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17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17화
117. 미궁
“그새 등록을 끝마쳤나?”
예의 그 경비가 안톤을 알아보고는 굳이 한 마디를 던진다.
여전히 그의 눈빛에는 조롱의 기운이 강했고, 이는 안톤의 모험가 패를 보자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 이거 영 허우대만 멀쩡한 녀석이었군? 젊어 보이니 충고 하나만 하지. 헛된 꿈은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살아도 죽는 것보단 낫지.”
“그런 말을 당신에게 들을 이유는 없소.”
안톤이 어깨에 올려진 경비의 손을 거칠게 밀어냈다.
경비는 발끈하기보다는 그런 안톤을 보며 비웃었다.
“까칠하구만그래. 한사코 가겠다는데 내가 어찌 말리겠어. 자기 운명이거니 해야지.”
누가 아넨교의 근거지인 엔티아네아 한복판 아니랄까 봐, 경비마저 운명을 논한다.
대꾸할 가치도 없었기에 안톤은 그저 미궁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미궁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미궁이 라프도니아에 실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라프도니아 중심에는 거대한 크레이터와 포탈이 하나 있고, 그 포탈이 아직도 어디에 있는지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미궁으로 이어지는 형식이었다.
안톤은 망설임 없이 포탈이 뿜어내는 음험한 빛무리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발끝이 맞닿는 순간 그의 육체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고, 인지를 했을 땐 이미 미궁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여기가 미궁인가.’
안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지금 그가 있는 반구 형태의 거대한 공동에 얼추 수백 개는 족히 넘을 숫자의 통로들이 빼곡하게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딱히 좁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안톤은 그냥 발길이 이끄는 대로 가장 가까운 통로를 선택해 들어갔다.
아마 이렇게까지 사전조사를 하지 않고 이곳에 발을 들이민 자는 안톤이 유일할 것이다.
‘미로 형식인가 보군. 잘못하면 길을 잃겠는데…….’
어디로 향하든 갈림길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안톤은 문득 지나친 갈림길의 수를 세 보았다. 고작 10분도 걷지 않았는데 벌써 열 개는 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초반부라 그런지 어느 길을 선택하든 곳곳에서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면 그렇지도 않으리라.
‘일단은 돌아가야겠어.’
안톤은 더 고민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물론 동료는 필요치 않았으나, 아무래도 모험가 길드 직원의 조언대로 길잡이는 한 명 고용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아무것도 없는 맨벽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크르르르.
그것은 검은 털을 지닌 늑대였고, 안톤은 그제야 미궁에 들어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늑대 정도야 밖에서도 볼 수 있는 맹수라지만, 이 녀석은 맹수가 아니라 마물이란 명칭이 어울리는 놈이었다.
그도 그럴 게 바깥세상에는 적어도 머리가 두 개인 늑대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크허허헝!
꽤나 공격적인 성향인지, 늑대가 안톤을 보자마자 맹렬히 달려든다.
침까지 질질 흘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지만, 솔직히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근래에 연이어 치른 지난 격전들을 떠올리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쉬운 상대랄까.
푸슉!
안톤이 무감흥한 얼굴로 검을 내찔렀다.
“초입부라 그런가? 엄청나게 쉽군.”
안톤은 늑대가 쓰러져 있던 자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숨이 멎은 직후부터 늑대의 사체에선 빛무리가 생겨나더니 서서히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사라졌고, 그 자리에 푸른 빛깔의 돌멩이 하나가 대신해 있었다.
바로 마석이었다.
안톤은 일단 그것을 주웠다.
‘쉬운 만큼 보상도 없다는 건가…….’
마석 속에 깃든 마나의 양은 형편없을 정도로 적다. 마석의 시세를 잘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값어치가 떨어질 거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빈손인 것보다는 낫지.”
안톤은 느긋하게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사람들이 모두 큼지막하게 가방을 들고 다니는 이유를 이젠 알 것도 같았다. 모험을 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도 도구들이지만, 제대로 미궁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려면 몇 날 며칠로도 부족할 테니 비축 식량은 필수일 것이다.
‘갑자기 카린이 갖고 있는 아공간 가방이 절실해지는군.’
안톤은 오늘 얻은 마석을 품에 넣었다.
아무래도 아공간 가방은 아니더라도 적당한 가방은 하나 마련해야 할 듯싶었다.
깊숙이까지 들어온 것은 아니었기에 어렵지 않게 원래 있던 공동으로 돌아온 안톤은 포탈을 타고 도시로 돌아왔다.
워낙 금방 들어갔다가 나와서였을까.
아까 전의 경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스치듯 지나가는 안톤을 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안톤은 그를 보며 그냥 피식 웃었다.
마음가짐을 바꾸니 그리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저런 시선들이야 익숙했고, 그가 강해지고자 한 이유는 어차피 저런 자들에게 유세를 떨고자 함이 아니었으니까.
곧장 상업지구로 향한 안톤은 한동안 그곳에 있는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미궁 도시답게 어느 가게를 가든지 간에 미궁과 관련된 물품들이 주를 이뤘고, 안톤은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꼼꼼하게 골랐다.
‘어차피 길잡이를 고용할 셈이니 지도는 필요 없겠지.’
음식과 식수가 가득 담긴 가방 하나와, 마석을 담을 빈 가방 하나. 그리고 몸에 잘 맞는 옷과 신발까지 구입한 안톤은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면 길잡이를 구하기 수월할 거란 가게 주인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광장 한쪽 구석에는 거대한 게시판이 있었고, 그 앞은 특히나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어차피 굳이 가까이 가지 않아도 글자를 읽을 수 있었기에, 안톤은 그들 사이에 부대끼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게시판에 있는 글들을 읽어 내렸다.
그리고 그러던 때였다.
누군가가 안톤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뒤를 돌아 확인해 보니,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안톤을 올려다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혹시 길잡이 안 필요하신가요?”
참으로 당돌한 꼬마였다.
* * *
자신의 이름을 델스라고 밝힌 꼬마 아이는, 서툰 솜씨로나마 자신의 장점을 쉬지 않고 피력했다.
그리고 안톤은 눈앞의 이 꼬마가 사실 정말로 당찬 것이 아니라, 그런 척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지?”
단지 궁금해서 물은 것뿐이었지만, 그 질문 하나로 꼬마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길잡이로 업종을 바꾼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어렸을 때부터 짐꾼 일을 해서 미궁에는 빠삭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원하시면 짐도 들어 드리고, 마석도 대신 주워 드릴 수도 있어요. 다른 길잡이들보다도 훨씬 저렴할 거구요.”
태연하게 논리를 풀어내듯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꼬마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필사적이라는 느낌만이 가득했다.
“아, 나이는 열다섯 살이에요.”
꿀꺽.
안톤의 귀에 꼬마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열다섯이라 밝힌 나이는 거짓일 것이다. 그저 나이가 어리다고 쓰지 않을까 봐 올려 말한 것이겠지.
암만 못 먹고 자랐다고 해도 겨우 열 살을 조금 넘은 나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였다.
물어본 질문에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대답한 꼬마였지만, 오히려 그 꼬마를 바라보는 안톤의 시선은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
사실 이미 그의 마음은 거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흠을 잡을 생각은 없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 봐라. 몇 살이지?”
안톤의 눈빛을 받은 꼬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열한 살이요.”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기엔 턱없이 어린 나이.
원래라면 부모의 보호 아래 자라며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이 꼬마는 혼자만의 힘으로 꿋꿋이 버텨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열한 살이라……. 나는 그 나이 때 뭘 하고 있었더라?’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기억이 났다.
당시의 안톤은 노예로 부려 먹히며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비록 노예와 자유민이라는 까마득한 간격이 있기는 했지만, 험지라 할 수 있는 미궁과 평화롭던 농장의 환경 차이는 어마무시했다.
안톤은 대견하다는 눈길로 꼬마를 바라보았다.
뭐, 안톤 역시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에 검투사 양성소에 끌려간 후부터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긴 했지만, 딱히 이 꼬마라고 해서 그 나이가 된다고 하여 인생이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인생은 불공평한 법이지.’
그리고 안톤은 그런 불공평함이 싫었다. 물론 그걸 순응하지 못해서 다 갈아엎겠단 건 아니지만 적어도 눈앞에, 적어도 손이 닿는 거리에서 벌어진 일을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좋아. 길은 말한 대로 잘 찾을 수 있는 거겠지? 나는 꽤나 깊이 들어갈 생각인데.”
“지, 지도만 있다면 어딜 가든 찾을 수 있어요.”
“그래. 그러면 지도부터 사러 가야겠군. 나는 뭐가 좋은지 잘 모르니 네가 골라라.”
“알겠어요.”
“아, 그나저나 가장 중요한 걸 얘기하지 않았군. 너를 고용하려면 얼마를 지불해야 하지?”
아무래도 이 모든 노력이 무산될 수 있었기에, 델스는 조심스럽게 금액을 얘기했다.
“하루에 5실버…….”
“5실버라고?”
안톤이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델스가 어깨를 움츠리며 다급하게 말을 이어 붙였다.
“아니, 너무 부담되신다면 4실버만 주셔도 괜찮아요!”
사실 안톤이 놀란 것은 금액이 많은 것이 아니라,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훨씬 적어서였다. 물론 하루 치 일당으로 5실버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지만, 미궁 같은 험지에서 전문적인 일을 하는 것에 비해선 보상이 상당히 짠 면이 없잖아 있었다.
“값을 낮출 생각은 없다. 5실버로 하지.”
“그리고 하루 치 금액은 선불로 받을 수 있을까요?”
“지금은 잔돈이 없으니, 이따가 지도를 사면서 주마.”
“감사합니다!”
하루 치 일당을 선불로 지불한다는 말에 델스의 안색이 확 하고 밝아진다.
꼭 선불로 받아야 하는, 무언가 사정이 있으리란 짐작은 충분히 갔지만 안톤은 굳이 이를 묻지 않았다.
“내 이름은 안톤이다. 그럼 잘 부탁하마.”
“네!”
마지막으로 악수까지 끝낸 안톤과 델스는 지도를 사기 위해 가게를 돌아다녔다.
델스는 겨우 열한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런 생활적인 부분에서는 안톤보다 훨씬 능숙했다.
지도 몇 개를 고르는 일에도 굉장히 신중하게 하나하나를 살폈다.
대충 아무거나 가장 좋은 걸로 사라고 하고 싶던 안톤이었으나, 자기 돈을 쓰는 것처럼 열성을 다하는 델스의 모습에 그만두었다.
그렇게 지도를 사는 것까지 끝마치고, 안톤과 델스는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했다.
가능하다면 당장 다시 미궁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안톤이 내비치자, 델스는 그럼 잠시 어디 좀 다녀와도 괜찮겠냐고 양해를 구해 왔다.
선불 금액만 받고 도망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안톤은 흔쾌히 승낙했다.
‘결국 그러면 다 자기 운인 것이겠지.’
그렇게 광장에서 한 30분 정도를 기다리자, 어딘가 다녀온다던 델스가 돌아왔다.
상당한 거리를 뛰어왔는지 호흡은 거칠었고, 이마와 팔뚝이 전부 땀범벅이었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안톤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에게 숨 돌릴 시간을 주기 위해 잠시 쉰 다음에 미궁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델스는 최대한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지만, 다 큰 성인과 아이의 걸음이 같을 순 없다.
안톤은 일부러 델스에게 말을 걸며 천천히 걸었다.
“미궁 도시에서 오래 살았다면 아는 것도 많겠군.”
“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많달까, 주변에서 잡지식이 많다는 얘기는 자주 들어요.”
“그럼 혹시 금패를 지닌 모험가도 만나 본 적 있나?”
“네. 딱 한 번요. 운 좋게도 같은 금급 모험가와 결투를 벌이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이 도시에서 오래 살기는 했어도 현실적으로 그분들과 저 같은 게 엮일 일이 없는지라…….”
“그렇다면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겠군?”
델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확실히 제가 무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결투를 보고도 그저 대단하다는 느낌밖에는 없었지만, 금급 모험가의 기준은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거든요.”
델스는 금패를 받기 위한 최소 조건이 오러 유저거나 혼급 마법사여야 하며, 대륙의 무력 기준에 비해 마법사의 기준이 무인보다 한 단계 낮은 것은 마법사가 무인들보다 희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듣자 안톤은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혹시 모험가들 중 마스터급의 무인도 있나?”
“딱 두 명만 있다고 들었어요. 그분들은 모험가 길드의 마스터가 직접 수작업으로 만든 백금패를 수여받았죠.”
“그러면 백금패를 받은 그 모험가라면 미궁에서 2만 골드를 모으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그의 입장에서는 생뚱맞고 별 의미 없는 질문이었을 터임에도 델스는 눈썹까지 오므리면서 진지하게 고민해 주었다.
“음……. 2만 골드라니, 현실감이 없는 액수인지라 감이 잡히질 않네요. 그래도 짐작이라도 해 보자면…… 아무래도 저는 적어도 반년은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해요.”
안톤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반년이라……. 그렇게까지는 시간이 없는데 말이지. 그냥 카린에게 들르는 편이 빠른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아, 도착했군.”
포탈 입구에 도착한 안톤은 그와 함께 줄을 선 채 기다렸다. 입구의 경비는 모험가들의 패만을 확인하고 입장을 허가시켜 주었기에, 줄은 금세 금세 줄었다.
그리고 이제 안톤의 차례였다.
안톤은 품속에 고이 모셔져 있는 동패를 만지작거리며 꺼내는 것을 망설였다.
‘왠지 부끄럽군.’
그러고 보니 안톤은 델스에게 자신이 무슨 패를 받았는지 아직 알려 주지 않았다. 녀석도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물어 오지 않았고.
어쩌면 자신의 모습과, 깊숙이 들어간다는 말만 듣고 안톤을 굉장한 실력자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 사실만 얘기하자면 착각은 아닌데…….’
눈을 똘망똘망 빛내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오는 델스를 보며, 안톤은 죄지은 것도 없는데도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