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20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20화
120. 이치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소이다.”
안톤이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처음 그가 케이혼을 살리려 했던 것에 딱히 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아주 작은 호의일 뿐이랄까.
그저 우연히 그가 눈에 띄었고 때마침 안톤의 소지품 중에 포션이 있었을 뿐이다.
물론 살려 놓고 보면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을 거란 작은 기대도 있었지만, 그건 그리 중요치 않았다.
델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안톤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방법은 두 명까지만 가능하며, 세 명이 되면 쓸 수가 없다.
‘여기서라면 금방 목표액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으니, 괜히 시간 낭비할 것 없지.’
“무슨 일인지 듣지도 않고 바로 거절인가? 아아! 그러고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지 않았군? 내 신분을 알면 성녀를 소개시켜 준다는 게 허황된 얘기가 아니란 걸…….”
“성자잖소?”
“아니, 그걸 어떻게?”
심드렁하기 그지없는 안톤의 대꾸에 케이혼이 크게 놀란다.
‘이자의 정체는 뭐지?’
아넨교의 신혈들 사이에서는 드물게 신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가 태어난다. 그리고 그 축복의 아이는 항상 여자였고, 성녀라고 불렸다. 그런데 케이혼이 태어났고, 그는 대륙 최초이자 유일의 성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외적인 비밀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신분을 알아내다니.
안톤을 바라보는 케이혼의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안톤은 별 관심이 없었다.
“됐소. 일없으니 우린 이만 가 보리다.”
안톤이 등을 돌리려 하자, 케이혼이 곧바로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단순히 관용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단어 그대로.
“자, 잠까아안! 제발 내 얘기라도 들어 봐 주게. 대륙의 평화를 위해선 자네의 도움이 꼭 필요하네! 한시가 급한 일이란 말일세!”
이쯤 되면 원래 그런 게 있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성자로서의 체면조차 내던지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그를 보자니 꽤나 난감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할 말을 하지 못할 안톤은 아니었지만.
“대륙의 평화가 아니라 당신들의 이익을 위해서겠지.”
안톤이 무심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비꼬듯 말했다.
애초부터 그는 신을 모시는 놈들을 싫어했다. 물론 멀쩡한 놈들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이 사기꾼 놈들이었으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이대로라면 블라디미르, 그 녀석들이 세계를 파괴할 거야!”
“……블라디미르라고?”
“그래, 바로 그들이 말이야! 어, 그들을 알고 있소?”
케이혼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말을 멈췄고, 안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얘기를 들어 보는 것만이라면, 들어 보지.”
막상 일이 갑작스럽게 진전되자 잠시 멈칫하던 케이혼이 서서히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평소와 같은 나날을 보내던 때, 교황 성하께서 날 부르셨소. 맡길 일이 있다는 것이었지. 항상 본단에 틀어박혀 남들 눈을 피해 지냈던 나에게 임무라니, 정말 뜻밖인 일이었소. 왜냐면 난 항상 내놓은 자식 취급 받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나저나 한시가 바쁘다는 건 그냥 하는 소리였던 걸까. 자꾸만 별 중요치도 않은 얘기들을 구구절절 늘어놓아 댄다.
이대로라면 하루 종일 그의 얘기만 들어야 할 판이란 생각에, 안톤이 심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그의 말을 끊었다.
“하고자 하는 내용만 간단히.”
“이 또한 중요한 내용이오만……?”
케이혼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안톤에게는 소용없었다.
“그럼 혼자 읊고 계시오. 나는 이만 갈 테니.”
“아아! 알겠소. 진짜 성질머리 하고는…….”
쯧쯧.
어디서 혀 차는 듯한 소리가 난 듯해 안톤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뜨끔했는지 케이혼이 시선을 피하면서 서둘러 일의 전말만을 간략하게 줄여 말한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아무튼 나는 결국 교황 성하의 명에 따라 성전사단을 이끌고 잃어버린 성물을 찾기 위해 미궁에 왔소. 그리고 몇 달간의 고생 끝에 나는 결국 성물을 찾아냈지.”
그 성물이란 게 뭐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이쯤 되면 이런 유의 호응이 나올 법하다고 예상했는지, 문득 케이혼이 말을 멈추고 안톤을 흘깃 쳐다본다. 그러나 안톤은 무언의 재촉이 담긴 시선만을 그에게 보낼 뿐이었다.
무안해진 그가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고는 말을 이어 갔다.
“흠흠! 복귀하는 도중에 누군가 우리를 습격해 왔고, 그자는 강했소. 위용을 자랑하던 성전사단이 고작 한 사람의 손에 의해 궤멸당했고, 나는 저주에 걸린 몸으로 겨우 도망이나 치다가 이곳에서 쓰러졌소. 그리고 당신이 나를 발견하고 구해 낸 것이오.”
“대륙의 평화니 뭐니 하더니, 그 얘기는 쏙 빠졌군.”
“그게 누구 때문인데!”
안톤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자, 케이혼이 발끈했다.
뭐, 안톤이 읊조린 한 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진정되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 소리치는 거요?”
“흠흠. 그럴 리가 있나.”
문득 더워졌는지,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던 케이혼이 안톤을 마저 설득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당신도 알까 모르겠는데, 블라디미르는 대륙을 위협하는…….”
“굳이 얘기할 것 없소. 도와주지.”
“그게 정말이오?”
“단, 조건이 있소. 그자를 해치우고 나서 그 성물은 내가 가지고 가리다.”
케이혼은 입을 떡 하고 벌리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소리쳤다.
“도대체 그걸 왜……. 아니 것보다, 그걸 가져가 버리면 부탁하는 의미가 없잖소!”
“싫으면 말고. 그럼 혼자 알아서 잘해 보시오.”
금방이라도 떠나려는 듯 등을 돌리는 안톤의 어깨를 케이혼이 붙잡았다.
“……아아, 그렇지!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먼저 한 번 신께 기도를 좀 드리고 나서 답해 주겠으니!”
이 상황에 무슨 기도인가 싶었지만, 뭔가 말할 새도 없이 그는 대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이내 은은한 순백의 빛이 그의 피부에서 새어 나왔다.
안톤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막상 입을 꾹 닫고 진지한 태도로 손을 모으니, 정말로 성자의 모습처럼 경건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빛이 완전히 사그라지자 케이혼이 눈을 떴다.
“안톤…… 왜 말하지 않았나?”
“뭔 소리요?”
“자네가 바로 이번 대의 용사였다는 걸! 자네와 나의 만남은 신께서 점지한 운명이었군!”
분위기 변화가 너무 극심하다고나 할까.
이글이글 눈을 불태우는 케이혼을 보며, 안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지금 뭔 말을 하든 들을 것 같지 않을 것만 같았다.
“후우…….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그래서 내가 내건 조건에 대한 답은?”
“물론이지. 성물이 필요하다면 갖고 가시오!”
도대체 그의 신은 그에게 무슨 말을 들려준 것일까.
썩 궁금하긴 하였으나, 안톤은 굳이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 * *
“그래서 정말 성녀는 필요 없소?”
“필요 없소.”
“진짜 예쁜데 말이지……. 쩝.”
안톤의 즉각적인 대답에 케이혼이 입맛을 다신다.
어느 독실한 아넨교 신자가 그의 현 모습을 보았다면 분명 불호령을 쳤을 것이다.
성녀를 마치 고급 창부쯤 되는 것처럼 대하다니, 그들에게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신성모독임이 틀림없을 테니까.
“아, 저쪽에서 성물의 기운이 느껴지오!”
등에 업힌 케이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안톤이 몸을 틀었다.
그는 번개 같은 속도로 신속하게 성물을 추적하는 중이었다.
“우악! 자, 잠깐! 좀 살살 달려 주시오! 내장이 목으로 쏠려 나올 것만 같소!”
방향을 확 꺾자 케이혼이 온갖 엄살을 다 부린다.
작금에 들어서 자신이 말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누군가를 업고 달리는 일이 많았던 안톤이지만, 이 정도로 불평불만이 많은 탑승자는 처음이었다.
“다운 포인트요! 성물의 잔향이 다 지워지기 전에 어서 들어갑시다.”
59층을 벗어나 58층으로 내려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혼의 도움으로 성물을 탈취한 블라디미르의 괴한이 지나간 길을 추격했고, 이는 아래층에서도, 그 아래층에서도 반복됐다.
57층. 56층. 55층…….
그리고 43층.
그렇게 둘은, 아니 팔찌 속에 들어가 있는 델스까지 셋은 그야말로 쏜살같은 속도로 미궁을 내려갔다.
쏜살같은 속도라고는 했지만, 그럼에도 만 하루하고 한나절이나 더 지속된 강행군이었다.
이제는 뛰다 보면 마물들을 사냥하는 모험가들이 틈틈이 보일 정도였지만, 아직까지 쫓는 사내는 머리카락도 내비치지 않았다.
‘고작 네 시간 거리 차를 좁히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이야.’
“이제 얼마나 남았소?”
“거의 다 쫓아왔소. 힘내시오!”
“아무래도 힘을 내야 하는 쪽은 당신인 것 같소만.”
목소리에서 전혀 힘이 느껴지지 않는 케이혼을 보며 피식한 안톤이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안 그래도 안톤 역시 슬슬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안톤은 케이혼처럼 성물의 기운을 감지할 수는 없지만, 그가 탐지할 수 있는 기운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요력이다.
발을 떼면 뗄수록 보다 진득한 요력의 기운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얼굴을 보겠군.”
그렇게 지루하던 추적이 거의 끝나 간다고 여기던 때였다. 저쪽에서도 이쪽을 눈치챘는지 이동속도가 급격히 증가했다.
‘여기서 더 빨라지다니, 최대 속도가 아니었다는 건가?’
좁혀지던 거리가 이윽고 일정한 간격으로 유지된다.
그것은 적어도 서너 시간, 층수로는 도합 3층을 내려오면서까지 이어졌다.
그런 상황이 변화한 것은 안톤이 다운 포인트를 통해 막 40층으로 돌입했을 때였다.
안톤이 포탈을 통해 40층의 땅을 밟는 순간, 그의 눈앞으로 커다란 주먹 하나가 보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행해진 기습.
안톤은 머리가 생각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이를 막았다.
낑!
주먹과 금속이 아니라, 철과 철이 부딪친 듯한 소리.
안톤은 검면으로 가해진 물리력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
적은 한숨 돌릴 시간도 주지 않으며 재차 신형을 날렸다.
쉬잇. 낑! 타타닷. 휘이익!
안톤의 동체시력으로도 따라가는 것이 버거운 연격.
일격 하나하나가 지닌 위력은 사막에서 만났던 쟈카론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공격하는 방식이 다채롭고 훨씬 빨라서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무기를 들지 않았음에도, 어디서건 날아오는 양발과 양 주먹이 담은 기세가 매서워 안톤은 마치 무기 네 개를 지닌 적과 싸우는 느낌이었다.
이를 제대로 막아 내기 위해선 안톤 역시 각고의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했고, 그렇게 초인들만의 간격 속에서 몇 초 동한 공수 교환이 수십 차례 이어졌다.
“으워어어어!”
지난 강행군 중 어느 정도 멀미에 적응했던 케이혼이었으나, 이것마저 견딜 순 없었는지 한껏 비명을 지르다가 혼절했다.
그 덕에 안톤은 훨씬 더 움직이기가 편해졌다.
촤악!
반달 형태로 휘둘러진 안톤의 일검에 적이 공중제비를 돌며 멀리 떨어졌다.
그리하여 생겨난 잠시간의 소강상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짧은 틈 속에서 양측 모두 서로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안톤은 몇몇 단서들로 적의 정체를 추정해 냈다.
거렁뱅이 같은 옷가지에, 전형적인 무도가 타입의 전투 방식. 단연코 지금까지 만난 그 어느 누구보다도 빠르다 할 정도의 속도까지.
“아마 당신이 파서스 라우렌이겠군.”
허나 정체를 파악해 낸 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천검술을 쓰는 걸로 보아 네가 바로 그 안톤이겠군. 듣기로 에반하임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는다더니, 생뚱맞게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그나저나 나에 대해선 세로게트에게 들은 건가?”
안톤이 고개를 끄덕이자 파서스가 흥미 어린 표정을 짓는다.
“그는 날 어떻게 평가했지?”
“그건 별로 중요치 않소. 어서 성물이나 내놓으시오.”
“역시 그게 목적이었나.”
파서스가 품속에서 손바닥 크기의 왕관 하나를 꺼내 안톤에게 보란 듯이 흔들었다.
“정말로 원하는 것이라면, 직접 쟁취하는 것이 이치겠지.”
“실로 옳은 소리요.”
파서스가 싸우기 위한 기수식을 취했고, 그것은 안톤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가 운명이라면, 나는 운명을 꺾고 더 강해지겠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파서스가 달려들었고, 치열한 전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