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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18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7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18화

118. 비석

 

 

안톤이 동패를 꺼낸 후, 일순간이지만 델스의 표정이 굳었다. 유심히 살피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다.

 

그렇다고 델스가 안톤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됐건 델스는 길잡이였고, 시키는 일을 하고 그 대가를 제대로 받을 수만 있다면 고용인의 실력은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게다가 행동거지를 통해 본 안톤은 부유해 보였고, 또 돈을 떼먹을 정도로 약삭빨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가 잠시라도 표정이 굳었던 것은, 그저 자신의 안전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만약 안톤이 무리하다 덜컥 죽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미궁 한복판에 홀로 남아야만 하니까.

 

‘어떻게든 안전한 길로만 다녀야겠어.’

 

델스는 길잡이 일을 결코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에겐 목숨을 걸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린의 약값을 벌려면 어쩔 수 없어.’

 

설사 홀로 미궁에 고립되더라도 어지간해선 살아남을 자신도 있다. 그러니 조금만 조심하면 괜찮다.

 

델스는 아무런 내색 않고 결심을 끝마쳤다. 아니, 그렇게 했다고 믿었다.

 

‘안 그런 척하면서도 속내가 훤히 보이는군.’

 

안톤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델스의 뒷모습을 살폈다.

 

미궁에 들어온 후 델스는 미로 속에서 안톤을 안내했다. 그리고 들어온 지 두 시간이 넘었음에도 안톤은 아직 한차례도 마물과 조우하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델스가 그런 길들로만 안톤을 안내한 것이다. 비록 심증이긴 하지만 애초에 아무런 전투력도 없는 길잡이가 나서서 앞장을 선다는 것 자체가 증거라 할 수도 있었다.

 

‘아니, 이젠 물증이 생겼지.’

 

안톤이 벽에 살짝 그어진 흠집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까 한 시간 전에 그가 벽에 새겨 놓았던 표식이다.

 

‘계속 같은 길을 빙빙 돌고 있어.’

 

이제 안톤도 델스에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델스.”

 

안톤이 문득 발을 멈추고 그를 부르자, 델스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았음에도 이것저것 말을 쏟아 냈다.

 

“마물들이 너무 안 나오죠? 아직 초입부라 그래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나타날 거예요.”

 

지금 하는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조금 더 지나면 마물이 나타나기야 하겠지. 이제부터는 그런 길로 안내를 할 테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다. 이래선 결국 계속 초입부에서 맴돌기만 할 것이다.

 

“이제 슬슬 제대로 안내해 주지 않겠느냐? 나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

 

안톤에겐 2만 골드를 모아야 한다는 목적이 있다.

 

그것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길잡이야 길만 잘 찾아 주면 된다는 생각에 델스를 고용했지만 길을 찾아 주지 않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안다. 하지만 이건 나이를 속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너라면 충분히 알 것이다.”

 

“…….”

 

완전히 얼어 버린 델스를 지나쳐 안톤이 앞으로 향했다.

 

“가자. 이제 여기선 어느 길로 가면 되지?”

 

안톤이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이후에도 계속 흐지부지 길 안내를 한다면 안톤은 당장 도시로 돌아가 다른 길잡이를 구할 생각이었다.

 

‘뭐, 그 녀석들도 내가 동패인 걸 알면 비슷하겠지만…….’

 

처음 동패를 받았을 땐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로 인해 불편한 일도 많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았다.

 

이래서 모험가들이 기를 쓰고 승급을 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다행히 델스도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벽에서 마물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두 마리나.

 

“도플 울프예요!”

 

아마 그것이 그 늑대의 정식 명칭인 듯싶었다.

 

안톤은 도플 울프 두 마리가 달려들기 전 델스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한 번에 두 마리나 등장할 줄은 예상치 못했는지, 꽤나 긴장해 있었다.

 

“조심하세요!”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정말 중요한 본질을 볼 안목도 없으면서도, 보이는 것을 최고의 가치이며 기준으로 친다.

 

그렇기에.

 

안톤은 벽에서 마물이 튀어나오는 순간, 델스가 보기에 가장 위력적인 모습으로 검을 휘둘러 양단했다.

 

콰쾅!

 

정말로 안톤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일검이었다면, 이렇게 요란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고요하게 바람 소리만 스치듯 지나갔겠지.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단칼에 짓이겨진 두 마리의 도플 울프를 보며, 델스가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떡 벌리고 있었으니까.

 

“굉장해…….”

 

아무리 그 대상이 최하층의 마물들이라고는 해도, 동패. 그것도 작대기 하나짜리의 모험가가 낼 신위는 절대 아니다.

 

델스가 예전에 보았던 은패급 모험가도 이렇게 압도적인 검격을 뿌려 대진 못했다.

 

“이런 실력을 지녔으면서, 어쩌다가 동패를 받으신 거예요?”

 

“측정기가 고장 난 모양이더군.”

 

안톤은 그 질문에 선의의 거짓말을 해 주었고, 델스는 납득하는 눈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델스는 계속해서 길을 안내했다.

 

아무래도 델스의 마음가짐은 또 한바탕 뒤바뀐 모양인지, 미궁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타나는 마물의 수가 점점 늘어났으며 종류들도 다양해졌다.

 

그리고 안톤은 그때마다 보란 듯이 거창한 일검을 휘둘렀다.

 

“더 강한 녀석들이 나오는 곳으로 가고 싶다.”

 

이제 어느 정도 안톤의 실력에 신뢰가 쌓인 것일까. 델스 역시 그러는 게 좋겠다며 안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도 그럴 게 이 근방에서 나오는 마물들은 몇 마리가 나오건 안톤의 일검조차 버텨 내지 못했으니까.

 

“그럼 업 포인트로 가 볼게요.”

 

“업 포인트가 뭐지?”

 

미궁 도시에 찾아와서 모험가가 됐으면서, 이런 상식조차 모르다니.

 

델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을 안톤에게 보냈다. 물론 그러면서도 입은 안톤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 주고 있었다.

 

“업 포인트는 다음 층으로 이어지는 포탈이에요. 층이 높아질수록 환경도 바뀌고 더 강한 마물들이 나타나죠.”

 

“층이라고? 미궁이 탑 같은 구조였나?”

 

“그냥 모험가들이 편의상 그렇게 정해 둔 거예요. 난이도별로 어느 정도 기준이 필요하니까요. 예를 들면, 지금 제가 안내할 포탈은 바로 3층으로 향하는 포탈이에요.”

 

“더 위로 한 번에 가는 포탈은 없나?”

 

“있다고는 들었지만, 저는 이것밖에는 알지 못해요. 층을 건너뛰는 점프 포인트는 수가 굉장히 적고 대외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거든요.”

 

“그렇군.”

 

안톤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딱히 안톤이 델스를 무시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델스가 사라진다면, 되돌아가는 길이 막막해질 정도였으니까.

 

‘어떻게 이런 미로 속에서 길을 곧잘 찾는 건지 신기하군.’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마물들은 안톤이 즉시 처리를 해 주었기에, 점프 포인트에 도착하는 것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막다른 길 끝부분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었고, 가장 꼭대기에 푸른빛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여기 보석 위에 손을 올리시면 돼요. 그럼 끝이에요. 먼저 가시겠어요?”

 

“그러지.”

 

그렇게 안톤이 그 위로 손을 가져다 대던 중 무언가를 보고는 멈칫했다. 그리고 델스를 보며 한 가지 질문을 날렸다.

 

“혹시 저 벽 뒤에 뭐가 있는지도 아나?”

 

“글쎄요. 아마 그냥 막혀 있는 공간 아닐까요?”

 

“모른다는 소리군.”

 

안톤이 손을 도로 거둔 채 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벽 위를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벽의 감촉은 단단하고 차가웠다.

 

‘영락없이 평범한 벽인데 말이지.’

 

안톤은 미궁에 들어서고 나서부터 계속 신안을 개방한 상태로 있었다.

 

미궁 내부의 모습이 굉장히 신비로웠기 때문이다.

 

일단 미궁에 있는 모든 벽들은 마나를 품고 있었다.

 

‘하긴 벽 안에서 마물들이 튀어나오는데, 평범한 벽일 리가 있나.’

 

안톤은 이곳까지 오던 중에 델스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이 벽들을 모두 부술 생각은 아무도 해 보지 못한 것이냐고.

 

그러자 델스는 웃으며 이 벽들은 어떤 짓을 해도 흠집 하나 생기지 않는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래서 안톤은 한 번 확인해 보았다.

 

그의 눈으로 바라본 벽에는 결이 존재했으니까. 그러니 베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그에겐 있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아까 델스가 빙빙 돌고 있다는 걸 알려 준 그 표식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벽도 베어 낼 수 있다.

 

안톤이 벽을 노려보며 검을 겨누었다.

 

“무슨 짓을 하시려는 거예요!”

 

“저 벽 너머에 이것과 비슷한 마나를 가진 물체가 있다.”

 

마나의 성질과 형태가 거의 일치했지만, 3층으로 향한다는 점프 포인트보다 훨씬 비대한 양의 마나를 함유한 무언가.

 

“그게 무슨…….”

 

“뭔지 한 번 확인을 해 봐야겠어.”

 

안톤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단단하던 벽이 두부처럼 길게 갈라졌고, 그 안에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공간이 생겼다.

 

우우웅!

 

공기가 그 틈새로 빨려 들어가며 괴상한 소리가 퍼져 나온다. 마치 벽이 내지르는 통곡 같았다. 뿐만 아니라 마치 상처가 아물듯 벽의 찢겨진 부분이 서서히 재생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말이다.

 

“어어…….”

 

생전 처음 보는 괴현상에 델스의 머리가 기능을 멈췄다. 안톤은 그런 그를 한 손으로 안고서는 대뜸 그 벽 안으로 들어갔다.

 

삼면. 아니, 이제 완전히 재생된 벽의 틈새까지 합쳐 총 사면이 가로막힌 공간.

 

“이런 장소가 있을 줄이야…….”

 

델스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이 기현상 자체에 놀라움을 느끼는 듯했지만, 정작 안톤은 심드렁한 얼굴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점프 포인트와 똑같이 생긴 비석이었다.

 

“이건 몇 층으로 향하지?”

 

안톤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델스가 그제야 비석을 바라봤다. 그리고 비석을 살피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색이 보라색을 띨수록 더 높은 층으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진한 것은 저도 처음 봐요.”

 

“이건 누가 봐도 보라색이니 고층까지 단박에 갈 수 있겠군.”

 

“서, 설마 이걸 타고 가려고요?”

 

델스가 기겁했다.

 

암만 생각해도 이 포인트는 그들이 최초로 발견한 것이 맞았다. 적어도 오늘까지 누군가 벽을 부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델스는 걱정이었다.

 

최초로 발견된 포인트는 위험성을 갖고 있고, 그렇기에 숙달된 모험가들도 이를 이용하는 것을 신중히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초로 발견된 포인트는 어느 곳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실제로 미궁에는 데스 포인트라고 불리는 지점이 몇몇 있다.

 

그 포인트들이 어디로 이어지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포인트를 이용한 모험가들 중 어느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기에 그런 별명들이 붙었다.

 

이 또한 그러한 종류의 것일지 모른다.

 

델스는 그러한 점들을 안톤에게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안톤은 그의 말에 눈곱만치도 설득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지만.

 

“함께 간다면 100골드를 주지.”

 

안톤이 큼지막한 보상을 제시했다.

 

사실 안톤은 델스를 도시에 데려다주고 혼자서 이 포인트를 사용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미지의 곳에서 길잡이 따위 필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도시에 갔다가 다시 이곳을 찾으려면 델스가 필요했다.

 

굳이 함께 오지 않는다 해도, 지도를 만들거나 하려면 한참이나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고 말이다.

 

‘그럴 바엔 100골드를 지불하고 오늘 끝을 보는 게 낫지.’

 

델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욕심을 버리기 어려울 만큼 큰 보상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미지에 대한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던 델스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끄덕.

 

승낙의 의미를 한껏 담은 고갯짓을 보며 안톤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런 안톤을 보며 델스가 당당하게 조건을 내붙였다.

 

“대신 선불로 주셔야 해요.”

 

“그러지.”

 

합의가 끝나자 곧장 품에서 돈을 꺼내서 건네준 안톤이 델스를 바라보며 천연덕스럽게 질문했다.

 

“그럼 누가 먼저 가지?”

 

“…….”

 

“농담이었다. 혹시 모르니 내가 올라가고 나면 바로 따라 들어와라. 그래야만 어떤 상황에서든 널 지켜 줄 수 있을 테니까.”

 

왠지 모르게 든든하게 느껴지는 한 마디를 남기고, 안톤이 주저 않고 포인트 위로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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