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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57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6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57화

157. 배신

 

 

어떤 계기가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모르지만, 원래 레트안은 전형적인 학자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매일 같이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만 읽던 그는 알고 있는 지식도 많았다.

 

다만 안톤이 원하는 정보는 그 역시 금시초문인 모양.

 

때문에 미친듯이 책들을 뒤적이는 단순 노동의 나날이 시작됐다.

 

그렇게 또다시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갔다.

 

아무리 레트안이 도와주기로 했어도, 이 넓은 황실 도서관에서 단 하나의 정보를 찾아내기엔 인력이 부족했고, 레트안이 수를 하나 써냈다.

 

바로 그와 친분이 있던 학생들을 불러모아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

 

인력이 많아지자, 당연히 진척 속도가 올라갔고 서서히 단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 지하 예배당에 관한 기록입니다."

 

"황궁이 지어지던 시절의 건축 양식을 그려봤습니다."

 

"고서에 적힌 정보에 따르면, 비운의 황녀 엘자스의 방에 통로 같은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밀애를 하던 때에 자주 애용했다는 듯 하더군요."

 

"지하 예배당은 비상시 황족들의 탈출구로도 사용됐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분명 야외에서 이어지는 길도 있을 겁니다."

 

안톤은 그런 그들의 도움에 별도의 금액으로 대가를 지불하려 했지만, 그들은 한사코 거부했다. 정 대가를 주고 싶다면 레트안을 성심껏 가르쳐주라며 말이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긴 했으나, 안톤은 그들의 부탁을 성실히 이행했다.

 

"여기 이 부분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낮에는 그들과 함께 도서관을 뒤지고, 저녁이 되면 레트안에게 검을 가르쳤다.

 

레트안이 배우는 무공은, 안톤이 예전에 레온에게 전수하려 만든 예의 그 무공이었다.

 

"아, 이제 이해가 갑니다!"

 

레트안은 학자 출신 답게 머리가 좋았다.

 

특히나 암기에 강했고, 하나를 가르치면 왜 이걸 가르치는지 그 이유를 곧장 알아채곤 했다.

 

다만 실전에 약했다.

 

허나 그 약점은 안톤이 선생 역을 맡은 이상 문제도 아니다.

 

그의 투박하면서도 문제의 중심을 꿰뚫는 지도로 레트안의 검이 그리는 궤적은 날이 갈 수록 점점 반듯해졌다.

 

"하앗! 하앗!"

 

여전히 안톤의 눈에는 성이 차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만, 전과는 비할 바 없는 검격.

 

모두 그가 기초적인 준비를 해두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이라 했던가.

 

전부터 단련을 거듭한 그의 육체는 안톤을 만날 당시부터 제법 그럴 듯하게 갖춰져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레트안의 수련이 순조로웠단 것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실전에 약하다는 것 외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검을 잘 휘두른다고, 강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는 그가 앞으로 검사의 생을 살아갈때 셀 수도 없이 발목을 붙잡을 것이었다.

 

'기공을 배운 게 너무 늦었어.'

 

이 대륙에서 강자로 무명을 떨치려면 반드시 마나가 필요하다.

 

어찌보면 이런 검술보다는 마나 연공법의 숙련이 보다 중요할지도 몰랐다.

 

하기사, 온-누르도 전에 말했지 않았던가.

 

마스터의 경지로 올라가려면 기공의 완성이 필요하다고.

 

안톤처럼 기공을 버린 게 아니라면, 무인에게 있어 기공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항목이었다.

 

그리고 기공이란 절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스승이 가르쳐도 반드시 많은 시간을 요했다.

 

때문에 18세가 되어 무술을 시작한 그의 성장에는 명백히 한계가 있었다.

 

"제가 얼만큼 성장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다소 느닷없이 행해진 레트안의 질문.

 

안톤은 이렇게 되물었다.

 

"어디까지가 목표이지?"

 

"마스터. 할 수만 있다면 그곳까지 올라가고 싶습니다."

 

확실히 레트안의 재능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선천적으로 가득한 탐구심도 분명 그가 높은 경지에 이르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너무 늦게 시작했다.

 

"저는 선택받지 못한 겁니까?"

 

서글픈 중얼거림에 안톤이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그건 아니다. 장담은 못하지만 분명 가능성은 존재한다. 허나 설령 마스터가 된다한들 그 시기는 분명 인생의 황혼이 드리울 무렵이겠지."

 

레트안이 입을 다물었다.

 

현재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복잡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조금도 읽을 수가 없었다.

 

 

* * *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가 이제 슬슬 새 학기가 시작할 무렵이 되었다.

 

안톤은 레트안과 그의 친우들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결국 원하던 정보를 찾아냈다.

 

이제는 안톤도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임무를 시작할 때였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일을 도와준 대가였으니 괘념치 마라."

 

작별 인사를 하며, 안톤은 그 동안 짬짬히 시간을 내 만든 무공서를 레트안에게 주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이를 받으며 무언가 결심한 듯 말했다.

 

"저는 계속 검을 잡을 겁니다. 아, 물론 약속했던 것처럼 학문 또한 등한시하지 않고요."

 

예의 그 대화 이후로 계속 갖고 있던 고민에 대한 해답을 도출한 모양이었다.

 

"레온이라는 친구가 있다."

 

안톤은 레트안에게 레온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유는 딱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그러고 싶었고, 어째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뜬금없이 시작된 이야기였지만 레트안은 귀 기울여 이를 들어주었다.

 

"레온이라... 기억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 번 꼭 뵙고 싶군요."

 

"살다보면 그럴 날도 올 수 있겠지. 그럼 가보마."

 

안톤이 막 등을 돌리려는 찰나.

 

레트안이 언제 배웠는지 모를 포권을 하며 안톤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전에 소우든에서 스승님을 만났다는 얘기만 듣고 그새 남부의 문화를 공부한 듯 싶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포권보다 안톤을 당황케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네. 스승님과도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기를 소망하겠습니다."

 

안톤이 눈썹까지 움찔하며 되물었다.

 

"스승님이라고?"

 

왠지 모르게 듣는 것만으로도 낯이 뜨거워지는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설마 레트안이 최근 보다 격식을 차리고 잘 따른다 싶었는데,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추호도 몰랐다.

 

그나저나 현재 안톤의 반응이 화가 났다고 여겼는지, 레트안이 말을 더듬었다.

 

"아, 안 됩니까? 하긴 저 같은 게 제자라니, 조금 그렇긴 하지요. 그럼 그냥 마음 속으로만 그렇게 여기고 있겠습니다."

 

그러겠다는데 딱히 뭐라할 말도 생각나지 않은 안톤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해라..."

 

아무튼 예상보다 길어진 레트안과의 작별 인사를 끝마친 안톤은 곧장 칠황자를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물론 바로 그를 만날 방법이 없었기에, 일단은 그라테인 가로 향해 카를로스에게 대신 그를 만나고자 하는 전서를 넣게 했다.

 

칠황자라는 신분이 무색하게, 테피로스는 전서를 보낸지 불과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만나볼 수 있었다.

 

안톤은 그간 습득한 정보를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테피로스가 고갤 갸웃하며 잘못 알고 있는 정보를 정정해 주었다.

 

"아무래도 지하 하수도는 선택지에서 빼는 게 좋겠네요. 도서관에서 언제적 자료를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15년 쯤 전에 하수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면서 구조가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그럼 침실밖에 없군."

 

"네. 그냥 침실이 아니라 무려 황제의 침실이죠. 황궁에서 가장 경계가 삼엄한 곳이지만... 뭐, 안톤 경이라면 분명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과대평가를 하는군."

 

안톤의 겸손에 테피로스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톤 경은 제가 본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입니다. 그 생각은 마스터가 되고나서도 변함이 없으며, 아마 여기서 더욱 성장해 명인의 칭호를 얻는다해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드는군요."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지만, 수긍의 말을 던지기엔 멋쩍었기에 안톤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런 안톤의 서툰 반응을 보며 테피로스가 황궁의 지도를 펼쳤다.

 

"아무튼 그토록 소란을 경계하시니, 조금은 계획을 짜보죠. 일단 이번 계획의 성공률을 높이려면 형님의, 아니 황제가 침실에 없을 때를 노려야만 합니다."

 

그때가 그나마 경계가 덜하기 때문이라고 테피로스는 설명했다.

 

그러나 황제가 없는 시간엔 시녀들이 방 청소를 하기에, 소란을 벌이지 않으려면 그녀들을 제압해야만 한다는 난점이 있었다.

 

이번 일에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은 안톤으로서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방법이었다.

 

테피로스가 대안을 짜냈다.

 

"그럼 시녀들의 휴식 시간을 노리면 됩니다."

 

시녀들은 2시간을 간격으로 15분간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비록 넓은 침실을 모두 뒤지기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은 침실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셈.

 

확실히 그 동안 통로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시녀장의 칼같은 성격으로 보건데 시간이 바뀌거나 할 일조차 없을 겁니다. 제가 보증하죠."

 

자신만만한 테피로스를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럼 결행일은 내일이 어떤가요? 아침에 황궁 회의가 있을 예정이거든요."

 

그렇게 결행일이 정해진 후 테피로스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갔고, 안톤은 내일을 위해 무구들을 점검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 품 속에 고이 모셔뒀던 위스퍼 스톤이 진동했다.

 

카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아, 안톤! 별 일 없는 거죠?"

 

"갑자기 무슨 일이오?"

 

"그게... 기분 나쁜 꿈을 꿨거든요. 그냥 꿈인 건 알지만, 왠지 불길해져서 혹시나해서 연락을 해봤어요."

 

"하하. 모두 잘 풀려가고 있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카린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톤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 * *

 

그날 저녁.

 

황제의 침실과 붙어 있는 야외 정원에 두 형제가 오랜만에 마주보고 앉았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형제라 보기 어려웠다.

 

딱히 쌀쌀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남남을 대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듯 하달까.

 

그것은 유난히 탁한 그들의 동공 때문만은 아니었다.

 

"안톤이 드디어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내일 오전 9시. 시녀들이 청소를 하느라 자릴 비울 때를 노려 이곳으로 숨어들 계획입니다."

 

테피로스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은 대답하는 황제, 아이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서 아르토르님에게 말씀을 드려야겠군."

 

"네."

 

마치 인형끼리 나누는 듯한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테피로스가 자리를 뜨자, 아이론은 침실로 돌아가 벽난로를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아래로 통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지만, 아이론은 무뚝뚝하게 걸어 이를 내려갔다.

 

어느 정도 내려가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지하 공동이 나타났다.

 

사실, 지하 공동이라고 하기에도 뭣했다.

 

불이 밝혀져 환한 그곳은 황제의 침실만큼이나 잘 꾸며져 있었다.

 

대륙 유일의 황제 아이론은 대뜸 무릎을 꿇었다.

 

바로 그곳에서 오만하게 의자에 앉아 어여쁜 미녀에게 시중을 받고 있던 사내에게 말이다.

 

"무슨 일이죠? 아이론 황제."

 

아르토르의 물음에 아이론이 테피로스에게 들은 보고를 앵무새처럼 그에게 고했다.

 

이를 모두 들은 아르토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내일이라. 마침 방금 준비가 다 끝났는데 그것 참 아주 잘 됐군요. 이번에야말로 그를 끝장내버릴 수 있겠어요."

 

아르토르가 활기찬 목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론 황제. 더 보고할 게 없다면 이만 가보세요. 당신은 내일 일찍부터 일어나 회의를 하러가야 하니까."

 

"예."

 

뚜벅뚜벅.

 

아이론이 떠나가자, 아르토르가 잔을 들었다가 도로 테이블에 내려놨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직 축배는 이른 것 같네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살리첸?"

 

옆에 있던 미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내일이면 축배를 드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녀의 대답이 썩 맘에 들었는지, 아르토르가 광소했다.

 

"하하! 내일 그 자가 지을 표정이 기대되네요. 지금까지 모든 게 내 손바닥 안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대체 어떤 얼굴을 할까요.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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