하기 전까진 너 또한 나서지 마라.”

 

“……이랬다저랬다, 너무 제멋대로야. 당신은.”

 

“훗. 알고 따라다니던 것 아니었나?”

 

찬웃음을 내짓는 파서스를 보며, 키리옌이 처음으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난 당신이 여기서 죽는 걸 원치 않으니까.”

 

“왜 그런 대답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 저자가 운명의 주인이라서?”

 

“당신도 알잖아……. 우리 둘로는 부족해. 처음에는 당신의 고집을 꺾지 못해 따랐지만, 내 도움을 받은 이상 당신은 내 말을 들어야 돼. 그게 약속이었다고.”

 

“약속을 어기게 된 건 미안하다.”

 

“그 말은……?”

 

순간 화색이 되었던 키리옌의 얼굴은, 파서스의 입이 열리자 다시 어둡게 변했다.

 

“하지만 나는 해야겠다.”

 

“이제 됐어. 마음대로 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기만 할 거니까. 설령 다른 누군가가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파서스가 실웃음을 내지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막상 성자가 싸움에 끼어들면 가장 먼저 반응할 사람이 그녀란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기다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하게 됐군.”

 

“흥미로운 대화였소. 근데 당신이 말하는 운명이 도대체 무엇인지, 혹시 내게 들려줄 수 있겠소?”

 

파서스는 고개를 짧게 흔들며 안톤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리고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앞서 보지 못했던, 굉장히 특이한 자세였다.

 

“구차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다. 덤벼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내게 쏟아부어라! 그래서 날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라!”

 

“이거 마치 내가 악당이라도 된 기분이군.”

 

그나저나 첫 수부터 비장의 절기를 펼칠 요량인 걸까.

 

뒤로 쭉 잡아당긴 파서스의 양 주먹에 지대한 양의 요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안톤 역시 이를 상대할 기술을꺼내야 하는 순간이었다.

 

백결검.

 

이는 세로게트와의 수련 당시, 천검술의 이론을 듣던 중에 개발한 새로운 기술로, 집중력에 따라 신안으로 볼 수 있는 최소 입자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에서 착안됐다.

 

‘약간의 부작용은 있지만…… 저걸 상대하려면 그것밖에는 없겠지.’

 

안톤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 뒤 혈도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본래는 사혈로 취급되는 혈도로, 이것을 누르면 순환되는 혈액이 제지 없이 머리로 향한다.

 

붉다 못해 새빨갛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얼굴이 달아올랐고, 목대와 눈에는 핏발이 굵게 서기 시작한다. 현기증과도 비슷한 약간의 구토감이 잠시 찾아왔다 사라졌다.

 

“읏…….”

 

허나 그 모든 것을 감내할 만큼 달콤한 대가가 존재했다.

 

이내 찾아온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한 정신.

 

족히 수배는 증폭된 집중력으로 안톤은 신안을 개방했다.

 

그러자 평소 신안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높은 밀도의 세상이 한눈에 가득 들어온다.

 

 

 

낙서를 한 것처럼 온갖 선으로 이루어져 있던 세상은, 이제 그의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단순한 선이 아니라 점.

 

그 점은, 결 속에 존재하는 결을 찾는 행위를 백 번가량 반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늘 결이라는 제약 때문에 안톤은 벤다는 것을 고집해야 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찌른다.

 

오로지 단 한 가지의 사념만을 담은 검 주위로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그의 검은 마치 혼자서만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고고했다.

 

이를 바라본 파서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 대결의 승패는 누구의 공격이 먼저 닿느냐로 갈릴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패배는 죽음을 의미한다.

 

간만에 경험하는 생과 사의 갈림길.

 

그 서늘함에 피부가 쭈뼛 서며, 짜릿한 긴장감이 손아귀에 감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검을 들게 된 진정한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안톤은 생각했다.

 

그 누구도 입으로 신호를 내뱉진 않았다.

 

그저 마지막 한 줌의 호흡까지 이 한 번의 일격에 싣기 위해 아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검을, 주먹을 길게 뻗기 위해 어깨를 움직였고, 그것이 누군가가 인지할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그것은 마치 섬광 같았고, 말 그대로 빛이 한 번 번쩍할 사이에 모든 게 끝이 났다.

 

찌이이이이.

 

이윽고 드러난 승패의 행방에 케이혼이 그제야 침을 꿀꺽 삼켰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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